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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커 ㅣ 래빗홀 YA
이희영 지음 / 래빗홀 / 2024년 5월
평점 :
《페인트》로 우리에게 친숙한 이희영작가가 신간을 냈네요. 처음 《페인트》를 읽었을 때는 가독성이 좀 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몇 장을 넘기고는 몇 달이 지나서 다시 읽고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이라고 감격했는데요. 이번 책 역시 독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줍니다. 이번 책은 칵테일을 마시면 과거의 어느 한 시점으로 돌아가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겠죠? 그때가 너무 행복해서 돌아가고 싶기도 하고, 너무 후회돼서 돌아가고 싶기도 할텐데요, 그런데 막상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언제로 돌아갈까 생각해보니 답을 내리기가 어려웠어요.
친구의 친구를 사랑한 식상한 이야기이지만, 친구가 죽고 나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서른 두살이 될 때까지 첫사랑 그녀를 지켜주는 나우는 어떤 과거로 돌아가게 될까요?
"손님은 뭔가 시도를 했습니다. 그렇다고 뭐든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아마 인간에게 어려움이나 좌절, 실패나 패배도 없겠죠. 세상에나, 그건 상상만으로도 지루하군요. 사는 게 너무 재미없지 않겠습니까." -P.124
"억지로 지우려 하다가는 더 큰 얼룩만 남게 되는 경우가 있죠. 해변의 자갈이 파도와 바람에 마모되어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잘게 부서져 모래가 될 뿐이죠.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추억이든 아픈 상처든 빛이 바랠 뿐입니다.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죠." -P.126
"대학만 가면, 제대만 하면, 졸업만 하면, 취업만 하면... 그렇게 수많은 '하면'의 장벽 뒤에 나타나는 건 더 넓고 까마득한 벌판뿐이었다." -P.212
"열다섯이 이해하기엔, 열아홉이 감당하기엔, 스무 살이 견디기엔 너무 어렵고 힘든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그 힘든 시간을 잘 견디며 지나왔다. 신은 인간에게 미래를 준비할 혜안을 빼앗는 대신, 그 미래가 현실로 닥쳤을 때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버텨 낼 힘을 주었다." -P.216
책을 읽으면서 내가 과거의 어느 때로 돌아갈지에 대한 질문과 함께 또 다른 장면이 인상깊었습니다. 그것은 서른 둘의 나우가 열다섯, 열아홉의 나우가 되었을 때 거울을 보는 장면이었어요. 이런게 앳되고 부드럽고 여린 얼굴을 그동안 스트레스와 커피와 술로 괴롭혀 다 망가뜨렸다는 생각을 하는 장면인데요... 나는 열다섯의 내 얼굴을 마주한다면 어떨까? 생각해보았어요. 열다섯의 여드름이 있는 화장기없는 민낯의 나는 처음에 좀 어색하지만, 얼마나 예쁠까? 감탄하면서 거울을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거리의 중학생들 얼굴만 봐도 예쁘고 싱그럽고 부럽잖아요.
책을 읽는 내내 "선재 업고 튀어"라는 드라마와 아주 많이 흡사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인간은 왜 끊임없이 타임슬립 스토리를 찾는 걸까요? 내 전재산을 내어서라도 어떤 한 과거에 가서 삶을 바꾸고 싶기도 하고, 지금은 곁에 없는 누군가가 사무치게 그리울 때면 단 한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아마 인류가 존재하는 한 타임슬립 스토리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런데 열다섯의 나를 만나 나의 미래를 말해준다고 해도 내 삶이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변할 것 같지는 않아요. 나는 그저 좀 더 몸에 좋은 것을 많이 챙겨먹고, 운동을 좀 더 하고, 좀 더 부지런하게 살게 되기는 하겠지만.... 나의 미래를 알든 모르든 나는 미래의 나에게 미안해지지 않기 위해 오늘을 삽니다. 죽을 때 좀 더 하지 못해서 안타까웠던 일을 줄이는 삶을 삽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