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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골의 서
로버트 실버버그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고대 언어에 조예가 깊은 일라이가 어느날 <두개골의 서>라는 문서를 발견, 해석한다.
< 들을지어다. 고귀한 자여. 영원한 삶을 그대에게 내리노라. 죽음이 삶과 함께 놓여 있는 것처럼, 두개골은 얼굴 아래 놓여 있다.
아홉번째 비의는 이것이다. 생명의 대가는 언제나 생명이어야 하는 법. 고귀한 자여, 영원은 반드시 절멸에 의해 보상되어야 함을 알라. 둘은 우리 품에 받아들여질 것이되 둘은 암흑으로 가야 할지로다. 삶으로 해서 우리는 매일 죽고, 그러므로 죽음을 통해 우리는 영원히 사는 것이다. >
영생이란 뭘까? 고독, 지루함일 수도 있지만 한없는 무기력함이다. 영생을 꿈꾼다는 것 자체가 인생의 의미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겨우 100년도 못사는 인간이 영생을 꿈꾼다는 것은 너무 우습다. 한 사람이 정열적으로 사는 기간은 대체 얼마나 될까? 행복하게 사는 기간은 또 얼마나 될까? 엄청난 발전, 대단한 업적, 눈부신 성취를 이루는 시간은 또 얼마일까? 이 세가지를 다 합쳐서 30년이 넘을까? 30년 넘게 엄청난 업적을 세운 인물이 있는가? 살아 생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생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생명연장의 꿈을 꾼다. 심각한 공해, 환경파괴와 더불어 의학을 비롯한 생명관련 학문의 발전 또한 눈부시다. 자연속에서 살며 장수하는 마을과 메트로폴리스에서 웰빙을 꿈꾸는 자들이 공존하는게 현대사회다. 단지 오래산다고 좋은가? 10년을 살아도 열심히, 행복하게, 자유롭게 살면 그만 아닌가? 나는 개인적으로 70살도 넘친다고 생각한다. 60 이후의 삶은 그냥 덤일 뿐이다. 아니 그때까지 결판을 못낸 사람에게 주어진 연장전일 수도 있다. 연장전이 한없이 늘어진다고 시합이 재미있는건 아니다. 10부작을 30부로 늘여뺀다고 드라마의 양이 풍부해지는 것도, 질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영생을 꿈꾸며 대륙을 횡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한 세대 동안 하지 못하는 일은 다음 세대에게 맡기면 된다. 천재는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겠다는 것도 과욕일 뿐이다. 한가지만 제대로 하기도 힘든게 인생이다. 매일 같은 일의 반복을 100년도 아닌 1000년 동안 아니 그 이상 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료한가?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현재와 현실, 가까운 미래와 이상이다. 100년, 1000년 뒤를 꿈꾸는 것은 잠깐 머리속에서나 할 일이다.
네 명의 대학생은 영생을 향한 여행을 떠난다. 하나는 학문적 호기심에서, 하나는 영생에 대한 열망으로, 하나는 낭만적인 모험으로, 하나는 자존심 때문에 따라간다. 그러나 이들은 삶과 죽음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넷 가운데 둘이 죽어야 한다는데 그런 모험을 향해 떠난다고? 그게 손해나는 장사가 아니라고? 한 사람의 생명으로 다른 사람이 영생을 얻는다고? 그렇게 얻은 영생이 가치가 있을까? 죄책감없이 살 수 있을까? 한 사람은 살해되고, 한 사람은 자살한다? 그럼 나머지 둘은 어떤 식으로든 살인자가 되고, 자살 방조자가 된다.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의 삶을 부정하는 것은 부당하다.
영생의 대가는 타인의 생명이다. 타인의 생명을 부정해야, 아니 타인을 죽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얻은 영생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남을 살리기 위해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아름다울 수 있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것은 부득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주어진 인생을 넘어선 욕심에 불과한 영생을 얻기위해 타인을 죽이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처음에 두 사람의 영생을 위해 두 사람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대목에서 난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서는 피지배계급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이데올로기가 떠올랐다. 하나는 스스로 기꺼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지배자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대한민국에도 이런 사람들 많다. 자기 분수, 주제도 모르고 지배계급의 이익에 목숨거는 사람들이 있다. 또 하나는 지배자들에게 저항하다가 희생당한다. 이 마지막 희생자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을까?
여자는 맨얼굴위에 화장을 한다. 사람들은 때로 가면을 쓴다. 자신의 본모습이나 감정을 숨기려는 것이다. 술에 취하면 본색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고, 가면을 쓰면 놀랍게 달라지는 사람도 있다. 두개골은 뭘까? 맨얼굴에 가려진 내면? 죽음? 사람들이 모두 두개골만 가지고 돌아다니면 좀더 솔직해질까? 아니면 평등해질까?
일라이 스타인펠드는 리투아니아계 유대인이다. 그는 고대 언어에 빠져있다. 그는 학부생이지만 이미 실력을 인정받는 학자다. 책속에 파묻혀사는 전형적인 책벌레로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다. 퀸카 앞에서는 한없이 쪼그라든다. 네드는 아일랜드계 동성애자다. 그는 미학을 추구한다. 그는 시와 단편소설을 쓴다. 물론 아직 출판한 적은 없다. 그는 여러곳을 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올리버는 캔자스 출신 촌놈이다. 아버지가 삼십대에 갑자기 병으로 죽고 다른 가족들도 죽어서 혼자다.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강하고, 생명연장에 대해 관심이 많고 그래서 그는 의대생이다. 그는 촌구석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듯 공부했다. 그는 섹스는 즐기지만 일라이도 하는 대마초는 안한다. 티모시는 전형적인 동부귀족이다. 그의 가문은 8대를 이어지는 명문가이다. 그는 섹스를 즐긴다.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대학생활도 그에게는 거쳐가야할 과정에 불과하다.
일라이 - "확률은 반반이야. 실존을 건 도박이지. 둘은 영원히 살고, 둘은 죽고."
'우리는 서부로 간다. 사막을 향해. '두개골의 수호자'들을 만나기 위해.'
네드 - 매력적인 점은, 승부욕을 자극하는 점은, 미학적으로 좋아하는 점은, 생명의 유한함으로부터 두 명이 해방되기 위해 나머지 두 사람이 사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두개골의 수호자들이 제시한 조건이었다. 올리버가 아스클레피오스식 의식을 통해 생명을 보전하는 데 신경을 쏟는 동안, 나는 현대적 난해함을 끄적이는데 만족하고, 일라이는 고대의 잊혀진 난해함을 끄집어내는데 만족하고, 티모시는 폴로 게임에만 열중하고 있다. 아프리카 부시먼족의 사냥 원정대는 매우 결속력 강한 네 명의 집단으로, 우선 대장이 있고, 마법사이자 주술사인 샤먼이 있다. 사냥꾼이 있고, 광대가 있다. 티모시가 대장이고, 일라이가 샤먼, 올리버가 사냥꾼이다. 그리고 나는 광대다.
티모시 윈체스터 -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만은 잊지 마라, 티모시. 인류에 대한 가장 좋은 공부는 바로 인간이다. 이건 삼천년 전에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한 것이고 아직도 진실이다." 아버지는 지금 이런 광경, 즉 동성애자 하나, 유대인 하나, 촌놈 하나와 어울려 차를 몰고 가는 광경을 보셔야 한다.
올리버 마셜 - 남들은 나만큼 내 목숨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내가 운전할 때가 가장 안전하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전 우주에서 내 목숨보다 더 신성한 것은 없으니, 죽고 사는 문제만큼은 최대한 내가 결정한다.
영생에 대해 네 사람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일라이, 네드 -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올리버 -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믿는다. 그게 유일한 희망이니까.
티모시 - 믿을 만한 근거가 생기면 믿겠다.
네 사람은 각자 내면속에 깊히 감춰둔 어두운 비밀을 한 사람에게 고백해야 한다. 그런데 막사에 틀어박힌 아킬레우스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는 항상 죽을 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에게 인생이란 명예로운 죽음에 불과했다. 그것이 트로이 원정에 나선 순간부터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그는 명예롭게 죽기 위해 아가멤논의 굴욕을 참아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