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을 가지고 '나=생각'이라고 믿는다는 증거이다. 바로 눈앞에 있는 살마을 살아 있는 인간으로 보지 않고 나의 사고가 만들어낸 개녀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생생히 살아 있는 사람을 죽어버린 개념으로 격하시키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30쪽
삶의 달인은 지배하지 않는다. 그저 광대한 순수의식에 삶의 중심을 맞춰두고 그것이 말하고 행동하고 일하도록 맡길 뿐이다.-33쪽
에고가 삶의 주인일 때, 지금 이 순간은 언제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격하된다. 나는 미래를 위해서 산다. 하지만 목적을 이루었을 때도 만족하지 못하며, 있다 해도 오래가지는 못한다.-40쪽
지금이 지금의 모습인 것은 그 밖의 다른 모습으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53쪽
아주 단순하면서도 매우 혁신적인 정신 수행이 있다. 바로 지금 일어나는 것을 무엇이든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안에서든 밖에서든 말이다.-53쪽
나의 생각과 감정과 지식과 경험은 내가 아니다. 내 삶의 내용물은 내가 아니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만물이 생성되는 공간이다. 나는 순수의식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이다.-56쪽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의 구조 속에는 이미 자신의 참모습을 모른다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잃었다'는 말, '나의 삶'이라는 말 속에는 마치 삶이나 생명이 소유하거나 잃을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있다. 나는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다. 내가 바로 생명이다. 우주 전체에 충만한 '한 생명' 또는 '한 의식'이 잠시 한 형태를 취하여 돌멩이로, 풀잎으로, 동물로, 인간으로, 별로, 은하계로 체험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61쪽
사고와 언어는 날카로운 이분법을 적용해 다른 것들과 분리된 인간존재를 만들어낸다.그런 인간이 실제로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진실은 나는 나무를 인식하는 사람도 아니고, 사고 감정 체험이 거기 있음을 알아차리는 사람도 아니다. 나는 맑은 마음이다. 나는 순수의식이다. 나를 통해 사고 감정 체험은 나타날 수 있다.-63쪽
사람들의 삶은 욕망과 두려움의 지배를 받는다. 욕망은 무언가를 '더하여' 좀더 풍성해지려는 욕구이다. 반면 모든 두려움은 무언가를 '잃어'자신이 작고 초라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렇게 더하고 잃어러리는 두 가지 활동은 생명이란 것이 본래 줄 수도 빼았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풍요한 생명은 이미 지금 이 순간 당신 안에 존재한다.-66쪽
불교의 선사는 선의 정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는 것'이라 말했다.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한다는 것은 내가 하는 일에 몰입하는 것, 그것에 나의 온전한 마음을 다 주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순응하는 것이다.-72쪽
그렇다면 지금 당신에게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행복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의 '그러함'을 그대로 두어라. 그것으로 충분하다.-75쪽
혹시 당신의 주위에 자신과 남에게 고통을 주고 불행을 전염시키는 것을 즐거움 삼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를 용서하라. 그 사람도 인류가 깨달음으로 가는 대열의 동참자이다. 그가 맡은 역할은 에고에 갇힌 의식을 과장해서 보여주는 것, 순응하지 않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역할이다. 그의 행동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그의 본래 모습은 그렇지 않다.-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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