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종파사건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 24
박영실 지음 / 백년동안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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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에도 나와있다시피 8월 종파사건은 이 책 분량의 1/5정도 밖에 안 된다. 제목을 8월 종파사건이 아니라 ‘간략한 북한의 해방전후사‘로 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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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코르셋 : 도래한 상상
이민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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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트 문화가 된 페미니즘: 탈코르셋
 
 
 ① 탈코르셋 운동에 대한 사견
     
  여기 한 명의 여장남자 甲이 있다. 그는 매일 같이 긴 머리에 치마를 입고 립스틱을 바르고 출근을 한다. 
  여기 한 명의 남장여자 A가 있다. 그는 매일 같이 머리를 짧게 자르고 바지를 입고 맨얼굴로 출근을 한다.
     
  甲과 A 모두 행복추구권에서 오는 일반적 행동의 자유를 보장받으며 단순히 여장남자라는 이유로, 남장여자라는 이유로 ‘법적인 처벌’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둘 모두 유형ㆍ무형의 ‘사회적 처벌’을 받는다. 그 ‘사회적 처벌’의 모양은 모임에서 배제하기(따돌림), 뒤에서 수군거리기, 인사 불이익, 조롱하기 등이다. 둘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처벌’의 유형은 비슷할 것이다. 여기서 궁금한 건 바로 다음과 같은 점이다; 혁명적 페미니스트들은 甲남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처벌’의 강도가 A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점을 인정할까?
  甲남은, 경우가 안 좋다면 일종의 복장 도착증 환자로 정신과에 반강제적으로 입원당할 것이고, 직장에서의 차별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사회생활에서도 극심한 차별을 받을 것이며, 그렇다고 소위 ‘꾸밈의 자유’를 옹호하는 단체 등으로부터 이렇다 할 지지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A녀를 위한 ‘탈코르셋 운동’은 존재하는 반면에, 甲남을 위한 ‘탈단발 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민족과 사적인 역사적 연관이 없어 보이는 불란서의 ‘코르셋’보다 ‘단발’은 더 밀접한 상흔을 남겼는데도 말이다. 이것이 비단 남자에게는 ‘연대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아니다. 우리는 그 옛날의 학생들을 알고 있다. 민족해방파와 민중민주파,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남자들을 기억한다. 그들이 어떻게 타락했는지, 구로동파에서처럼 심상정과 같은 여성운동가들이 있었다는 점을 차치하고, 소위 남성들에게 같은 남성들을 향한 ‘연대의식’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남성들은 ‘탈단발 운동’을 하지 않을까? 단발이 편해서?
  가령, 甲남의 인권을 위한 광화문 100만 집회가 열리고 거기에 100만 명의 시민들이 참여한다고 하자. 글쓴이는, 이것의 목적이 정의에 어긋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것은 비례성을 이탈해도 한참을 이탈하여 오히려 다른 곳에서의 현저한 불평등을 야기한다는 점이다. 甲남이 여장을 할 자유는 옹호되어야 하지만, 이를 위해서 100만 명의 인력이 동원된다는 것은, 그 100만 명의 인력이 투입되어야 할 더 본질적인 불평등에 관한 문제, 자유에 대한 억압 문제에 그 인력이 투입되지 못하고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단순히 계산상의 문제가 아니며, 순진하게 소수보다는 다수의 이익을 위하라는 공리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는 문제도 아니다. 
  굉장히 의아하다. 가령,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반수를 여성으로 한다」(헌법재판소 재판관 수가 현행 홀수인 건 차치하자)는 권력 구조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는 논쟁은 모두의 관심사에서 멀다. 검ㆍ경ㆍ군과 같은 물리적 권력을 행사할 권리를 점유하고 있는 기관에 독립적인 여성 조직체를 두자는 안건도 모두의 관심에서 멀다. 간간이 이런 얘기가 나오기는 하지만, ‘탈코르셋 운동’처럼 따로 독립된 명칭이 붙을 정도의 운동이 되지는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페미니즘 운동에 있어서 더 본질적인 문제는 바로 이 지점인데도 말이다. 이것이 그저 ‘탈코르셋 운동’이 우리 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소위 ‘지금 우리가 매일 겪고 있는 문제’에 해당하기 때문일까? 혹은 단순히 드러나지 않거나 대중이 무지한 것일 뿐일까? 아니면 가십거리나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대중의 취향 문제?
  우리는 어쩌면 처음부터 생각을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성갈등을 권력다툼으로 본다. 그것을 권리에 관한 문제, 평등에 관한 문제, 해방에 관한 문제로 본다. 그러나 이 책, p. 90~91에서 한 여성이 증언한 ‘탈코르셋 운동’을 하게 된 계기를 보면 어쩌면 성갈등 문제는 권력다툼보다 인간의 본질적 감정에서 촉발된 문제라는 인상을 준다.
     
  "저는 되게 자존감이 바닥인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뭔가 힘든 일이 있어도 좋은 남자친구를 만나면 행복해질 거라는 기대를 했어요. 그렇게 해서 남자친구를 만난 게 2017년 12월인데…… 그 사람이 사상 이상의 초특급 쓰레기였어요. 알고 보니 이미 한 2년 넘게 만난 여자가 있었고, 그 사람과 싸운 건지 어쩐 건지 저랑은 바람을 피웠던 거예요. 제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인데 그런 일을 당하니까…… 자살을 해야겠다,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되게 구체적으로 했어요. 남자친구를 만나서 나아진 자존감이 다시 내려가서 올라오지 않는 거예요. 내가 뭘 해도 이제는 도저히 재기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방에 틀어박혀서 아무도 안 만나고 인스타만 하다가, 우연히 (탈코르셋 운동이라는 걸) 보고 확 뒤집힌 것 같아요. 그때."
     
  안타깝게도 이 책의 저자 이민경 씨는 너무 주지화되어버린 나머지 이 여성의 증언에서 들리는 실존적 절규를 포착하지 못하고 너무나 빠르게 이를 소위 ‘탈코르셋 운동’의 관점에서 재해석해버린다. 이민경 씨는 이 증언과 마주하여 ‘사적 영역’이니 ‘외부로부터의 압력’이니 ‘전략’이니 ‘소셜 미디어’니 ‘온라인 커뮤니티, 오프라인’이니를 언급하며 횡설수설하더니 외면해버린다. 이 증언에서 우리가 정말 심각하고 진지하게 바라봐야 할 문제, 공감해야 할 문제는 이 여성이 남성에게 당한 배신이다. 남성의 불성실함, 사랑의 부재, 그로 인한 여성의 고통이다. 죽어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녀의 말에서 ”우연히“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그녀가 남자친구에게 배신당하기 전까지 탈코르셋 운동이란 보지 못했거나 적어도 아주 관심에서 먼 문제, 의식에 들어오지조차도 않은 문제였다. 즉, ‘죽고 싶다’는 위기상태 이전에 그녀는 탈코르셋 운동가가 아니었으며, 심지어 그 어떤 외모 꾸미기의 압력도 ‘무겁게’ 느끼지 못했다(나는 이것이 이민경 씨의 주된 사고방식처럼 내면화된 성역할규범에 의해 마비당했기 때문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뒤에서 차차 얘기하겠지만 이민경 씨는 이와 관련하여 상당히 무리한 논리를 전개한다). 솔직하게. 그녀가 연애에서 받은 행복감이란 이민경 씨가 말하는 소위 ‘꾸밈 노동’에서 오는 불편함을 압도적으로 상회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탈코르셋 운동이란 일종의 비상구였다. 그것은 적극적인 운동 즉, ‘권리’니 ‘평등’이니 ‘해방’이니를 쟁취하는 운동이 아니라, 죽지 않기 위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살기 위한 변명, 변호였다.
 탈코르셋의 소극적(비상구적) 역할은 다음의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나는 가난해서 보일러 꺼진 방에서 살아’라고 되뇌면서도 옷을 안 사고 보일러 틀 생각을 못해봤어요. ……아무리 일해도 손에 돈이 안 잡혀서 미치게 우울했어요. ……자살 시도 하기 직전에도 내년이 되어도 생활이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한 번도 내가 옷에 돈을 다 써서 먹을 게 없어서 힘들다는 생각을 안 했어요."(p. 337, 344, 345) 
     
  여기서도 탈코르셋 운동은 정신적 허영심을 지키면서도 절약을 실천하기 위한 이론적 비상구가 되나, 일화의 여성은 거꾸로 자신이 탈코르셋을 했기 때문에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의 인과적 역전은 글 곳곳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p. 189, 216, 246, 268, 273, 275 등. 탈코르셋을 통해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절약하기 위해 탈코르셋을 하게 되었다, 탈코르셋이 남자친구와 헤어지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남자친구와 헤어지기 위해 탈코르셋이 중요한 역할이 되었다, 탈코르셋으로 건강해질 수 있었다-건강해지기 위해 탈코르셋을 하게 되었다, 등)    
     
  ② 인간문제
     
  한 가지 사고실험을 해보자. 이 세상에 성별이 남자와 여자 두 종류가 있는 게 아니라 다섯 종류나 여섯 종류가 있다고 말이다. 만약 상황이 이러했다면, 여성들 사이의 외모 경쟁은 발생하지 않았을까? 아니다. 발생했을 것이다. 나머지 네 종류나 다섯 종류의 성별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라도, 설령, 이 세상에 한 가지 성별만 존재하여 단성생식으로 존속하는 사회였더라도 다를 것은 없을 것이다. 그때는 개체가 집단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니 어딘가 엉뚱한 페미니스트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남성을 절멸시킨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해소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성문제는 인간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제를 이 각도에서 보면, ‘탈코르셋 운동’은 여성해방운동이 아니라 여성이 여성의 마음에 들기 위한 새로운 외모 꾸미기 활동이 아닌가 싶다. 
     
  "……오히려 지금은 여자에 대한 인정이 더 중요해요."(p. 341)
     
  "저는 주변에 페미니스트가 워낙 많기 때문에 탈코르셋을 결심하는 게 어렵지 않았어요. 오히려 머리 길면 욕을 먹죠…… 장난이에요. (웃음)" (p.132)
     
  장난이 아니다. 여기서 작동하는 내면화된 규범은 탈코르셋을 하지 않은 여성에게 죄책감이라는 "정서적 비용"(p. 126)을 치르게 한다.
     
  "……온라인을 통해서 코르셋이 여러모로 유해하다는 것을 인지는 했고 죄책감도 느꼈어요."(p. 308)
     
  이 책의 저자 이민경조차도 ‘형광펜을 틴트 대신 바르는 10대’를 보며 죄책감을 느낀다. ”외모를 단속하는 강력한 힘“인 ”또래와 미디어로부터 형성되는 꾸밈 압박“(p. 111)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작동한다.
     
  "……‘멋진 탈코룩’을 쇼핑몰에서 찾게 되더라고요."(p. 280)
     
  "저의 한 친구는 페미니즘에 대해 해박하고 꾸밈노동이 필요 없는 직종에서 일해요. 그런데 학교 다닐 때야 말로 자기가 맘먹으면 화장 안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탈코일기》책을 즐겁게 읽고 나서도 매일 아침마다 화장하고 가니까 답답해요. 말로는 ‘너 진짜 대단하다, 지지해’라면서도 거기에 동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저를 미치게 만드는 것 같아요."(p. 329)
     
  "코르셋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제 꾸미는 모습이 창피해진 거예요. 옛날에는 꾸민 날에만 당당했는데 이제는 꾸미지 않은 날에만 당당해져요."(p. 333)
     
  "탈코르셋의 의의는 좋은데, 제가 몸담았던 커뮤니티에서 이 문제로 편 가르기가 심했어요. 제가 만일 화장을 안 해서 이편에 들어갔다고 한들, 나중에는 또 버려지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른 전선이 형성되면요. ‘내가 화장을 안 하더라도 나중에는 또 다른 걸로 뭐라고 하겠지. 마치 체가 걸러지듯이…… 그러면 소수 밖에 안 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p. 197)
     
  이 책의 증언자 대부분뿐만 아니라 저자 이민경 자신조차도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의 미디어로부터 지속적인 영향을 받음을(또 주기도 함을) 고백한다. 
  저자의 말대로 탈코르셋 운동은 "이전까지는 페미니즘 운동을 위한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던 여성들 사이에서 갈등을 불러일으"(p. 93~94)켰고, "주체적 꾸밈의 가능성마저 무시하느냐"(p. 102)는 비난을 들었다. 여기에 대해 저자는 "탈코르셋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은 꾸미는 일이 즐거운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강박에 시달려 어쩔 수 없이 해왔던 것이라고 재의미화하거나 혹은 개인이 발휘하는 주체성도 결국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주장으로 답"(p. 102)한다(그러나 저자 자신은 예외적으로 진정으로 즐겁게 꾸며왔다고 한다. 완전히 뒤죽박죽이다) 이것은 명백한 궤변이다. 이 궤변은 탈코르셋 운동가가 스스로를 심리적 꼭두각시였다고 격하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탈코르셋 운동으로 고통받는 여성이 있다면 그 고통받는 여성에게서 답을 구해야 할 것이지, ‘깨닫고 나면 잘못됐다는 걸 알 것이다’는 식으로 답변을 하는 건 이상한 종류의 교조주의다. 이 같은 논리는 당연히 탈코르셋 운동가였다가 역으로 ‘코르셋을 다시 착용한’ 여성들이 해도 이상하지 않은 말이다: 「탈코르셋은 알고 보니 강박에 시달려 어쩔 수 없이 해왔던 것이었고, 탈코르셋이 발휘하는 주체성도 결국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이렇게 말하는 친구도 있어요. ‘나 이제 페미니스트 아니야’라고. 탈페미 선언 같은 거에요. ……저만 해도 2018년에 머리도 자르고 남자친구랑 헤어지면서 인간관계가 완전히 뒤바뀌고 생각도 많이 바뀌었거든요. 그런 급격한 변화를 생각해볼 때 멘탈이 약하거나 하면 ……되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p. 279) 
  저자 이민경 씨의 이 같은 교조주의ㆍ전체주의적인 경향은 과연 이 운동이 저자 이민경 씨가 그토록 주장하는 ‘자유’를 무겁게 생각하기나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가령, "개인이 일상에서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대의를 달성하고자 한다"(p. 63)는 가히 충격적인 쌍팔년도식 조직논리나, 탈코르셋 운동은 "가장 옳은 관점을 찾아낼 때 끝나는 것이 아니"(p. 23)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말을 읽자면 이 운동의 지향점이 과연 자유 그 자체가 맞는지 아니면 탈코르셋 운동가들이 지닌 모종의 신체 규제 권력 그 자체에 있는지 의심스럽다.
     
   탈코르셋을 ‘하지 않을’ 자유는 "획일적 미의 기준이 만들어내는 현실의 불균형으로부터 여성을 도망칠 수 없게 주저앉힌다."(p. 330)―  (세상의) 획일적 미의 기준을 파괴하기 위해 (탈코르셋 운동가의) 획일적 미의 기준을 강제한다.
     
  "탈코르셋 운동(은)…… 개인을 통제하는 모든 규범이 나쁘다는 접근을 취하지 않는다."(p. 220)
     
  이 같이 탈코르셋 운동으로 같은 여성의 자유가 침해될 가능성이 농후한데도 ‘탈코르셋이 코르셋이 되는 건 코르셋의 정의상 불가능하다’(p. 73)거나(이는 괴상한 순환논리로, 마치 ‘신의 정의상 신은 존재한다’는 궤변을 떠올리게 한다―탈코르셋은 탈코르셋이기 때문에 코르셋이 아니다), "소수자에 의해 다수자가 억압받는다거나, 차별 해소 조치에 대해 역차별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성립할 수 없듯이 탈코르셋이 역코르셋일 수 없다"(p. 73)고 항변하는 걸 읽자면 답답해진다. 장애인 차별 개선에서 이익을 얻는 주체는 장애인이고, 양보는 비장애인이 한다. 과거에 벌어졌던 상속권과 관련한 성평등 문제에 있어서, 이익을 얻는 주체는 여성이고, 이익을 잃는 주체는 남성이다. 이처럼 차별 철폐와 관련하여서 역차별이 문제시될 때 각각의 당사자는 대립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탈코르셋 운동에서 역효과가 문제시될 때 이익을 얻는 주체와 손해를 보는 주체는 모두 여성으로 같은 범주에 속한다. 그러니 탈코르셋 운동의 역효과는 저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역차별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 제한’과 관련한 문제 즉, 여성이 자기를 꾸밀 자유를 제한할 만큼의 공익(여성 전체에게 돌아가는 보편적 이익)이 탈코르셋 운동에 존재하느냐의 여부다. 탈코르셋 운동이 저자의 말처럼 여성들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켰다면 이는 저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다양한 의제에 대해 함께 저항하자는 메시지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우리 사회에서조차 "탈코르셋 운동에 대해서만큼은 반발이 존재"(p. 94)하기 때문이 아니라(여기까지 과장하면 대체 탈코르셋 운동가들이 이적표현물이라도 생산하나 싶다), 실제로 탈코르셋 운동으로 인하여 자기의 자유가 제약당한다는 느낌을 받는 여성이 존재한다고 해석해야 옳다.
     
  ③ 건강 중심의 컬트적 여성 청소년 문화
 
  이 책의 증언자는 이공계 대학 졸업생(p. 31), 초등학교 교사(p. 51), 어학연수 후 귀국자(p. 80), 4년차 중학교 교사(p. 107), 대학원생(p. 127), 미대생(p. 154), 대학생(p. 188), 교대생(p. 198), 대학생(p. 245), 대학생(p. 266), 유치원 교사(p. 305), 대학생(p. 323) 등으로 거의 전부 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고학력ㆍ20대 여성에 편중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공장노동자, 저학력 임금 사무직, 인터넷 방송인, 식당 종업원, 마트 직원, 모델, 이주여성, 지적장애여성 등 그 어떤 여성의 ‘다양한’ 목소리도 들을 수 없다. 어째서인가?  
 이 책의 증언자 중 한 명이 "나는 되게 정치적인 의미로 탈코르셋을 한 건데……."(p. 246)라고 하소연하지만 탈코르셋 운동을 정치운동으로 바라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탈코르셋 운동은 집행부, 사법부, 입법부 어디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제언을 하지 않는다. 그 어떤 헌법, 법률, 명령, 규칙, 조례에 대해서도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건 탈코르셋이 겨냥하는 것이 ‘문화’지 ‘정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저자의 말처럼 유독 "1990년대 후반생부터 2010년대 초반생에게 폭발적인 공감"(p. 375)을 얻는 대항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정치가 아니라 대항문화) 때문에, 탈코르셋은 10대, 20대 여성의 주목을 끌 수 있었다(탈코르셋 운동의 키워드는 웰빙-절약-패션-10대ㆍ20대 여성이다). 그리고 그것이 여성 청소년 중심의 대항문화이기 때문에 대다수 보편적인 여성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이다.  
     
  ④ 노작
     
  이런저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훌륭하고, 분명한 노작이다.
     
  관점은 날카롭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논리적 일관성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으며, 진지하다. 페미니즘 산업에 편승하여 한몫해보려는 여타의 역겨운 책들과는 다르게 성실하며 표현은 절제되었으면서 주장은 과격하다. 불리한 내용은 영리하게 감추며, 유리한 내용은 정교화하면서 증폭시킨다. 이 책을 조롱하는 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가볍게 볼만한 책은 결코 아니다. 외모 꾸미기 강박으로 심각한 고통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당장 필요한 절단 수술이 될 것이다.
     
  ⑤ 오자
     
  "……상상력을 톺아보기 시작했다."(p. 247), "……그런 관하지는 않잖아요."(p. 180) 외 1~3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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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에 반대한다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4
파울 파이어아벤트 지음, 정병훈 옮김 / 그린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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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방법에의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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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공부하는 아이들의 생각 - 평등한 세상을 위하여
지혜의정원 엮음 / 자유정신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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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아이를 학대하는 법. 이력서에 한 줄 올라갈 스펙을 위해 헛배운 선생들이 6살짜리 아이의 글에 어거지로 가필을 해가며 허영심만 잔뜩 묻은 저급한 책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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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몰랐던 이야기 - 폭력 피해 여성들의 생존 분투기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32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지음 / 오월의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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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페미니즘이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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