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 러닝
이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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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봄은 새싹의 생명력으로 상징되고, 가을은 추수의 풍요로움과 동일시되며, 겨울은 눈이 가득 덮인 설원이 가지는 감춰짐의 이미지를 갖는다. 반면에 여름은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계절이다. 모든 식물은 여름에 가장 빠른 속도로 생장하며 이곳저곳에서 분출하는 강렬한 생명의 에너지는 폭염과 폭우의 형태로 드러난다. 인간에게 여름이 힘든 것도 그러한 이유 탓이리라. 그런 점에서 <나이트 러닝>은 여름의 냄새가 나는 소설이다. 물론 작품 속 대부분의 공간에서 더위와 작렬하는 햇빛, 귀를 때리는 매미소리 등이 느껴지는 탓도 있겠지만, 이지의 소설은 여름의 분위기를 닮았다. 모든 존재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발산한 나머지, "내가 울면 누군가 구경할 수도 있"으니 "슬픔의 행위는 벽이 있는 곳에서 해야 한다. 아무도 보지 못하게."('에덴-두 묶음 사람', p270) "차라리 눈물이 오래오래 흘러서 무덤도, 길도, 풀도 잠겨버리길 소망"('우리가 소멸하는 법', p138)하길 바라는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힘겨운 여름을 건너는 여정을 통해 삶의 원동력을 이끌어낸다.


#2.

<나이트 러닝> 속 인물들은 죽음에 압도된 삶을 살아간다. 누군가는 죽은 이를 그리워하며 계속해서 자라나는 자신의 팔을 절단하고('나이트 러닝'), 왕릉 주변을 거닐며 죽은 친구를 추억하기도 한다('우리가 소멸하는 법'). 죽음의 문턱에 선 환자들을 간병하느라 "언제나 대기"하며 "사람의 몸이 얼마나 나약하고 질긴지, 몸을 통과하는 모든 것들을 봐야 하는" 이도 있으며('곰 같은 뱀 같은', p217), 때로는 "폭격으로 사람이 죽어가고, 공중에서 비행기가 사라"지고 "매일매일 어디선가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사건에 가려져 여타의 인간문제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취급을 받기도 한다('모두에게 다른 중력', p162). "언제나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했고, 계절은 바깥으로만 흘"러가는 고급 주택가도 죽음을 피해가진 못한다('대리석 궁전에 사는 꿈을 꾸었네', p171).  "관념으로서의 죽음은 무섭지 않다. 그저 잘게 부서지는 일과 같게 느껴졌다."('에덴~', p244) 하지만 죽음은 그저 관념이 아니기에, 그것은 마치 화석처럼 "은유가 아니었다. 명백한 증거"('대리석 궁전에~', p186)이기에 더 무서운 법이다. 인물들은 삶의 한 부분으로써의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죽음이 자연스럽다는 말에 대해 "자연은 무서우니까. 그런 의미라면 맞을 거야"('곰 같은~', p209)라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죽음이 더 무서운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아무리 소중하고 중대한 것일지라도 세상 전체의 관점으로 보면 별 거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연 "목숨을 내놓는다고 누가 돈을 줄까"('대리석 궁전에~', p183).


#3.

하지만 무섭다고 무작정 달아날 순 없다. <나이트 러닝>은 죽음에 압도된 인간의 삶 속에서 "우리가 함께 소멸하는 방식"('우리가~', p119)을 이야기한다. 죽음은 마치 밤을 닮았다. 밤의 그림자는 "날아다닐  어떤 누구도   없고어떤 사냥꾼도 맞출  없"('슈슈', p38)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은 그렇"듯 "밤의 얼굴은 온통 거짓말"('슈슈', p46)이다. 하지만 삶을 압도하는 죽음의 컴컴한 어둠 속에서 "끝도 없이 달리며 생의 내력에 대해 생각"('나이트 러닝', pp33-34)하며 그 두려움을 돌파한다. 삶이라는 이름의 "여행지에서는 꿈을 많이 꾸"('곰 같은~', p234)게 마련이다. 우리에게 죽음이 예견된 공포라면 초연하지 못한 것이 인간의 당연한 생리일지 모른다. 이것을 초월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죽음을 상기시키는 두려운 꿈을 잊기 위해 그들은 계속해서 한밤 중의 달리기를 이어간다. 격렬한 신체 운동에 지쳐버린 이들은 "아주 오랜만에 만난  없는 잠"('슈슈', p66)에 깊이 빠져든다. 일상의 지속을 통해 죽음의 공포로 잠식된 삶에서 잠시나마 해방되며 더 가뿐하게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 <나이트 러닝>이 보여주는 삶의 방식은 그런 것이 아닐까.

주저앉아 울고 싶었지만 일으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참았다. 옥상은 원형극장처럼 사방에서 보이기 때문에 내가 울면 누군가 구경할 수도 있다. 애도는 철저하게 자신을 위한 행동이다. 그러므로 이 슬픔의 행위는 벽이 있는 곳에서 해야 한다. 아무도 보지 못하게.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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