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그녕 marmmo fiction
류현재 지음 / 마름모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책장을 넘기고 있다기보다, 오래전 골목길을 다시 걸어가는 기분으로 초등학교 시절의 토요일 하굣길을 함께 돌아다녔다.

그때 나는 친구들과 “오늘 밤 방영될 주말 가족드라마의 다음 회차”를 각자 상상해서 떠들어 대곤 했다. 그 시절의 공기, 온도, 친구들의 목소리가 『빼그녕』을 읽는 동안 다시 살아났다. 마치 한 주를 꼬박 기다리게 만들던 옛날 주말드라마처럼, 이 소설도 한 편, 한 편이 다음 이야기를 참을 수 없이 궁금하게 만든다.

'전원일기’와 ‘아들과 딸’ 사이 어디쯤
『빼그녕』은 거창한 사건이나 극적인 반전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대신, ‘전원일기’가 떠오르는 시골 마을의 촘촘한 관계망과 ‘아들과 딸’을 연상시키는 가부장적 공기가 자연스럽게 배어 있는 동네에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마을은 각 집에 수저와 젓가락이 몇 벌 있는지까지 알 것 같은 가까움으로, 송가와 백가, 송백리와 대백송리 사이에 얽힌 기득권과 위계, “사돈의 팔촌만 잘 뻗어 있으면 다 해결될 것 같은” 그 시절의 믿음까지, 정겹고도 답답한 분위기를 동시에 품고 있다. 그 일상을 7살 은영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어른들이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결로 의미를 갖게 된다. 그래서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어른들의 세계를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이 만들어내는 웃음과 잔인함, 그리고 집요한 진실성에 있다.

“평범은 싫고, 들키기도 싫은” 일곱 살 빼그녕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일곱 살 소녀 백은영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 대신 스스로를 ‘빼그녕’이라 부른다. 자신의 특별함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이름을 삐뚤게 쓰면서도, 어른들의 꾸중과 핀잔을 당당하게 받아내는 이 아이에게서 묘하게 당돌한 귀여움이 터져 나온다. “7살 맞아?”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아무리 칠성님이라도 그건 너무 무리한 소원인 것 같아… 판잣집에서 살아도 좋으니 서울특별시에서 살게 해달라고.”(p.21)
서울 그 자체보다 ‘특별시’라는 단어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 일곱 살의 상상력은, 순수해서 더 기발하고, 엉뚱해서 더 사랑스럽다.

또 “왜 할마가 귀머거리인 척하는지, 왜 세상일에 신경을 끄고 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p.22)라는 대목에서는, 매일 티격태격 싸우는 부모를 바라보는 어린 아이의 투정 속에, 혹시 우리 아이들도 나를 이렇게 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뜨끔한 마음이 스며든다. 은영이의 말이 그냥 귀여운 투정으로만 읽히지 않는 지점이다.

춘입과 똘배, 소문보다 진짜 사람을 보는 일
이야기는 의문의 사고로 오른손목을 잃은 법대생 똘배가, 이방인 춘입과 함께 마을로 돌아오면서 한층 깊어진다. 마을 사람들은 똘배와 춘입을 각종 소문과 편견 속에 가둬 두지만, 은영의 눈앞에 펼쳐지는 두 사람의 모습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은영의 특별함을 가장 먼저 알아봐 주는 사람이 바로 춘입이라는 점은, 이 소설을 단순한 성장담에서 한 단계 끌어올리는 중요한 축이다. “울음이 멈추질 않았다. 춘입이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걸 기억하고 있으면 슬픔도 더 많을 거 같다고 했는데 딱 맞는 말이다.”(p.66)라는 문장에서, 있는 그대로 은영을 인정해 주는 춘입의 마음과, 소문 너머의 춘입을 알아보는 은영의 감각이 동시에 반짝인다.

똘배 역시 마을 어른들의 ‘카더라’를 통해 들은 이미지와 실제 행동이 완전히 다르다. 차멀미가 심한 은영을 위해 버스 대신 경운기를 선택하는 장면, 비 소식도 없는 날 우산을 미리 챙긴 이유, 케이크 하나로 아이에게 잊지 못할 기쁨을 선물해 주려는 마음은, “부정적인 이미지”에 가려져 있던 똘배의 진짜 얼굴을 드러낸다. 그 배려와 온기가 나에게까지 그대로 전해져, 은영이 느끼는 혼란과 섭섭함, 그리고 서서히 찾아오는 이해까지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만든다.

“중요한 건 이별을 잘하는 거야”
이 소설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문장 중 하나는 단연 춘입의 이 말이다.
“중요한 건 이별을 잘하는 거야. 그건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성공하는 것보다 더 어려워.”(p.97)

사람과의 이별, 과거와의 이별, 충격과 상처와의 이별처럼, 우리 삶에는 수많은 종류의 이별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잘 떠나보낼 것인가는 거의 배운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이 짧은 문장이 묵직하게 떠올리게 한다. 굴곡 깊은 인생을 가만히 통과해 온 사람만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문장을, 은영은 자신의 “특별한 친구” 춘입이 했다는 이유만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다른 사람의 말이라면 나도 인정하지 않았겠지만, 내 특별한 친구인 춘입이 하는 말이니 받아들이기로 했다.”(p.119)
실수와 착각을 인정하는 은영의 태도, 그리고 그걸 빠르게 받아들이고 고쳐 나가는 속도는 ‘애어른’이라는 말이 딱 맞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칠성님, 별 하나, 그리고 여과기 같은 소설
이야기 곳곳에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장면들도 빼곡하다.
“별 하나가 어떻게 날 도와준다는 건지 나는 궁금했다. 일곱 개나 되는 북두칠성도 내 소원을 하나도 이뤄주지 못했는데.”(p.76)

마을 어른들이 “별 하나 단 군인”에게 과도한 기대를 거는 모습을 보면서, 은영은 북두칠성도 소원을 못 들어줬다며 의문을 품는다. 이 말은 어쩐지 어린이 퀴즈 프로그램에서 “딩동댕~” 소리를 들을 것 같은 정답 같은 문장이라, 읽는 나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또 “일부러 새와 쥐가 들으라고 큰 소리로 혼잣말을 했는데… 신의 심부름꾼들이 뭐 이래?”(p.185)라고 투덜거리는 대목에서는, 중요한 말을 전해 줄 것 같았던 존재들이 정작 아무 반응이 없을 때의 섭섭함이 익살스럽게 드러난다. 그 장면을 통해, 어쩌면 나도 누군가의 중요한 말과 마음을 가볍게 흘려보낸 적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간다.



빼그녕은 환생일까, 이어짐일까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는 “빼그녕”이라는 존재를 둘러싸고 더욱 많은 질문을 던진다. 빼그녕은 환생일까, 혹은 춘입와 똘배의 아이를 상징하는 또 다른 이름일까, 아니면 “기억 그 자체”의 은유일까. 소설은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고 조용히 물러나 버리기 때문에, 책을 덮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나만의 ‘다음 편 드라마’를 쓰게 된다.

할마는 어쩌면 삼신할매일까, 춘입과 똘배, 그리고 예비 시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보이지 않게 이어지는 마음의 계보는 또 어떻게 연결될까. 이 모든 궁금증은 시원하게 해소되기보다는, 내 안에서 계속 이어지는 “상상 놀이터”가 된다. 그래서 『빼그녕』은 끝났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라떼 시절을 잘 아는 엄마독자의 특권
아이들에게 이 소설을 건네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엄마 때 소설 같아. 완전 라떼 감성이야.”

실제로 『빼그녕』을 읽는 동안 나는, 이 이야기가 마치 내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를 살짝 바꿔 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초등 시절, “아들과 딸”과 “전원일기”를 보던 그 시절의 나를 “빼그녕처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쓴 이야기 같았달까. 그 덕분에, 나는 이 소설을 조금 더 진하게, 조금 더 즐겁게 읽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독자처럼 느꼈다.

빼그녕이라는 여과기를 통과한 마음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의 내 마음은, 마치 ‘빼그녕’이라는 여과기를 한 번 통과해 나온 것 같았다. 이전보다 더 맑아지고 순수해졌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있는 그대로도 이미 충분히 소중한 것들”을 자꾸 의미와 성취로 포장하려 들었던 내 어른스러운 습관을 돌아보게 되었다.

순수함이라는 건 완전히 잃어버린 게 아니라, 잠시 덮어 두고 잊고 지냈던 무엇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나니, 다시 한 번 은영의 나이로 돌아가 세상을 보고 싶어졌다. 조금은 덜 계산하고, 조금은 더 있는 그대로의 마음으로, 나도 다시 “특별한 순수함”을 가지고 살아보고 싶다는 소망이 조용히 올라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