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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주석은 이렇게 말하였다
김홍정 지음 / 등(도서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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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주석은 이렇게 말하였다』를 읽다 보니 어린 시절 중국집에 대한 기억이 하나 떠오른다. 실내는 온통 중국풍의 검은 옻칠이 된 듯한 나무 장식에 붉은 천과 매듭, 전등 같은 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가는데 계단 맨 위에 키가 아주 작은 할머니가 역시 검은 색 의자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할머니는 몸집은 좀 있었고 발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작았다. 그때 얼마나 무서웠던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날 보고도 전혀 표정에 미동이 없어서 내가 투명인간이거나 할머니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난 너무 무서워 화장실도 못가고 도로 내려왔다. 할머니의 발이 기억나는 것은 유난히 발이 작아 눈에 띄었던 것인지, 아니면 전족(纏足)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유심히 보아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단일민족이니 단군의 후손이니 하는 교육을 받다 보니 화교든 일본인이든 외국인들에게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거리감(+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주변에 아는 외국인(화교 포함)들이 없기도 했지만 가까이하면 안 될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그런 거부감이 은연중에 있었던 듯도 하다. 


1992년 중화인민공화국와 대한민국이 수교를 맺기 전까지 우리에게 중국은 대만이었고 지금의 중국은 중공이라고 불렀다. 중공은 베트콩(지금의 베트남)과 북한과 마찬가지로 머리에 뿔이 달린 악마와 같은 존재였고 중화민국(대만)은 억울하게 좁은 땅으로 쫓겨간 원래의 중국인 걸로 배웠다. 그러니 중국집 주인들은 대만 출신의 화교라고 당연히 생각했다. 우리 나라에 한국 전쟁 이후부터 살고 있는 중공 출신의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일본 땅에서 멸시와 차별로 서럽게 살아온 조센징들, 무수한 불이익과 소외감을 견디며 억척스럽게 살아온 100년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민진의 『파친코』처럼 김홍정은 ‘어쩌다보니’ 중국땅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자신의 출신을 숨기고 이 땅에 살아야 했던 중국에 살던 한인(스스로 중국인이라 생각)의 삶을 들려준다. 이들의 삶에서 모택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점에서는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2007, 최용만 옮김, 푸른숲)가 자주 겹쳐지기도 했다.  


김홍정의 『모 주석은 이렇게 말하였다』는 ‘모 주석’의 말을 진리로 생각하고 인용하며 삶의 지침으로 삼는 양충과 짱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허삼관 매혈기』에서 피를 팔아 가족을 먹여야 하는 허삼관이 생각하는 ‘모’와는 다르다. 어떻게 보면 정치적 입장에서는 극과 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양충과 짱에게 ‘모 주석’은 정치적 지도자였을까? 그들이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모 주석’의 말을 인용했을까? 그들에게 ‘모 주석’은 어둠이 사방에 깔려서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때 그들이 길을 가도록 밝혀주는 등불과 같은 존재다. 


작가는 말한다. “『모 주석은 이렇게 말하였다』는 주인공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마음으로 읽으면 좋겠다. 특별하지도 않거니와 크나큰 성과를 이룬 사람이 아닐지언정, 아무렇게나 혹은 되는 대로 살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하여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양충과 짱은 말끝마다 “모 주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로 시작하는 말을 사랑하는 조카나 이웃에게 들려준다. 이 때 모 주석은 예수나 공자, 노자, 석가모니와 비슷한 존재다. 편한 것을 찾고 이기적이 되려는 마음,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 잡고 배고픈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고 부상당한 병사들에게 따뜻한 국을 끓여주고 학비가 없는 가난한 고학생을 후원한다. 그것이 바로 어릴 때부터 귀가 닳도록 들어온 ‘모 주석’의 말씀이다.


부모님이나 조상님, 천지신령님을 믿는 특별할 것도 없는 이름없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런데 ‘모 주석’의 말을 입버릇처럼 인용하는 양충과 짱이 살던 대한민국은 냉전의 찬바람이 무섭게 불던 곳이다. 중국에서는 문화 대혁명의 회오리가 불고 있을 때도 아무것도 모르는 양충과 짱은 ‘모 주석’의 말을 보석처럼 생각하고 실천하며 산다. 원해서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아님에도 ‘모 주석’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던 이들은 그 대가를 뼈아프게 치른다.


『허삼관 매혈기』가 피를 팔아서 살 수밖에 없는 힘겨운 시절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유머와 해학, 풍자가 작품 전체에 흐르듯, 『모 주석은 이렇게 말하였다』도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서도 빠른 전개를 통해 복잡하거나 깊게 생각하지 않고 “모 주석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떠올리며 직진하는 인물들의 삶이 전혀 무겁거나 비극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 비슷한 느낌은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가 작품에 깔려있는 데서 나온다. 


『허삼관 매혈기』에 보면 어느날 죽을 먹고 허기가 져서 모두 누워있는데 허삼관이 뭐가 먹고 싶냐고 아이들에게 묻는 장면이 나온다. 아들 셋 다 홍사오러우라는 요리를 주문해서 허삼관이 요리하는 과정을 서두르지 않고 차례대로 묘사해서 요리가 완성되면 먹을 차례가 된 사람만 침을 삼킬 수 있다. 돼지간볶음은 자신을 위해서 한 요리지만 자기 생일이니 다 같이 먹자고 하면서 다 같이 침을 자유롭게 다신다. 상상으로나마 따뜻한 요리를 해먹이고 싶은 부정(父情)이 눈물겨우면서도 재미있다. 『모 주석은 이렇게 말하였다』에서도 양충과 짱은 자신들의 부대와 합류하기 위해서는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하는데도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마을에 남아 굶주린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한 달 이상을 지체하며 밥을 한다. 양충이 중국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짱은 마을의 가난한 소년 이종명에게 만두를 먹이고 요리를 가르치며 ‘모 주석’의 말씀을 들려주고 학자금까지 지원하며 대학 교육도 시킨다. 


짱은 아직도 하앙촌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은 채 어디에선가 음식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짱에게 짜장면은 외숙부인 양충의 음식이자 하앙촌 그 자체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음식을 만들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바로 그곳이 그에겐 하앙촌이 될 것이다. 그렇긴 해도 지금쯤이면 짱이 하앙촌에 돌아가 아직 살아 있는 고향의 가족들과 양충을 만났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두반장으로 만드는 짜장면 이야기부터 미군 부대에서 나온 깡통에 들어있는 과일로 향과 맛을 낸 탕추러우(탕수육)을 짱이 개발해내는 장면, 피난가고 빈 집에 걸려있는 시래기를 푹푹 삶아 끓이는 시래기된장국 이야기 등 어려운 시절 부상병들과 군인들, 아이들의 허기를 달래게 해준 먹거리 이야기가 구수하게 펼쳐진다. 영화로 만들면 정말 재미있을 듯! 일독을 권한다. 

잿빛 하늘에서 진눈깨비 섞인 비가 부슬거린다. 사흘째다. 새 솜을 누빈 누런 겉옷은 이미 젖어 축축하다. 혼하(渾河)가 감싸고 도는 하앙촌(下央村) 청년들은 동북 인민해방군 제 40군 지원단 장교의 훈시를 들으며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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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마틴 에덴 1~2 - 전2권 - 추앙으로 시작된 사랑의 붕괴
잭 런던 지음, 오수연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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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알바트로스의 비극: 『마틴 에덴』(2022, 오수연 옮김, 녹생광선)

보들레르는 노래한다. 날개가 커서 날지도 못하고 서툴고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르는 새, 알바트로스. 자신 역시 지상에 유배당한 저주받은 시인이라고 자조한다. 『마틴 에덴』 도입부에 마틴이 루스의 집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건들대는 걸음걸이에 그 넓은 집이 좁은 듯 느끼는 대목이 나온다. “그는 위태로움을 느끼며 가까스로 그곳을 지났다. 우람한 두 팔은 옆구리에 축 늘어져 있었다. 그 팔과 손들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116) “그때까지 평생 그는 우아함도 어색함도 모르고 살아왔다. 자신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제 손을 몹시 난감해하면서 그는 의자 끝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손은 어디에 두건 걸리적거렸다.”(122)


비슷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 부산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대학을 가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당연히 부산사투리로 말하는 섬머슴 같은 여학생이었는데 신입생 환영회 가서 자기 소개하는 게 고역이었다. 서울 여자아이들은 어쩜 목소리도 그렇게 이쁜지, 중간중간 끝을 올리면서 리드미컬하게 말하는 걸 듣고 있노라면 여자인 나도 넋을 놓게 되더라. 표정도 생글생글 자연스러웠다. 두근두근대며 내 차례가 되어 말을 할 때면 실제의 나보다 더 터프하게, 낮은 목소리로 우스꽝스럽게 말을 하게 되는 거다. 서울의 세련된 아이들의 귀엽고 우아한 말투에 비하면 난 우악스럽고 거칠고 투박하게 말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말투가 이러하니 내 몸뚱아리도 거추장스럽고 어색했다. 한 마디로 너무 의식이 되는 거다. 베르그송이 『웃음』에서 정신이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육체로 관심이 쏠리면 비극은 순식간에 희극이 된다고 했는데 딱 그거다. 내 팔을, 내 다리를 어쩌지 못해 괜히 더 크게 흔들며, 건덜거리며 말하게 되고, 그렇게 과장된 몸짓은 내가 몸을 가진 육체라는 것을 확연하게 드러낸다. 우아한 사람들은 마치 육체는 없다는 듯이 조용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는데 어색할수록 더 존재감을 드러내는 몸뚱이는 몸짓이 더 커지면서 더더욱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워진다. 육체가 드러나지 않는 방식은 서울의 나긋나긋한 말투, 주변의 모든 것이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서 말하는 사람의 육체는 없다는 듯이, 공기가 흐르듯이, 물이 흐르듯이 유려한 방식이다. 그러한 기준에서 벗어난 것은 거칠고 촌스럽고 우악스럽다.


희극에서 몸짓이 크고 어색한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웃는다. 그런데 그들의 몸짓이 아니라 그들의 분열된 의식, 내면의 고통에 귀기울이면 웃을 수 없다. “에덴의 근육질 몸 안은 지독히 섬세한 감수성의 덩어리로 채워져 있었다.”(119) 『마틴 에덴』을 사랑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지만 마틴이 파도치는 그림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고 스윈번의 시집을 꺼내들며 다음날 도서관 가서 스윈번의 다른 책들을 빌려보려고 마음먹는 것은 루스를 만나기도 전이다. 마틴의 학습욕과 자기연마를 향한 열정이 루스에 대한 사랑을 통해 더욱 강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사랑이 더 중요했다면 일찌감치 글쓰는 것을 그만두고 일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서의 집에 들어섰을 때 마틴을 사로잡은 것은 그림과 서적들,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숭고한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루스가 아니라 메리나 비비언이어도 상관없다.


르네 지라르는 욕망의 삼각형이라는 틀로 많은 문학비평을 했다. 인간은 순수하게 뭔가를 욕망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욕망하도록 추동하는 제3의 인물이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스탕달의 『적과 흑』에서 줄리앙은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을 보면서 군인이 되기를 욕망했다. 마틸드는 교수형을 당한 애인의 목을 들고 영웅적으로 장례를 치뤘던 마르그리트 공주(앙리 2세의 딸로 앙리 4세의 첫 왕비. 아이가 없어 앙리 4세는 공주와 이혼하고 마리 드 메디치와 결혼한다)를 떠올리며 줄리앙의 장례를 의연하게 치른다. 플로베르의 『보바리부인』에서 엠마도 수녀원 학교 다닐 때 본 로맨스 소설에서 본 인물들의 달콤한 인생을 보며 자신의 인생을 꿈꾼다. 『마틴 에덴』에서의 마틴 역시 아서의 집에 가면서 발견하게 된 부르주아들의 세상, 그들이 즐기는 책과 예술의 세계에 눈을 뜨면서 열심히 자신을 연마하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마틴은 여기 지적인 삶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꿈도 꾸지 못했던 온화하고 경이로운 아름다움이 여기에 있었다. 그는 자신을 잊고 굶주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그것을 위해 살 만한, 자신을 내던질 만한, 싸울 만한, , 죽음도 무릅쓸 만한 어떤 것이 있었다.”(125)라고 생각한다.


루스에게 마틴은? 그리스신화에서의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에서의 히긴스 박사와 리자의 관계와 비슷하다. 루스에게는 마틴이 자신이 빚어야 할 점토라는 의식이 뚜렷하다. 마틴은 루스에게나 루스의 가족에게나 리자처럼 실험대상이자 놀잇감이다. “실은, 그녀로서는 인간의 영혼을 갖고 노는 게 처음이었고, 그라는 말랑말랑한 점토는 빚어내기에 딱 좋았다. 그녀는 자기가 그를 빚어내고 있으며, 자신의 의도는 선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그가 싫지 않았다. 처음에 그에게 느꼈던 거부감은 사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제 자아에 대한 그녀의 공포였는데, 그 공포는 잠들어 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그에게 소유권이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1102) 루스의 부모에게 마틴은 루스에게 부족한 여성성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는 배우다. “모스 부인은 슬프면서도 행복한, 묘한 감정을 느꼈다. 문학사인 순진한 자신의 딸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 성숙한 여인이 된 딸이 있었다. 실험은 성공했다. 루스의 본성에 있던 기이한 공백은 위험을 무릅쓰거나 대가를 치르지 않고 채워졌다. 그 거친 뱃사람이 실험 도구였고, 루스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그가 그녀의 여성성을 일깨워 주었다.”(1223~224)


마틴은 이 세상 모든 책을 섭렵하고 자신이 보고 느낀 아름다움을 글로 써 표현할 줄 알게 되면 세상 사람들과 우아하게 어울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공부를 해보니 자신이 그토록 들어가고 싶었던 세상은 추악하고 한심하고 위선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의 꿈은 세상과 어우러지기에는 너무나 원대했다. 우아하게 날기에는 날개가 너무 컸고 안전하게 안착하기에는 세상의 허영과 허위의식을 너무나 선명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마틴 에덴이 살았던 시대나 지금이나 인간은 절대 어떤 한 사람을 순수한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다. 마틴이 아무리 자신은 그대로라고 항변해봐야 끝도 없이 원고를 거절하던 잡지사가 이제는 거꾸로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을 제시하면서 없는 원고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이유를 납득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불합리한 것이 세상이고 사람들은 의외로 그런 세상이 제공하는 단맛과 쓴맛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살아가는데 말이다. 마틴은 아무것도 몰랐던 예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가던 길을 계속 갈 수도 없다. 그에게는 해야 할 일도, 갈 곳도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아버린 느낌. 더 이상 재미있는 일도 신나는 일도 없다. 마틴이 그토록 알고 싶어하던 모든 것을 다 안 느낌. 마틴은 알게 된 순간에 앎을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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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 1~3 세트 - 전3권 에세
미셸 드 몽테뉴 지음, 심민화.최권행 옮김 / 민음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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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바쁜지. 비어있던 캘린더는 어느 새 빼곡해진다. 꼭 해야할 숙제가 있을 때는 몇 달이고 별다른 약속없이 살았는데 말이야. 너무 바쁘지 않아야 해. 그래야 내 자신을 들여다보고 어리석음도 깨닫고 부끄러워할 줄도 알고 기록도 할 수 있지.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왜 이리 어렵지? 모든 것을 떨치고 무위의 삶으로 돌아간 은자의 삶이 부럽다.
미셸 드 몽테뉴(1533-1592)가 법관직을 그만 두고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몽테뉴 성으로 귀환한 것은 1571년 2월 28일, 서른여덟 살이 되는 생일날이다. 성의 망루를 서재로 개조하여 은거하기로 한 것은 바로 무위(oisiveté)를 즐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안한다는 뜻이 아니고 공적인 약속과 의무에서 벗어나 사색적 삶(vita contemplative)을 살고자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온갖 잡생각과 악몽에 시달리며 우울감에 빠지자 정신의 고삐를 스스로 부여잡기 위해 쓴 글을 모은 것이 『에세』(심민화 최권행 옮김, 민음사, 2022년 6월 발간)이다.
보통 『수상록』으로 불리는 『에세(Les essaais)』는 ‘엣세’ 혹은 ‘에쎄’로 써야 불어발음에 가깝지만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에세’가 되었다. 왜 우리나라에서 보다 익숙한 제목인 ‘수상록’을 택하지 않고 ‘에세’로 했는지는 번역자인 심민화 선생이 옮긴이의 말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다. ‘수상록’은 수동적으로 상념을 따른다는 의미라는 점에서 배제되었다 한다. 영어 ‘에세이’는 몽테뉴의 ‘에세’에서 나온 말이고 우리 말로는 ‘수필’이라고 하지만 이 둘 다 몽테뉴가 이 글에서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역시 적절하지 않다. 몽테뉴가 만든 말에서 파생된 영어 제목을 몽테뉴의 글에 붙인다는 것은 “몽테뉴에게 미안한 일”(『에세1』, 19쪽)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해보려고 애쓰다’ ‘처음 해보다’라는 뜻의 ‘essayer’에서 나온 말인 ‘에세(essai)’라는 제목만이 자신이 빠져있는 자기답지 않은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자신을 탐구하려는 ‘힘든’ 노력(essayer)(『에세1』, 19쪽)을 온전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몽테뉴가 책을 쓴 의도를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 라틴 고전, 역사적 혹은 당대의 일들을 인용하며 종횡무진 인문학적 성찰을 펼치지만 유려한 번역과 꼼꼼한 주석 덕분에 어렵지 않게 읽힌다. 일독을 권한다. 지금 막 읽은 대목을 옮긴다.
8장 무위(無爲)에 관하여(『에세1』, 81쪽~82쪽)
최근에 나는 되도록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오직 편안하고 호젓하게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하고 고향으로 은퇴했다. 내 정신에 베풀 수 있는 호의로, 완전한 여가 상태에서 내키는 대로 자신과 대화를 나누다가 마음대로 멈추고, 자기 안에서 평정을 되찾도록 내버려 두는 것보다 더 큰 호의는 없을 것 같았다. 세월이 흘러 정신에 무게도 더해지고 성숙해졌으니, 이젠 그런 경지에 도달하기 더 쉬우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반대로, “여가가 정신을 사방으로 흐트려,” (루카누스) 고삐 풀린 말이 된 정신은 남을 위해 쓰이던 때보다 백배나 잡다한 상념거리를 제게 주어 내달리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이 어찌나 많은 악몽과 환상적인 괴물들을 낳아 두서도 목적도 없이 이것저것 쌓아 올리던지, 나는 정신의 어리석음과 기이함을 내 마음대로 관찰하려고 그것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정신 스스로 그것들을 부끄러워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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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도스 성의 올리브나무
김홍정 지음 / 등(도서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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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정 작가의 <호서극장>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는데 기대감 가득 안고 방금 주문했습니다. 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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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에 관한 역설 문지 스펙트럼
드니 디드로 지음, 주미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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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되어서 책을 못구해 아쉬웠는데 완전 좋아요! 연기론을 넘어서서 계몽주의 철학자 디드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관을 만날 수 있게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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