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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몬이 그랬어 ㅣ 트리플 1
박서련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평점 :
박서련 작가의 체공녀 강주룡이나 마르타의 일을 읽었던 독자라면 어, 이게 같은 작가라고? 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새롭고, 어둡다가 밝다가 혼란스러우면서 솔직함이 깃든 것 같아 좋았다. '호르몬이 그랬어'는 트리플 시리즈인 말 그대로 세 개의 단편이 들어있는 작고 얇은, 앉은 자리에서 후딱 읽을 수 있는 책이었고 나도 금방 다 읽고는 다 끝나간 페이지에 아쉬웠다.
'다시 바람은 그대 쪽으로'는 박서련 작가의 20대 시절을 몰래 훔쳐보는 기분 이었다. 성별이 짐작이 되지 않았던 '예'라는 이름도, 의미 없는 사람에게 '1', '2'를 매기며 이름 짓는 것도. 어떤 문장들은 나의 대학 시절, 철없던 시절, 생각 없던 시절, 문득 잊고 있었던 지나가던 수준의 사람과의 인연들이 조금씩 떠오르면서 부끄러운 미소를 짓게 하기도 했다. 굉장히 새로운 스타일의 글이라서 서평을 쓴다는 것 자체가 민망하기도 하고 감히 평가같은 것을 해도 되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소설과 수필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 하며 추측하는 방식은 모든 작가들이 쓰고 싶은 주제가 아닐까 한다. 사실 모든 소설은 '있음직한 일'을 꾸며내기 위해서 내가 해온 경험을 담게 되는 일이 많다. 겪은 일들을 쓰게 되면 더 자세히 그때의 기분을, 냄새를, 시간을 담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박서련 작가의 이 때의 기분이 담겨져 있던 때는 언제였는지 궁금해진다.
세 편 중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단편은 역시 이 책의 제목인 '호르몬이 그랬어' 였다. 어머니를 '모친'이라는 표현으로 쓴 것도, 모친의 애인이 사준 패딩 점퍼를 입고 그 남자를 만나러 간 길의 묘사는 누구라도 겪어본 일이 아닐까 싶다. 낡은 소매가 드러날 까봐 레스토랑에서 그 두꺼운 패딩을 벗지 못하는 주인공의 답답함이 지면에서 느껴져서 내 등에도 식은땀이 흘렀다. 엄마한테 애인이 있는게 어때서, 라고 생각하던 나는 이 집 안에 아버지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는 잠시 놀랐지만 말이다. 존재마저 흐려져 가는 사람인 아버지를 '애비'로 쓴 이유가 있다 싶었다. 호르몬이 어떤 호르몬인가 했는데 매 달 시달리는 생리를 말하는 것일지는 상상도 못한 전개였다.
마지막 작품인 '총'도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인공의 마음이 되어 그 먼 곳 까지 가서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오고, 식은 땀나는 그 여정을 마친 다음에 나에게 기다리고 있는 결말이란, 참담하면서 잔인하면서도 후련하기도 했다. 이미 이렇게 와버린 것을 어떡하냐는 듯한 작가의 마음이 담긴 듯했다.
책은 얇았지만 이 얇은 지면을 채우기 위해 수 많은 밤을 지새웠을 작가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