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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9
김승옥 지음 / 민음사 / 2007년 8월
평점 :
그 유명한 구절 "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김훈을 비롯한 많은 소설가들이 무진의 안개를 기가 막히게 묘사한 이 구절을 언급할때마다 꼭 읽어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읽게 되었다. 무진기행은 여러 단편들을 수록한 단편집 중의 하나.
"서울 1964년 겨울" 은 모의고사 지문으로 여러번 본 적이 있어 반가웠다. 주인공 나와 대학원생 안이 서울의 추운 겨울날 술집에서 손님으로 만나 이야기 하던 중 한 사내와 합석하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이다. 사내는 돈이 많다며 하루 저녁 내에 같이 써버리자고 제안을 하지만 알고보니 그 돈은 세브란스 병원에서 죽은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아 생긴 돈이었다. 여관방에서 함께 방을 쓰자는 사내의 부탁을 거절하고 따로따로 쓰기로 주장한 안과 그에 마지못해 따르는 나는 다음날 방에서 사내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심히 헤어지며 끝난다.
해설에서 말하듯 김승옥식 소설은 1960년대의 서울의 어둡고 불안한 근대화 물질화의 사회를 비판하며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각 단편들은 1960년대의 서울을 배경으로 소년기,청년기, 중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성장소설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근대의 폭력성에 자유롭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반성장소설에 가깝다.
"차나 한잔"에선 신문에 만화를 기고하는 주인공에게 신문사 부장이 "차나 한잔 하시겠습니까"의 정중한 물음에 희망을 갖고 다방으로 가지만 그것은 신문사에서 주인공을 자르려고 통보하려는 것이었다. 세련된 도시의 어법의 잔인함과 허사를 제대로 보여주는 일화다.
"염소는 힘이 세다" 는 소년인 나는 "염소는 힘이 세다. 그러나 염소는 죽었다. 이제 우리집엔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를 반복하며 소년가장이 어른 세계로 나아가려는 대목에서 힘에 대한 갈구를 보여주어 약육생존의 삶을 나타내고 있다.
흥미롭게 읽은 것은 "역사"다. 동대문 근처 빈민가 창신동의 낡아빠진 방에 세들어 살던 나는 친구의 소개로 양옥집으로 이사간다. 너무 깨끗한 벽지를 보며 창신동 방에 새겨진 "창신동에 사는 모두가 개새끼들이외다" 낙서가 눈에 떠올라 익숙해지지 못한다. 날마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시간 울려펴지는 엘리제를 위하여 피아노소리에 차츰 짜증과 분노 답답함 일어 양옥집에 사는 이들의 질서와 규칙을 깨부시고 싶은 마음이 타오른다. 흥분제를 보리차에 몰래타지만 주인집네는 여전히 질서있는 삶을 이어간다. 깰 수없는 서울의 근대화에 대한 좌절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주인공은 더러운 창신동으로 절대 갈 생각이 없다.
이렇게 김승옥은 서울의 근대화를 벗어나자는 희망을 어디에도 내세우지 않는다. 무진에서 다시 서울로 돌아왔듯이 우리는 계속 서울에 있는다. 챗바퀴처럼 감옥같고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는 일탈을 여성을 내세워 그리고 있는 "야행"과 문란한 여성의 음부를 자본주의 부패로 비유해서 그리는 "서울달빛 0장'도 매우 흥미롭다.
1960년대의 우울하고 쓸쓸한 서울의 모습을 제대로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슬픈 도회의 어법을 그 누구보다도 지적인 절제를 통해 소설화함으로써 한국 문학의 근대성 논의에서 뚜렷한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의 해설에 완전히 공감할 수있는 작품이다.
이 책을 읽으며 60년 전의 서울의 모습이 머리에 떠올려졌다. 지금과 여전하다. 버스는 만원이고, 추운 겨울날이면 포장 술집 안 모여드는 남자들과 어묵국물, 직장을 구하러 서울 이곳 저곳을 배회하는 가장, 기계적인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며 밀려오는 공포와 혼란과 유혹들. 김승옥의 말처럼 우리가 알아서 찐빵(자본주의) 밑으로 기어들기 때문에 이런 삶도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