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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겠습니다 - 일본군 위안부가 된 남한과 북한의 여성들
이토 다카시 지음, 안해룡.이은 옮김 / 알마 / 2017년 3월
평점 :
가슴이 먹먹해졌다.
왠만한 슬픈 영화를 보아도 눈물을 잘 흘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눈은 수도꼭지가 된 마냥 책장을 넘길때마다 눈물이 흘렀다.
기사로만 접하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 분 한 분의 생생한 육성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이 책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모두 고인이 되셨다.
즉 이분들의 증언은 고스란히 유언이 되어버렸다.
할머니들은 말하셨다.
내가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생각지않는다고.
그렇게 만든 사람이 나쁘지 내가 나쁜 것이 아니지않는가.
어린 소녀의 꿈, 청춘, 바람은 산산조각 나버렸고 12년간 겪었던 나의 고통과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한 여성들을 기억해야한다고.
그리고 일본이 우리에게 나쁜 짓을 했다고 양심적으로 사죄하길 바란다고.
하나같이 기억해달라는 절규가 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죄를 받지못한채 고통속에 살다 가셨을 거라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
40여년간 피해 여성들을 취재해 온 이토 다카시분의 기록은 그럼에도 참 감사하게 느껴진다.
이토씨도 정말 힘드셨다고 한다.
피해 할머니들의 눈에는 자신도 그저 일본인이요 남성으로 보였을것이니 말이다.
증언하는 중 너무나 분노에 차올라 녹음기를 던져버린 할머니분도 계셨고
그런 격한 할머니들의 반응에 몇 번이나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피해 여성들에 대한 취재를 계속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일본의 중대한 국가 범죄를 분명하게 규명하는 것이 일본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인류는 과거의 교훈을 통해 계속 진보해왔지만 근대 일본은 이러한 보편적 진리를 의도적으로 외면해왔다.
그 과정에 일본인 저널리스트가 해야 하는 일은 과거에 일본의 피해를 보았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벌써 오래전에 끝나야 하는 성노예 피해자 문제가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가해의 역사를 소홀히 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아시아태평양전쟁의 기억이 희박해지고 있다고한다.
그리고 이 현상은 남한이나 북한에서도 마찬가지다.
식민지 지배에 의한 피해의 기억은 급속히 풍화해가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이미 피해자 대부분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얘기한다.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지배하지 않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피해자의 경험을 기록해서 후세에 남겨야 할 것이며, 이 책이 이런 일을 조금이나마 할수 있다면 좋겠다고.
일본군은 장교와 병사가 성병에 걸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군이 관리하는 위안소에서 군인들이 젊고 건강한 여성들과 성행위를 할수 있게 했다.
강간 사건을 방지하고, 휴가도 없는 가혹한 군대 생활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것도 이 제도의 목적이었다.
여러 국적의 여성들이 군 위안소에서 노예 상태에 처했다. 그들은 일본인과 조선인, 대만인, 그리고 점령지였던 중국인, 필리핀인, 인도네시아인 등이었다.
규모와 관계없이 상당히 많은 여성이 국가에 의해 성노예가 되었다.
이것이 인류 역사에 오점을 남긴 대사건이라는 건 분명하다.
이만큼 대규모로 여성을 군대 전용의 성노예로 만든 국가는 일본뿐이라고한다.
지금도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종군위안부’라는 단어는 군 위안소에서 여성들이 받았던 피해 실태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피해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종군’한 것이 아니다.
장기간 감금하고 집단으로 강간한 행위를 ‘위안’이라고 부를 수 없다.
정확히 표현하면 ‘일본군 전용 성노예’다.
피해 여성들이 군 위안소로 동원되는 방법은 사기를 당하거나 납치되는 등 다양하다.
어떤 경우든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군 위안소로 들어갔다.
점령지에서 학살, 약탈, 방화 등의 잔혹 행위를 했던 장병들도 군 위안소로 왔다.
이 때문에 여러 나라의 여성들은 난폭하게 다루어졌고, 소모품으로 취급되었다.
노예 그 자체였다.
피해 여성 다수의 증언에 따르면 상당수의 여성이 군 위안소에서 살해되거나 병사했다.
일본군이 짓밟은 인간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사죄와 보상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남한과 북한의 여성들.
사과 받지 못하고 떠나버린 여성들의 증언이다.
...귀국한 다음 지금까지 돈벌이로 밭일과 가정부 등 여러 가지 일을 했네요.
살기 위해 힘껏 일했어요.
결혼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일본군에게 차여 다친 상처 때문이지요.
지금도 아파서 잠잘 수 없을 정도에요. 일해서 돈을 벌면 병원에 가는 것이 일상이지요.
의사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으려면 50만원이 필요하다고 해서 포기했어요.
매월 동사무소에서 받는 3만 6000원과 쌀 10킬로그램, 보리 한 되로 생활하고 있었어요.
마늘 까는 일은 이틀간 20킬로그램을 작업하면 3,8000원밖에 되지 않습니다.
죽 같은걸 먹으면서 연명하고 있어요. 5만 원의 월세를 내지 못해 집주인이 나가라고 하지요.
나는 결혼 전에 순결을 잃고 청춘을 빼앗겼습니다. 내 일생을 이렇게 만든 일본을 원망하고 또 원망해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일본인을 보면 이를 갈 정도로 증오합니다.
김학순 할머니가 텔레비전에 나와서 말하는 것을 보고, 1992년 1월에 나도 이름을 밝히고 증언하겠다고 결심했지요.
일본 정부는 “강제적으로 동원한 증거가 없다”고 사실을 은폐하고 있어요.
하지만 내 존재가 가장 확실한 증거가 아닌가요? 솔직하게 죄를 인정하고 빨리 보상해야 해요.
그렇게 되면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쫓겨나지 않고 살 수 있어요. 나를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목숨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이대로라면 빨리 죽는게 좋겠지요. -p.45
창고에 들어가서 입고 있던 치마저고리를 억지로 기모노로 갈아입었어요. 그리고 한 사람이 와서 “여기서 조선어를 사용하면 죽는다”라며 위협했지요. 나는 ‘아이코’라는 이름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저녁밥으로 보리밥과 국을 줬는데 무서워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어요. 어떻게 하면 도망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우리를 끌고온 남자가 어깨에 별 3개를 단 군복을 입고 나타났어요.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를 강간했습니다. 그날 밤 이 남자 외에 7명이 나를 강간했습니다.
그때부터 매일 20~40명의 병사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두 번 위안소가 없는 주둔지로 파견되기도 했어요.
어느날 우리보다 어린 ‘도키코’가 조선어를 사용하자 장교는 우리가 보는 앞에서 일본도로 도키코의 머리를 베어버렸습니다. 엄청난 두려움에 울부짖거나 기절하는 사람도 있었지요.
그때부터일본어를 잘하지 못하는 우리는 눈과 눈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지요.
1945년 8월 10일경 나는 술 취한 장교와 싸웠다는 이유로 고문받았습니다.
억지로 물을 먹이고 부풀어 오른 배 위에 판자를 놓고 두 사람이 올라탔어요. 이 일로 나느 죽을 각오로 도망쳐야겠다고 결심했지요.-p.70
어느 날 나는 성폭행당한 뒤에 일본군 병사에게 장난질로 폭행당하기도 했어요. 그놈은 나를 무릎을 꿇게 한 다음 다리 사이로 봉을 집어넣어 무릎 위를 짓눌렀습니다.
이때 입은 상처는 아직도 남아 있어요.
위안소에서 당한 폭행으로 사지가 아팠고, 맞아서 귀도 먹었어요.
..외로움도 심해지고 몸도 불편한 상태에서 혼자 살 수는 없었어요. 서른여덟 살 때 주변의 권유로 세 명의 자녀를 가진 남자와 결혼했지요. 그래서 나는 아이를 낳을 수가 없었어요. 성폭행 때문이었지요. 세 딸은 이미 결혼했고, 남편은 죽었습니다. 지금은 다시 혼자서 살고있어요.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부럽지요..
이렇게 된 것이 한입니다. 생활을 보장받아서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지만, 죽어버릴까 생각한 때도 있었어요. 내 마음을 이해할수 있나요? -p.81
처음에는 전기 고문을 했어요. 두 팔을 벌려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두 발도 묶은 다음 전기를 흘렸습니다. 몸 전체가 마비되면서 찬 물이 쫙 흐르는 것 같았지요.
세 차례 정도 전기가 흘렀어요. 다음은 뜨개질에 사용하는 대나무 바늘을 손톱 아래에 찔러 넣었습니다. 그리고 빨갛게 달군 인두로 어깨와 머리를 지졌어요. 내 몸이 타는 냄새를 맡고 정신을 잃었지요. -p.89
대부분의 여자는 성병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이 오래도록 집적거리면 아파했어요. 여자들이 아파서 병사들을 거부하면 병사는 화가 나서 여자들을 주먹으로 때리거나 발로 찼습니다. 심하면 여성의 음부에 총을 쏘고 그대로 트럭에 가버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또 총검으로 여자의 유방을 자르는 병사도 있었습니다. 여자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지만, 병사가 방의 커튼을 뜯어 여자를 싸가지고 어디론가 데려가는 일도 있었지요.
..열여섯 살 어린 소녀의 청춘, 꿈, 바람이 이렇게 산산이 조각나 버렸습니다. 지금도 고문 후유증만이 아니라 매독 때문에 피부가 가렵습니다. 또 일본에서 돌아오기 전에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도 했어요. 한반도 북쪽에 있는 고향 가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전혀 알 수 가 없어요. -p.100
이런 일도 있었어요. 내 옆방에 있었던 여자가 임신했지만 병사들은 이에 상관없이 성행위를 강요했고, 태아를 억지로 끄집어내어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도 죽였지요. 어떤 병사는 모두를 모아놓고 “자 봐라! 조센징은 죽은 거야”라고 말했어요. 어떤 때는 중국인의 머리를 잘라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도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였지요.
종전이 가까워져 오자 병사들은 신경이 날카로워졌어요. 우리가 조선어로 이야기하면 “뭘 이야기하고 있느냐”며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렸지요. 그리고 “일본이 전쟁에 진다면 너희들을 모두 죽인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의 패전이 명확해지자 병사들은 우리 조선인과 중국인 여자 150명 정도를 두 줄로 나란히 세웠어요. 소대장이 명령하자 여자들의 목을 베기 시작했습니다. 피가 비처럼 쏟아졌고, 나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지요.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피투성이가 된 채 시체 속에 묻혀 있었어요. 이 피바다 속에서 살아난 사람은 나를 포함해 세 명뿐이었습니다.
..집에 돌아갔지만,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고 안 계셨어요.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에 피가 솟구치고 치가 떨릴 정도로 화나요. 중국 땅은 학살된 조선 여자들의 피로 물들어 있어요. 내가 일본인에게 받은 것은 만신창이가 된 몸이에요. 자궁은 엉망이 되었고 심장은 아프고 대장은 망가져서 때도 없이 설사를 해요.
일본인은 누군가 자신의 딸이나 아내, 어머니를 이렇게 만들면 어떤 심정일까요?
12년간 겪었던 나의 고통과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한 여성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p.114
살해당한 여성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때의 고문의 후유증으로 신체적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있는 할머니들의 아픔.
지금 우리정부는 할머니들의 외침을 경청하고 있을까.
할머니들이 원하는 것은 100억원의 한낱 표면적인 합의금이아니라 그들의 진심어린 사과일 것이다.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9명 중 생존자는 39명으로 줄었다.
이 수치는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정녕 우리는 이렇게 일본군 위안부의 참혹한 역사를 일본의 사죄조차 못받고 잊히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아직도 현재진행중인 이 역사의 아픔이 너무나 가슴아프다. 100억원의 보상금에 앞서서 이젠 고인이 되어버린 많은 피해자들을 향한 추모, 명예 회복, 그들의 존엄성에 큰 상처를 준것에 사죄가 먼저 이루어져야만 하는게 아닐까.
아픈 역사. 짓밟힌 소녀의 아름다운 꿈을 모두가 기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