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아름다운 르누아르의 미술수업 작고 아름다운 수업
김미진 지음, 오귀스트 르누아르 그림 / 열림원어린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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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소년이 있다. 아버지는 재단사에 어머니는 재봉사 일을 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좋지 않은 가정 형편으로 타고난 그림에 대한 감각이 있지만 가족의 일을 도우며 도자기 그림이나 각종 모화를 그리며 가족의 살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어야 했던.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첨화 직공이 되려면

이걸 똑같이 그리는 방법을 매워야 한다.

조심조심, 가능한 섬세하게!

르누아르는 접시들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기술자를 당시에는 첨화 직공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가 13세의 어린 르누아르를 이곳에 데려온 건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입니다.

......

도자기 기술 훈련소에서의 나날들이 빠르게 흘러갔습니다.

르누아르는 손재주가 좋았습니다.

뭐든 쉽게 배우고, 그림 그리는 속도도 재빨랐습니다.

접시에 작은 꽃다발을 그려 넣는 일감으로

한 묶음에 댓 푼씩 품삯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손님들에게 인기가 좋은 마리 앙투아네트 초상화는

여덟 푼이나 되는 짭짤한 일거리였습니다.

부채나 장롱을 장식하는 일거리도 따로 맡아 부수입을 올렸습니다.

딱부리 영감과 깊은 우물.

'도자기 그림에는 아무런 향기가 없어.

진짜 살아 있는 꽃이나 사란들을 그리면 재미있을 텐데.'

르누아르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생계를 위한 일을 하며 르누아르는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욕구가 생긴다. 그러던 도중 무명화가 올르왜 선생 집에서 진짜 그림들을 접하게 되고 미술 강습소에서 그림을 배워 나간다. 주변 친구들에게 '루벤스'라는 애칭을 받을 정도로 그림에 재능을 보였던 그였지만 가정 형편으로 인한 부모님의 만류에 또 한 번 화가로의 꿈을 접게 된다.

하지만 그가 하던 그림을 그리며 품삯을 받던 일은 기계들이 대체하게 되면서 공방 문이 닫게 된다.

올르왜 선생은 한바탕 크게 웃더니 다시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런 우물을 하나씩 가지고 있단다.

우물은 현실에만 있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도 존재하는 법이니까.

르누아르 마음속 우물에 빠지면 넌 어떻게 하겠니?"

"글쎄요. 마음속 우물 같은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살다 보면 한두 번쯤 그런 우물에 빠지기 마련이지.

그럴 때를 대비해 미리 무기를 마련해 두는 것도 좋아."

"무기라고요? 어떻게 생긴 무기요?"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게 바로 그 무기란다."

"좋아하는 거요?"

"맞아!"그런 무기만 있다면

깊은 우물에 빠졌다가도 쉽게 빠져나올 수 있거든."

딱부리 영감과 깊은 우물.

그러던 중 화가의 길과 기술자의 길 사이의 갈림길에서 르누아르는

국립 미술 학교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을 하면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수업이 끝나면 루브르 박물관으로 달려가서 들라크루아, 앵그르, 코로, 프라고나르 같은 화가들의 작품들을 깊게 보며 부셰의 <목욕하는 다이아나>를 직접 모사하기도 하며 그림 공부에 열중한다. 이 시절 그는 친구들, 후에 인상파의 창시자들 모네, 바지유, 시슬레와의 우정을 다진다.

아직 쓸 만한걸? 이런 걸 버리다니!

우리 화실에 부잣집 도련님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나도 종종 쓰레기통에서 물감을 주워 쓰거든."

모네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습니다.

르누아르는 화끈거리는 얼굴로 겨우 미소를 지었습니다.

"내 이름은 모네야."

"응, 알고 있어. 난 르누아르."

그때 다른 친구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들어왔습니다.

"모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한참 찾았잖아."

"거봐! 모네가 먼저 화실로 돌아왔을 거라 했지?"

"오 미안, 미안! 너희들, 이리 와 봐. 서로 인사하는 게 좋겠다.

이쪽은 르누아르. 저쪽은 시슬레. 그리고 부잣집 도련님 바지유."

시뇰 교수의 저주.

시뇰 교수는 미술가 수업 담당으로 아주 깐깐한 인물이었습니다.

게다가 살롱전 심사 위원이기도 해서

학생들에게는 공경과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시뇰 교수의 눈 밖에 나며

그 즉시 짐을 싸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좋아."

언젠가 시슬레가 했던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시슬레가 다시 설명했습니다.

"시뇰 교수의 영향력은 아주 막강하거든.

살롱전 심사 위원들 중에서도 강경파로 유명한 '양파회'의 주요 멤버야

양파 수프를 즐겨 먹는다고 해서 불리는 이름이지.

오래전부터 문화, 예술계와 정치권까지 꽉 잡고 있어.

그러니까 시뇰 교수의 미움을 산다는 건 화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라는 거지."

시뇰 교수의 저주.

1800년대 프랑스 화가들에게는 묵직한 그림 스타일로 묵직한 색감을 가지고 세밀한 화법으로 교훈적인 주제를 가지고 살롱전을 참가해 수상을 하는 것이 화가로서 알려지는 길이었다.

하지만 르누아르와 친구들은 이전 실내에서 똑같이 그려대던 화법에서 벗어나 야외의 빛에 따라 변화하는 즉흥적인 붓 터치를 기반으로 그림을 그렸다. 풍경 속 솜털처럼 부드러운 화법과 투명하게 반짝이는 그만의 개성은 남다른 재능으로 빛이 났다.

"아니! 칙칙한 분위기는 여기와 안 어울려.

자유와 낭만이 숨 쉬는 곳이 바로 여기 라 그르누예르잖아."

"르누아르, 뭔 소린지 대충 감 잡았다!

색깔도 환하게, 붓도 빠르게 움직이면......

이렇게, 쓱 쓱!"

모네가 허공을 향해 붓을 마구 휘두르자

르누아르가 웃음보를 터뜨렸습니다.

"모네, 그러니까 무슨 오케스트라 지휘자 같다."

......

"재미있게? 좋았어! 이제부터 눈에 보이는 것만 그릴 거야.

내 느낌, 내 직감만 믿는 거야!"

모네가 먼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빠른 붓질로 윤곽선을 대충 잡고는

화면을 툭툭 건드리듯 캔버스를 채워 나갔습니다.

르누아르도 붓으로 멀리 보이는 풍경부터 단숨에 쓱쓱 색칠했습니다.

물가에 있는 사람들의 자세한 모습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습니다.

나뭇결이 일렁이고, 햇살이 반짝였습니다.

시끄러운 사람들의 목소리가 찰랑대는 물결 사이로 들려왔습니다.

......

두 그림은 모두 비슷한 지점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뭔가 덜 채워진 듯, 그러면서도 꽉 찬 느낌이었습니다.

르누아르가 말했습니다.

"미완성이 바로 완성이야.

더 그렸다가는 신선한 분위기가 모두 사라질 거야."

라 그루누예르.

친구들은 틈날 때마다 야외로 나가서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르누아르와 모네는 자신들만의 화풍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시슬레와 바지유도 동참했습니다. 붓 자국은 더욱 자유로워자고 색채 또한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났습니다. 자연의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그들의 풍경화는 동료 학생들 사이에도 큰 화젯거리였습니다. 태양빛의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해 가는 풍경을 담았다고 해서 그들을 '외광파'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강변에서의 점심.

살롱전에서 거부당한 작품들을 전시했던

낙선전에서 마네 선배가 선보인 <풀밭 위의 점심>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

"살롱전의 횡포가 너무 심해요.

시뇰 교수는 왜 우리 작품을 모두 떨어뜨렸죠?

자기 눈 밖에 나면 어떤 꼴이 되는지

본보기를 삼아 권력을 휘두른 거라고요.

침울함에 빠져 있던 바지유도 오늘만은 목청을 높였습니다.

"여기서 물러서는 건 비겁한 일이에요! 전에 마네 선배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낙선전에 그림을 걸어요!"

바지유의 초상.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는 새로운 미술 화풍이 일어났지만 강경하고 보수적인 미술계의 관행과 관습으로 르누아르와 친구들은 살롱전 탈락이라는 고배를 마시며 점점 배척을 당한다. 하지만 그들은 바지유의 아틀리에에 틀을 잡고 미술계의 새로운 물결을 원하는 예술인들과 교류를 이어나간다. 1870년 7월 보불 전쟁이 일어나자 이들은 또한 흩어져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낸다. 나폴레옹 3세의 왕권 정치가 몰락하고 마침내 시민 세력이 파리를 장악하며 파리의 젊은 예술가들은 새로운 물결의 흐름에 몸을 담근다. 전쟁이 끝난 후 르누아르와 친구들은 바지유의 전사 소식을 듣게 된다. 그나마 자신의 버팀목이었던 친구 바지유가 죽음으로 다시금 이들은 현실과 타협하며 다시금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하지만 르누아르는 탈락, 어렵게 입상한 모네는 '거부당한 사람들'의 방에 자신의 그림이 걸려있는 모욕을 당한다. 이 일은 또다시 르누아르의 가슴에 새로운 미술계를 향한 열망을 일으킨다.

"우리의 길은 우리가 만들어 가요.

살롱전 눈치를 볼 것 없이 우리끼리 전시회를 열자고요."

르누아르의 제안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모험이었습니다.

멋진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시슬레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전시회를 열려면 이름부터 붙여야 할 것 같은데."

르누아르가 씽긋 웃었습니다.

"바지유가 살아생전에 붙여 둔 이름이 있어.

무명 예술가 협회 전시회!"

블로뉴 숲의 아침 승마.

1874년 4월 15일. 마침내 그들의 열망이었던 무명 예술가 협회의 첫 번째 전시회가 열렸다. 그곳에는 모네, 시슬레, 그리고 다른 친구들인 피시로, 드가, 세잔 같은 화가들의 그림도 전시장 곳곳에 멋지게 진열되었다. 당시 파리에서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긍정보다는 거부감과 비난이 많이 일었지만 그들은 천천히 물살을 일으키며 새로운 미술계의 인상파라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낸다.

"이것 좀 봐! <르 샤리바리>신문에 우리 전시회 대한 기사가 실렸어."

모네가 기사를 받아들고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인상인지 뭔지 있는 것도 같다.

바탕에 깔린 저 수많은 붓 자국들은 뭘 의미하는 걸까?

<인상, 해돋이>. 인상이라고? 그래 나도 인상을 받았다.

인상주의, 말하자면 이건 인상파 전시회인 셈이다.

......

한때 '외광파', '무명 예술사 협회'로 알려졌던

그들이 미술계의 새로운 화풍을 상징하는 인상파 화가하고 불리게 된 건

풍자 신문에 실린 바로 그 기사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물랭 드 라 갈레트.

내가 그린 그림을 본

모든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한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출판사로부터 서적을 제공받아 작성한 솔직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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