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백수린 옮김 / 미디어창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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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5일에 한국에서 다시 출간된 이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무던히도 비가 많이 내렸던 올 해의 여름을 마무리하는 데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집어들었다.


가벼울 것만 같던 제목과는 다르게 책을 덮은 후 줄거리조차 정리하기 힘든 책이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프랑스의 비트리라는 소도시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는 있지만 줄거리를 특정 지을만한 사건이 있지도 않고, 시종일관 신비스럽다.


책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에르네스토부터가 어딘가 묘하다. 이방인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부모 밑에서 방치되다시피 자란 이 소년은 읽을 줄 모르지만 읽는다, 정확히는 읽어낸다.


"그는 어떤 단어가 지닌 형상에다, 온전히 자의적인 방식으로, 첫 번째 의미를 부여했다. 그다음엔 이어지는 두 번째 단어에, 첫 번째 단어의 의미를 고려해 의미를 부여했고, 이런 식으로 문장 전체가 말이 되는 무언가를 의미할때까지 계속했다. 이런 식으로 그는 결국, 읽는다는 것은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가 자신의 고유한 육체 속에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거라는 걸 이해하게 됐다." (p.16)


책의 초반부에 읽는 법을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주인공이 무언가를 읽고, 읽어내는 방식은 독자가 이 책을 읽어가는 데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해주는 것 같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반어적이고 앞뒤가 맞지 않는 서술들이 어지러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에르네스토의 부모는 아이들을 무척 아끼는 듯 보이지만, 그들의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늘 같은 음식만 먹이는 등 방치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이들은 부모를 따르지만, 부모가 그들을 언제 버릴 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늘 갖고있다.


에르네스토는 글을 읽지 못하지만 이해하고, 아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 아니라 모르는 것만을 가르치기 때문에 학교를 그만둔다.


이렇듯 모든 것이 전도되고, 정합적으로 읽기 힘든 이 책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결국 문장들을 통과해내는 독자 각자의 나름의 태도에서 나올 것이다.


이 글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면, 그것은 '이해'일 것이다. 에르네스토가 무언가를 읽는 방식, 에르네스토와 동생 잔이 대화하는 방식,학교를 그만두는 에르네스토를 바라보는 교사의 방식, 그리고 에르네스토와 부모의 대화 속에는 끊임없이 '이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를 이해할 때, 이해한다고 할 때의 그 상황은 전혀, 단연코 하나도 정합적이지가 않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이해하고 끄덕인다.


무언가를 잘 이해한다고 할 때, 그 의미는 무엇일까? 흔히 어떤 것의 전문가가 그 어떤 것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읽을 줄 모르는 에르네스토가 쓰여진 글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듯) 이해하듯이, 비록 그 책은 불에 타 읽을 수 없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 책을 이해하듯이, 무언가에 대해서 가장 '잘' 이해한다는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 우위를 가질 만한 이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혹시 뒤라스는 철저한 반 플라톤주의자가 아닌 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정합적인 구조, 말로 설명 가능한 무언가를 책 속에서 내내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읽을 줄 모르는 에르네스토가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한 뒤에 누군가에게 정말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 다시 확인하고 그제서야 안도하는 장면에서는 아리송하기도 했는데, 어쩌면 이것은 뒤라스를 반플라톤주의자로 제한하고자 하는 이해 조차도 전복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아닐까. 어떤 하나의 정합적인 논리를, 사고를 절대 하지 못하도록. 

추론이 불가능하도록 짜여야하는 이야기를 이해가 가능한 이야기로 무너뜨리고자 한다면 실패한 시도가 될 뿐이니까.


또 이 책을 돌아볼 때 생각나는 키워드는 사랑, 정확히는 '사랑의 모양'이다.

뒤라스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사랑'의 모습조차도 전복시킨다. 누군가에게는 아동학대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 이 가족의 형태 안에서 가족 각자는 나름의 편안함을 느낀다. 에르네스토 형제들은 부모를 피해, 그들끼리 동굴같은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으면서도 안락함을 느낀다.

이 가족의 아버지는 아내를 너무 사랑하지만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한 시도 떨어질 수가 없어서 기본적인 생계를 책임지지도 못하고, 때로는 아내의 이름마저도 헷갈려서 여러 이름으로 아내를 부른다.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지만,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기차 안에서의 '그'가 남편인지 아닌지 헷갈리기도 하고 부담도 느낀다.

에르네스토와 잔은 이 가족을 받치는 기둥처럼 보이는 우애있는 남매이지만 때로는 그들의 우애가 남녀간의 사랑처럼 보이기도 하고, 끝끝내는 그들은 함께 있지 못하고 각각의 위치에서 살아간다. 


어쩌면 사랑의 반대 말로 불릴 수 있는 것들조차 이 글 안에서는 모두 '사랑'의 다양한 모양으로 나타난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에르네스토가 무언가를 읽고 이해하는 것처럼 말이되지 않는 것 같지만.


단순히 천재 소년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면, 뒤라스는 이방인 가족의 별 볼일 없는 아이가 아이가 아닌, 귀족 자제나 더 훌륭한 집안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뒤라스가 바라보는 '산다는 것'은 그저 이렇게 흘러 간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 같다.

삶은 이해할 수 없는 단면과 모순들이 동시에 발현되는 면면들로 점철되어 흘러간다는 것을.


이 책의 또하나의 특이한 점은 소설 속에 희곡처럼 주인공의 대사가 툭툭 튀어 나온다는 점이다.

주인공들의 대사가 소설속에 녹여있지 않고 갑자기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가 된 듯 이름과 대사가 이어진다.


희곡 속에서 또하나 특이한 점은 '침묵'이라는 부분이 강조된다는 점이다. 한 명의 대사가 끝나고 다음 사람의 대사가 이어질 때 휴지(休止)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일텐데도 불구하고 대사의 끝마다 혹은 어떤 장면의 면면마다 뒤라스는 침묵이라는 단어를 배치시켰다.


그런데 '침묵'이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에 자칫 재개발을 앞둔 어느 시골마을 이방인들의 비참한만을 부각시킬 수 있는 이야기에 여백을 주어 부조리함을 강조시키고 나아가 웃음을 자아내기까지 하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이 글의 가장 이상한 점은 마무리 부분이다. 

이렇게 글이 쓰여졌다면 정말 물 흐르듯, 이게 끝이야? 라는 생각이 들도록 끝나버릴 줄 알았지만, 비트리에 첫 여름비가 오열하는 파도처럼 세차게, 격정적으로 쏟아져 내린(P.196) 후에는 갑자기 정말 놀랍도록 상식적인 마무리를 가져와 끝낸다. 에르네스토는 교수가 되고, 잔은 나름의 삶을 살며 에르네스토를 줄곧 봐주던 학교 교사는 에르네스토의 남은 형제들을 책임지면서. 

한 여름날의 비가 정말 세차게 내리다 언제 내렸냐는 듯 뚝 그치고 싱그러워 지듯이, 줄곧 희미한 혼란속으로 우리를 밀어넣던 뒤라스는 비가 그치듯 극을 끝내고 정돈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어지러이 쓰인 글, 각자의 방식으로 이해하기를 바라며 쓰여진 글을 읽고 정합적인 무언가를 써내려니 기분이 이상하다. 하지만 무언가 끄적이면서 뒤라스의 여름 비는 '그림책'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 이야기도 쓰여져 있지않은 그림책을 보고 아이들은 저마다의 세계를 만든다. 어떤 모양은 공룡이되기도 했다가 악어가되기도 하고 악당이되기도 하다가 친구가되기도 한다. 뒤라스는 이 책을 쓰기 위해서 비트리라는 지역을 열다섯번 정도 방문했다고 하는데, 실제의 어느 지역을 염두하고 썼다기에는 책 속의 비트리는 고속도로 밑, 막 재개발을 앞둔 파리한 어느 곳이라는 느낌밖에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난 뒤 여름비가 막 그친 비트리의 심상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뒤라스의 노고가 헛되지는 않은 것 같다.


이 책은 글자로 쓰인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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