열하일기 - 청소년들아, 연암을 만나자 만남 1
박지원 지음, 리상호 옮김, 홍영우 그림 / 보리 / 201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의 여행 동반자 박지원

 

여행을 처음 시작한 20대 후반부터 나는 혼자서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다. 유럽 배낭여행 중 일행과 떨어져 이탈리아 기차역에 홀로 남겨졌을 때, 마치 얼굴을 물 속 깊이 집어넣은 듯한 숨 막힘의 공포를 느낀 이후에는 더더욱 그랬다. 겁 많은 내게 여행 동무는 중요하다. 재미있어야 하며, 낯선 곳에서 재빠르게 새로운 정보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내게 <열하일기>속의 박지원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여행 친구로 다가왔다. 청소년을 위한 한글 번역판 <열하일기>는 여행 안내서로 충분했다. 250년 전, 18세기, 44살의 나이에 맞이한 다섯 달 여의 여름 중국여행. 때론 연경에서 열하까지 청나라 황제의 생일 축하 사절로 떠난 그가 때론 ‘세수하는 것과 머리 빗는 것’이 싫증날 때도 있었다. 그의 여행 목적은 ‘일 없이 놀 양’이었다. 소주와 청심환 1개를 바꿀 정도로 풍류 즐기는 그와 함께 그냥 놀기만 하면 됐다.

 

유머와 여유 잃지 않기

중국의 어느 장소를 가나 박지원은 웃음 바이러스를 몰고 다닌다. 처음 만나는 중국 사람과 금세 친해지고 음식을 나눠먹는다. 그가 가져갔던 청심환, 나눴던 필담은 사람들과 더 친해질 수 있는 무기였다. ‘전당포에서 뻗친 망신살’은 개그콘서트의 한 장면 같다. 전당포 주인에게 ‘기상새설(欺霜賽雪)’이라는 글씨를 ‘마음이 서릿발같이 맑고 깨끗하며 눈보다 더 희다’의 뜻 그대로, 장사하는 사람이 지켜야 할 본분의 의미로 해석해서 써 준다. 박지원의 글을 보고, 전당포 주인은 당치 않다고 소리 지른다. 박지원은 그 상황에서 ‘촌뜨기 놈들이 글씨 잘 쓰고 못 쓰는 것을 알아볼 게 뭐람!’이라며 투덜거린다. 하루 뒤에 다른 가게에 가서 알고 보니 그 글씨는 밀가루 가게에 붙여야 되는 글씨였다. 나중에 그 상황을 듣고 숙소에 있던 사람들은 배를 잡고 웃는다.

그는 곁에 있는 사람들을 유머로 무장해제 시킨다. ‘한바탕 울 만한 자리로구나’에서도 역시 웃음 코드가 등장한다. 백탑의 경치를 보고 ‘한바탕 울 만한 자리’라고 호방하게 말하는 박지원. 울음이 단순히 슬픔이 아닌 기쁨, 즐거움, 사랑 등등의 다양한 감정을 담는다고 말하는 그. 어느새 절친한 길동무가 된 무관 정 진사 이하 사람들이 ‘배고프고 피곤한데 왜 안 우느냐’며 그에게 농담한다.

그는 만리장성에 가면서는 벼루 물이 없을 때에는 술로 먹을 갈아 글을 쓰는 남자이다. 열하의 술집에서는 몽고 사람, 회회(아라비아) 사람 앞에서 단숨에 차가운 술을 마셔서 제압하는 호방함을 보였다. 또 중국의 거대함에 전혀 주눅 들지 않는 남자였다. 이미 그는 여행 첫 출발에서 거대한 중국에 기가 꺾여서 발길 돌리고픈 마음을 느꼈지만 곧 그 맘을 버리고 ‘만사가 평등하면 질투가 없다’며 ‘평등한 눈’을 가지려고 했기 때문이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지라도

박지원이 웃음과 여유를 갖게 된 비결. ‘세상에 한 사람이라도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얻는다면 정말 여한이 없거든!’ 유머 넘치는 남자 박지원이 중국 여행 중에 이렇게 가끔 한숨쉰다. 그것은 어쩌면 진정 그런 사람과 만날 수 없는 어지러운 상황의 끝에 터득한 지혜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 여행의 시작, 압록강을 건너는 중 다른 이는 건너는 데에 급급할 때에 박지원은 홀로 강기슭과 물이 아닌 그것이 만나는 경계선인 ‘짬’에서 도(道)를 찾는다. 이분법을 넘어선 그의 사고가 새롭다. 이는 일찍이 과거를 단념한 그가 진사 자리 같은 벼슬 대신 얻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박지원처럼 ‘벼루, 거울, 붓2자루, 먹, 공책4권, 이정록’(여행기록을 적은 공책)만 가지고 있으면 ‘천하에 가장 무서운 요술, 충성을 가장한 큰 역적, 덕행을 가장한 점잔’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끊임없이 기웃거리기

중국 여행 중 그는 사물을 예사로 보지 않았다. 중국의 것을 보고 좀 더 연구해서 가난한 우리네 형님 아우님들이 고생 면하기를 바랐다. 물통 메기, 벽돌, 수레, 온돌, 깨진 기와조각, 거름덩이, 똥, 목축 등등을 ‘이용후생(利用厚生)’의 관점에서 보았다. 물건을 이롭게 써야 생활이 넉넉해지며 생활이 넉넉해야 질서를 바로 잡을 수 있다고 했다. 또 밤마다 일행을 떠나 숙소 밖 상점에서 다른 사람과 교제했다. 몰래 혼자서 빠져 나가면서 하인 장복이 더러는 ‘누가 찾거든 뒷간에 갔다고 해라’고 말하며 여기저기 누비고 다녔다. 다양한 책도 샀다.

진정 여행자다운 모습이었다. 여러 가지 호기심으로 돌아다니느라 들썩들썩 흥이 나는 그의 뒷모습이 상상된다. 그가 만약 살아 있다면 나는 그와 함께 낯선 오지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 그와 함께라면 새롭지 않은 것, 귀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 같다. 박지원은 멋진 사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