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백 희곡전집 9 이강백 희곡전집 9
이강백 지음 / 평민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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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강백이라는 이름은 참 익숙하다. 희곡과 연극에 관심이 없는 이들도 교과서나 국어시험문제를 통해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작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막상 연극을 공부하는 나는 이강백 희곡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이강백 희곡전집> 시리즈의 마지막인 9권이 되어서야 드디어 이강백의 작품을 만났다.

"노년기의 쇠약한 몸, 식어가는 마음"(p22)으로 더 이상 작품활동이 어렵다고 고백하는 작가에게 아마도 이 책은 그의 마지막 인사가 되지 않을까 싶다. 한국 연극계에 한 획을 그은 거장의 마지막 인사는 도대체 어떤 목소리를 담고 있을까. 오늘의 연극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2.

네 편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자본주의"다.

  우화적인 성격이 강한 <여우인간>에서 여우들은 자본주의엔 "실감""감동"이 없다고 말한다. "직접 잡아먹는 실감""내가 살도록 자신을 희생한 먹이를 먹으면서 느끼는 가슴 뭉클한 고마움"(p65)이 사라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게 될까? 또한 " 세상엔 사람보다 동물이 많고, 식물도 많이 있는데" "오직 사람만이 투표하는" (p108) 인간중심적 자본주의 세계관에 대한 비판도 놓치지 않는다.

  효(孝)의 이데올로기를 담은 고전설화 심청전은 이강백을 통해 빈곤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심청>으로 재탄생한다. 뱃사람과 선주들은 "안전하게 항해하도록 거센 파도와 바람에 끄덕 않는 배를 만들"(p143)지 않고 " 비용으로 효과가 좋은" 제물을 위해 인간을 희생시킨다.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많았"(p139)던 가난한 간난은 " 불행한 사람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p142)는 설득에 넘어가 제물이 되기를 선택한다.

  <어둠상자>는 기와집 열두채 가격에 육박했던 카메라가 일회용이 되기까지의 시간을 관통한다. 그 사이 사람들은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것을 사진에 담아 간직했"던 과거 대신 "잠깐 보고는 휴지처럼 버려"버리는 시대를 살아간다(p238). 나아가 이제는 "이제 사진만이 아니라 사진기도 버리는" 세상이다(p252). 이러한 시대에서도 주인공은 "온갖 고장 카메라들을 수리해서 미국 군인의 물자 절약에 기여를 하였다"(p244)는 공로로 훈장을 받고,그 훈장 덕분에 또 하나의 역경을 헤쳐나간다.

  <신데렐라>는 그 누구에게도 맞지 않는, 궁극의 평균을 향해 나아가는 레디-메이드 신발을 신어야만 하는 현대인의 비애를 담는다. 어떻게든 신을 수는 있지만 편하지 않은, 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것을 신을 수밖에 없는 구두 앞에서, 작가는 그 구두를 버려버리라고 외친다."신데렐라가 신어도 맞지 않는 구두인데, 세상 어떤 여자 발에 맞을 수가 있겠냐? 없다, 없어. 빨간 구두야, 진심으로 말한다. 이젠 신데렐라 그만 찾아 다녀라! 고생만 헛수고야!"(p299)


#3.

솔직히 말하면, 그의 작품이 내 취향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다소 시대착오적인 부분들도 있는데다, 모든 표현들이 '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여성 서사가 부족한 측면에 대해서는 작가 또한 머리말에서 인정하고 있는 만큼, 이러한 부분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전집을 9권이나 낼 만큼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쳤으며, 이러한 활동이 한국 연극계의 양적/질적 성장을 일으켰음을 부정하긴 힘들다. 특히 그의 작품들은 브레히트적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드는데, 20세기 중반의 유럽 연극계를 강타했던 브레히트의 방식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국내 연극계에 녹여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이것이 마지막 작품임을 선언한 거장은 앞으로 어떠한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줄까? 방대한 극작의 여정으로 다양한 드라마를 선사한 거장 이강백. 연극이 끝나고 난 후, 그의 커튼콜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해본다.

원숭이는 꼬리를 자르고 인간이 됐어요! 그런데 우리 여우들은 뭡니까? 원숭이보다 훨씬 월등한 우리가 꼬리를 달고 있어서 진화가 안 되는 거예요! 이젠 꼬리를 자릅시다! 우리 모두 쓸데없는 꼬리를 자르고 인간으로 진화합시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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