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인간 - 팬데믹에 대한 인문적 사유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문정 옮김 / 효형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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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이후, 이와 관련하여 개인적인 견해가 담긴 글을 가까이 하지 않았었다. 어쩌면 그들의 말의 일부는 맞을 지라도, 대개 너무도 주관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르조 아감벤의 사유는 달랐다. 그는 냉철하였으며, 그럼에도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야 이미 겪어본 일인지라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생각들을 팬데믹이 갓 일어난 2년 전에 했다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팬데믹 상황이 근대 국가의 논리를 강화하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상황이 생물학적 생명을 우위에 놓았던 근대 정치, 생명정치의 공고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팬데믹 상황이 지속되는 동안 썼던 글들을 이 책에 엮었다. 그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전환'에서 새로운 형태의 저항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정치 제도와 사상에 대한 성찰에 헌신해야 하며, 오래되고 낡은 형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혹은 이를 대체하고 있는 기술-보건적 독재주의를 그대로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한다.

책 속의 '인간은 보통 타인과의 접촉을 두려워하고, 거리 두기는 이러한 두려움의 결과지만, 이러한 두려움이 전복되는 유일한 상황이 군중이다.' 라는 말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인간 사이의 모든 접촉의 제한, 보편적인 신념과 신앙의 붕괴 등 팬데믹으로 인한 여러 사회 문제들을 냉철하게 파악하는 조르조 아감벤의 글은 우리에게 전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을 선사해준다.

인류 문명에 대한 고찰을 조르조 아감벤의 시선으로 사유할 수 있어, 추천하는 책 :)

📖 바이러스 사태로 인한 현 상황을 두고 전쟁을 떠올리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긴급 조치는 사실상 우리가 통금 시간에 맞춰 살아가는 것을 의무화한다. 그러나 어딘가에 숨어 실체가 보이지 않는 적과 벌이는 전쟁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전쟁이다. 이는 사실상 내전이다. 적은 외부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 나는 분명 도덕적 명분을 위해 뒤따르는 거대한 희생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들에게 나는 나치의 장교 아이히만을 말해 주고 싶다. 아이히만은 분명히 본인의 선의로, 칸트의 도덕 법칙이라고 믿었던 것을 실현하기 위해 지극히 개인의 양심에 따른 행동을 자행했다. 선을 위해 선을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짓이며 모순이다.

📖 오늘날 인간은 해변에서 지워진 모래의 얼굴처럼 사라져 간다. 그러나 그 자리를 차지하는 세상은 더는 존재하지 않으며, 권력과 과학의 숫자의 자비에 따라 침묵하는, 역사가 없는 벌거벗은 삶뿐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 파괴 후에 천천히 혹은 갑작스럽게 무언가가 도래할 수도 있다. 물론 신이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동물 혹은 다른 어떤 살아있는 영혼일 것이다•••
(서평단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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