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계월은 희덕이 다니는 여학교 기숙사에 사감 선생님으로 부임해온다. 이 시기는 문화통치와 민족 말살 통치 사이에 속하는 시기로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없애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던 시기이다. 또 한편으로는 외부로 눈을 돌리며 전쟁의 야욕을 드러내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한국 사람으로 정체성을 지켜며 살기 힘들었던 시기이지만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흡혈마, 뱀파이어에게는 마음껏 활동하며 배를 채우기 딱 좋은 시기였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렇지만 계월은 피에 굶주려 사람들의 폭력을 부추기는 것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인다. 외세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가 된 조선의 현실에 가슴 아파하고 폭력과 전쟁을 부추키는 자에게 대항하고자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착취당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고 그들과 긴밀히 연대를 이어가며 독립운동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흡혈마라는 존재가 드러날까봐 존재를 숨긴 채 은밀히 뒤에 숨어 후원해주면서. 계월의 도움을 받은 인물들과 그 인물들이 모여 만든 공간은 숨 막히는 식민지 시대에 고통받던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숨을 트일 수 있도록 해준다.
희덕은 그런 계월을 기억해주는 인물이다. 처음에는 아침식사를 위해 동물을 잡고 배고픔 때문에 다른 사람의 피를 먹는 계월을 보고 희덕은 경악하며 혼란스러워하기도 하지만 이내 시간이 지나며 계월을 계월 그 자체로 바라보게 된다. 자신이 겪지는 않은 계월의 아픈 과거에 분노해주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계월을 위해 위험한 곳인 줄 알면서도 그를 위해 함께 따라나서기도 한다. 제약적인 영역을 벗어나 흡혈마가 되었지만 그로 인해 혼란을 겪는 계월의 곁에서 가장 큰 힘이 되어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엄청난 힘을 가지고 폭력과 전쟁을 조장하는 인물에게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지키겠단 일념 하나로 자기 자신을 내던지기도 하는 희덕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단단하다. 무엇보다도 희덕은 계월을 그대로 '기억'하는 인물이다. 사람들의 기억을 지우는 계월의 초능력이 유일하게 통하지 않아 초반엔 계월을 난처하게 만들지만 대다수의 사람들 기억에서 지워지고 사라진 계월을 기억하는 건 결국 희덕이다. 계월이 이름과 신분을 계속 바꾼 채 사라진다 할지라도 희덕은 그런 계월을 계속 기억할 것이다.
일제강점기 많은 여성들이 희덕과 계월처럼 결혼을 강요하거나 좋은 부인이 되기만을 바라는 견고한 성차별을 뚫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거나 독립을 위해 힘썼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이름들은 역사에 남지 못하고 사라지거나 그 끝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자신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떠난 계월처럼. 다행히도 최근 들어 잊혀지거나 사라진 이들을 주목하고 다시 불러내 기억하려는 움직임이 많아지고 있다. 1931 흡혈마전에서 계월을 기억하는 희진을 통해 잊혀진 그들을 불러낸 작가의 노력처럼 우리도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
*특이점 : 소설의 각 장 제목이 어쩐지 익숙하다 싶으면 그것은 착각이 아니다. 작가의 말에 밝힌 바에 따르면 각 장의 제목은 한국 근현대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