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관찰학 입문
아카세가와 겐페이.후지모리 데루노부.미나미 신보 지음, 서하나 옮김 / 안그라픽스 / 2023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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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국내에서도 실험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다. 1960-70년대에 왕성하게 활동했던 실험미술 작가들의 작업을 회고하는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되었고, AG그룹에 대한 전시들도 간간히 눈에 띄었다. 대표적인 실험미술 작가인 김구림에 대한 책도 최근 출간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 일본 전위예술의 한 축을 구성하는 '고현학' 예술가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사실 전위예술, 혹은 실험미술 자체가 '해외(특히나 미국)의 것을 누가 얼마나 빨리 들여오는가'에 관건이 달려 있어서 중산층에 국한된 미술이라는 비판도 있고, 실험미술에 대한 과도한 조명이 예술의 탈정치담론화를 견인하는 것 같은 개인적인 아쉬움도 있다. 그럼에도 <노상관찰학 입문>을 통해 이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작품세계와 예술관, 작업에 임하는 태도를 알 수 있어 좋았다. 특히, 이들의 제자 혹은 동료들이 나름의 방식대로 노상관찰이라는 방법을 통해 예술세계를 확장해가는 기록들을 볼 수 있다는 점도 인상깊었다.


#2.

사실 이건 예술학교에 다니는 비(非)예술가로써 항상 느껴온 부분이기도 한데, 보통 예술가하면 자유로운 보헤미안을 떠올리지만 실상 예술가는 엄청난 집요함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본인이 추구하는 어떤 세계로 향한 집념은 그 어떤 사람들도 막을 수 없다. 이 책 속 예술가들 또한 집착에 가까운 열정또한 마찬가지다. 맨홀뚜껑에 그려진 회사들의 앰블럼만을 모으는 사람부터, 도쿄도의 공사장을 모조리 찾아다니며 그곳의 잔해들을 관찰하는 사람, 도쿄 곳곳을 누비는 학생들의 교복을 모두 스케치하는 것은 물론 벽보들을 한데 모아 미학성을 발견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그들은 수집이 취미인 소위 '오타쿠'들마저도 자신들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영화 팸플릿, 오래된 만화, 애니메이션 캐릭터 등을 서로 '너, 그거 가지고 있어?' 하면서 거래"하는 행위는 "1등이 되고 싶다"는 "사악한 마음"에서 비롯된 "장사"이며, 자신들은 그 어떤 곳도 가져오지 않고 "그냥 보고 올 뿐"이라는 것이다(p146). 보통은 "당연한 생활공간으로 인식하고 마는"  도시조차도 무대처럼 바라보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p105). 심지어 그들은 "인정받는 것만이 예술의 실용성"이라는 예술가들의 인정투쟁과도 거리를 둔다. 오히려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지만, 어떤 사정으로 그것이 뒤틀려 실용에서 벗어난 부분"에 주목하며 그 속에서 예술성을 발견한다(p121). 일상의 사람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예술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3.

책의 만듦새에도 눈길이 간다. 한 눈에 봐도 정성이 많이 들어간 책이라는 게 느껴질 정도다. 책등이 노출된 사철제본에서 느껴지는, 접착제와 실밥이 엉킨 우툴두툴한 촉감은 만지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선사한다. 접지 하나하나를 넘길 때마다 작은 퀘스트를 깨나가듯 책장이 쉬이 젖혀지는 느낌도 재미있다. 책등에 적인 <노상관찰학 입문>이라는 제목이 접지 사이사이마다 조금씩 침범한 것도 책장을 넘기는 일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관찰한 것들을 기록해내는 작가들의 스케치들이 상당히 많이 들어있는데, 이것들까지도 모두 담아내며 그 속의 문자들을 자연스럽게 번역까지 한, 디자인에서 품이 정말 많이 들어간 책이다. 안그라픽스여서 가능한 책같고, 그 물성만으로도 책덕후의 소장욕구를 자극하는 책이다. 책장에 꽂아놓으면 괜히 한번씩 만져보고 펼쳐보고 싶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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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그라픽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된 리뷰입니다.

한번 물건에 정신이 팔리면 끊임없이 물건만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것들이 제각각 얼마나 흥미로운지 그 인상만 남아 전체를 관통하는 질서는 망막에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 전체 안에 속한 물체가 오브제로 길거리에 등장하는 경우는 전체 질서에서 벗어났을 떄뿐이다. 아무래도 물체는 전체 질서의 시각적 별칭인 공간에서 벗어난 딱 그만큼만 물건이 되는 듯하다. 이는 노상관찰자가 기꺼이 채집하는 사례만 나열해도 바로 알 수 있다. 모든 사례가 본래의 상태에서 벗어나 있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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