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 러닝
이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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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을 아무리 자르고 잘라도 다시 돋아난다. 쌓인 그리움에 온 마을이 불에 잠긴다. 그 엄청난 불길 속에서 사람들이 달린다. 삶을 살아내간다. ​ 그 불은 어두운 밤을 환하게 밝히고, 그 어떤 하루 밤 잃어버린 사람들은 그럼에도 달린다.

[나이트 러닝]_이지 ​ 최근 글에서 "슬픔은 현실을 이기지 못한다."라는 문장을 썼다. 이불 속에 숨어서 몇날 며칠 눈물만 흘리는 건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나오는 일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슬프다가도 당장 밀린 빨래가 있으면 헤치워야 하고, 당장 중요한 약속이 있으면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당장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부은 눈으로라도 해내야 한다. 현실이 야속하지만 어쩌면 현실은 슬픔에 잠긴 나에게 남은 최소한의 방패 또는 창일 수 있다. 하나씩 현실을 살다 보면 슬픔이 조금은 무뎌지기도 한다. 슬픔. 마음이 아프고 괴로운 감정. 누군가를 잃은 슬픔은 단순히 '슬픔'이라는 단어만으로 표현되진 않는다. 표제작 [나이트 러닝]의 '잔느'처럼 "내 한쪽 팔을 잘라서라도 다시 볼 수 있다면"이라는 문장을 보고 정말로 팔을 잘라버린 건 단순히 슬픔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매일 다시 자라나는 한쪽 팔을 매일 자르는 잔느를 드리도, '나'도, 흰색 옷을 입은 여자도 이해하는 듯했다. 누군가를 잃은 슬픔이 단순히 '슬픔'만으로 표현될 수 없다면 애도의 방식도 마냥 슬퍼하는 것 뿐만은 아니다. 우리는 어쨌든 살아가기 때문에 애도하는 중에도 우리는 종종 웃고 편안해야 한다. 애도는 한 순간에 시작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삶이 계속되는 내내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 "세상에는 한 묶음 사람이 있고 두 묶음 사람이 있어." 여덟 편의 단편작 중 마지막 작품 [에덴 - 두 묶음 사람]의 '제리'는 화자에게 말했다. 한 묶음인 사람은 혼자서도 완벽하지만 두 묶음 사람은 혼자가 될 수 없고 나머지 한 쪽을 찾아 헤멘다고. '두 묶음 사람'이라는 표현이 이렇게 마음에 남는 건, 혼자가 좋다고 생각하던 나도 결국 두 묶음 사람이기 때문인 듯하다. 혼자서는 뜨거운 불길을 달릴 수도 없고, '슈슈' 하는 따뜻한 소리도 들을 수 없을테니. ​ 마음이 저릿해지는 것을 자주 느끼던 최근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


사실 울음소리는 위험하지 않다. 무서운 건 침묵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가 문제다. - P206

어차피 산다는 건 시간을 좀먹는 일인지도 모른다. (...) 싫으나 좋으니 그때까지 살아야만 삶이 끝난다. - P59

"(...) ‘반성을 한다‘는 관성에 불과해. 살아가는 데 형성된 일정 정도의 습관 같은 거야. 그렇지만 속죄는 달라. 신에게 가서 고하는 게 아니야. 돌을 들고 직접 걷는 게 속죄야. (...) 반성이 관성이 되면, 이제 속죄할 기회마저 잃거든.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게 되는 거야." - P113

슬픔은 우리를 발가벗기고 초라하게 만든다. 우리는 아주 작은 일에도 웃고, 달리고, 노래한다. 그래야 슬픔의 힘에 눌리지 않기 때문이다. - P14

"파라다이스의 뜻이 뭔지 알아? 담으로 둘러싸인 곳이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낙원은, 진짜 낙원은 벽 속에 있는 거지. 나만의 벽."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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