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남 오빠에게 - 페미니즘 소설 다산책방 테마소설
조남주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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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소설'이라는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는데, 책을 읽다보니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현남 오빠에게>는 여성 작가 7인의 소설을 담은 소설집이다. <82년생 김지영>으로 주목받은 조남주 작가를 비록해, 최은영, 구병모, 김이설 등 한국 소설을 잘 읽지 않는 나에게도 익숙한 작가들이 '스스로를 믿기로 선택한 여성의 삶을 정가운데 놓은 일곱 편의 이야기'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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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현남 오빠에게'(조남주)는 주인공이 스무살에 만나 10년 동안 사귄 남자친구 '현남 오빠'에게 전하는 이별 편지이다. 화자는 담담한 어조로 여자친구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가 행해온 행위들이 잘못되었으며 폭력적이었음을 쏟아낸다. 하지만 '현남 오빠'의 행동은 사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긴 하다. 이 이야기가 대학교 페이스북 대나무숲에 올라온다고 해도, 그 내용 자체의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그 필력에는 놀라겠지만 말이다. 평소에는 아빠 생일날에 외식을 하다가 남동생이 결혼할 여자친구를 소개한 뒤 갑자기 집에서 생일상을 차려야겠다고 고집스레 주장하는 엄마를 바라보는 큰딸의 복잡한 심경으로 시작하는 '당신의 평화'(최은영)도 마찬가지다. 차이가 있다면 페이스북이 아니라 네이트판에 어울린다는 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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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야기를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정확히는, 갑갑했다. 뭔가가 잘못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 잘못된 상태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서, 오히려 잘못됐다고 말하는 사람이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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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현남 오빠에게>에는 다른 스타일의 소설들도 담겨있다. 손보미 작가의 '이방인'은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느와르풍 소설이고, 김성중 작가의 '화성의 아이'는 SF소설에 가깝다. '페미니즘'이라는 큰 키워드를 공유하지만, 작가에 따라 선보이는 결과물은 천차만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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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남 오빠에게>는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책이었다. 다만, 딱히 도착점을 찾을 수 있는 생각들은 아니라, 한동안 곱씹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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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현남 오빠에게'의 끝부분 문장을 일부 옮긴다. 편지가 끝을 향해가면서 화자의 '빡침'이 점점 고조되고, 문장이 시원해진다. ㅋㅋㅋ 


(p.31)

그리고 그날 우리는 김밥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갈비탕을 먹었어요. 제 몸이 너무 약해진 것 같다며 오빠는 고깃국을 사주겠다고 했어요. 저는 거의 먹지 못했습니다. 일단 마음이 불편했고 갈비탕이 싫었어요. 오빠는 설렁탕에 소주 마시는 소박하고 소탈한 여자가 좋다고 자주 말하죠. 그런데 오빠, 설렁탕 비싸요. 그리고 저는 물에 끓인 고기는 별로더라구요. 고기는 구운 게 좋지. 오빠는 자꾸 설렁탕이니 갈비탕이니 그런 거 먹자고 하고, 제가 잘 안 먹으면 입이 짧다고 잔소리하고 악순환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입이 짧은 게 아니라 오빠가 몸보신시켜준다고 사주는 음식들이 입에 안 맞았을 뿐입니다. 몇 번 얘기했는데 오빠가 그냥 흘려듣더라고요. 다시 말하지만 고기는 정말이지 구운 게 좋습니다. 입맛의 차이일 뿐인데, 그때는 왜 더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어요. 


(p.34)

오빠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삶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해서 그동안 말하지 못했습니다. 오빠의 질문은 "아이를 낳는 게 좋다고 생각해?"가 아니라 "아이를 몇 명이나 낳는게 좋다고 생각해?"였고, "네가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가 아니라 "네가 아이를 몇 년쯤 직접 키울 수 있을까?"였으니까요. 저는 아직 생각해본 적 없다고 대답을 피하곤 했고 오빠는 왜 그렇게 계획 없이 사느냐고 저를 한심해했습니다. 하지만 오빠, 오빠가 아이를 직접 낳을 것도 키울 것도 아니면서 무슨 자격으로 그런 계획을 혼자 세우죠? 한심한 건 제가 아니라 오빠에요. 


(p.37)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하지만 청혼은 거절합니다. 저는 더 이상 '강현남의 여자'로 살지 않을 거예요. 오빠는 그럴듯한 프로포즈가 없어서 제가 망설이는 줄 알지만 아닙니다. 아니라는데 왜 자꾸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제 인생을 살고 싶고 너랑 결혼하기 싫은 겁니다. 본격적으로 결혼 얘기가 나오고 나서야 꺼림칙하던 모든 게 분명해졌어. 그동안 오빠가 나를 한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 애정을 빙자해 나를 가두고 제한하고 무시해왔다는 것, 그래서 나를 무능하고 소심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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