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조금 다를 뿐이야 이금이 중학년동화
이금이 지음, 주성희 그림 / 밤티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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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는 고치거나 극복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특성이에요. 수아는 지금 모습 그대로 인정받고 존중받을 자격이 있어요."


수아 엄마의 목소리에 나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나는 영무 편이었는데. 수아의 사촌이라는 이유로 수아를 제대로 챙기지 않으면 혼이 나고, 제멋대로인 수아의 행동 때문에 피해를 입는 영무가 도리어 안쓰러웠는데. 저 말이 내 눈물샘을 자극한 건, 어쩌면 나를 위로해 주는 말 같았기 때문 아닐까.

'장애'를 '성격'으로 바꿔본다면 말이다.


"성격은 고치거나 극복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특성이에요. 당신은 지금 모습 그대로 인정받고 존중받을 자격이 있어요."



그날도 나는 놀이터에 삼삼오오 모여있는 엄마들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혼자 벤치에 앉아서 내 아이가 낯선 아이와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헝겊 가방 속에 챙겨간 책을 꺼냈다. 글자를 읽기 시작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요즘 들어 생긴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아이는 곧 학교에 갈 텐데, 이런 내 모습 괜찮을까?'

동네에 연락하고 지내는 엄마가 한 명도 없는 나. 다른 엄마들은 서로 어울리며 아이 학교생활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나 이야기들을 주고받는 것 같은데, 서로 친하게 지내며 주말에도 만나 아이들끼리 어울리게 하고 그러는 것 같던데.......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보다 혼자만의 시간을 더 좋아하는 나. '사교적'이란 말과는 거리가 먼 내 성격이 아이의 사회성과 인간관계에 필요한 것을 제대로 채워주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책을 든 채로 놀이터 둘레의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드르륵드륵 킥보드를 끌고 아이 둘이 내 옆을 쌩쌩 지나갔다. 그 바람에 책에서 눈을 떼어 고개를 들었는데 모여있는 엄마들 틈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아이가 어릴 때 장난감 도서관에서 몇 번 마주쳐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던 동네 엄마였다. 나는 황급히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혹시 눈이 마주치면 아는 척을 하기도 어려웠고, 안 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한테 관심없는데 괜히 긴장해서 책을 읽는 척 그 옆을 지나친 후 나는 그만 내 모습이 우스워서 혼자 코웃음을 쳤다. '누가 잡아먹니?' 그러게 말이다. 누가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사람들을 피하게 된다.


<나와 조금 다를 뿐이야> 속 주인공 영무의 사촌인 수아는 마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우영우같다. 사람들과 손잡는 것을 싫어하며,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관해서라면 상황을 가리지 않고 떠들기도 한다. 마치 드라마 속 우영우가 고래 이야기를 하듯 수아는 달팽이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수업 시간에 툭하면 자리를 벗어나 학급문고의 책을 꺼내 읽고, 갑자기 사라지더니 운동장에서 병설유치원 아이들과 놀고 있기도 한다. 같은 반 아이들과 선생님에게 수아는 이상한 아이, 제멋대로인 아이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아이이다. 누군가는 수아를 놀리고, 누군가는 미워하며, 누군가는 모르는 체 내버려둔다. 수아를 진심으로 위하고 이해하는 것은 엄마뿐이다.


"장애는(성격은) 고치거나 극복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특성이에요. 누구나 지금 모습 그대로 인정받고 존중받을 자격이 있어요."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에 에너지를 쓰기보다 혼자 있기를 즐기는 것은 내 성격이다. 고치고 극복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게 아이에게 걸림돌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런 엄마를 만난 아이의 운명이다. 아이가 풀어야 할 문제지 내 숙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모습 그대로 인정받고 존중받을 자격이 있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니 그동안 놀이터에서 모여있는 엄마들을 바라보며 '나는 왜 저렇게 어울리지 못할까' 하고 스스로를 탓하고 아이에게 괜스레 미안해하던 마음의 짐이 가벼워졌다. 그들과 나는 조금 다를 뿐이다.



이 책은 작가님이 농촌에 살며 아이들을 작은 초등학교에 보내던 시절, 실제로 겪었던 일을 모태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때 4학년과 2학년인 남매가 전학을 왔는데, 말과 행동이 여느 아이들과 달랐던 4학년 누나가 학교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던 모양이다. 아이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을 놀림의 대상으로 여기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장애와 비장애의 거리를 너무 멀게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김새와 성격이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장애도 나와 생김새가 조금 다르고, 성격이 조금 다를 뿐인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마음이 자라나는 가정과 학교가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에 너그럽고, 다름이 받아들여지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가까운 어른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야기의 끝자락에 수아는 타고난 재능을 더 키우기 위해 춤과 노래를 배울 수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수아가 떠나고 이 소설은 끝이 나지만 이후의 수아가 어떤 일들을 겪을지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어려움도 있겠지만 좋아하는 것이니 열심히 할 것이고, 언젠가 공연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장애를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어떤 신문기자는 수아의 공연 소개에 이런 타이틀을 붙일지도 모르겠다. '장애를 극복한 무용수', '장애를 딛고 날아오르다'.

과연 그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무용수 채수아'를 보러 올까? '무용하는 장애인'을 보러 오게 되지는 않을까?

장애를 그 사람이 가진 고유함으로 보지 않고 고치고 극복해야만 하는 것으로 보는 차별적 시선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무용수 채수아를 춤과 노래를 사랑하고 즐기는 사람으로만 보아주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빛나는 수아의 땀방울을 상상해 본다. 수아의 활짝 웃는 얼굴을. 장애를 딛고 일어섰다거나 장애를 극복했다는 수식어 없이 '채수아' 만의 감수성과 표현력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박수를 받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런 세상에서 나와 내 아이가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다. 남들과 조금 다른 모습이어도, 성격이 조금 특이해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이 세상이 나를 받아들여줄 것을 믿고, 지금 내 모습 그대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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