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의 방 이금이 청소년문학
이금이 지음 / 밤티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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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자존심이었다.

 

괜찮은 척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쎈 척하고 쿨한 척했다.

 

사실은 아니었다.

 

맞으면 아팠고, 혼나면 억울했다. 누군가의 화를 받아낼 때는 무서워서 심장이 덜덜 떨렸다.

 

그래도 아닌 척했다. 안 아픈 척, 담담한 척.

 

덕분에 나는 창피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건 자존심이었다.

 

친구가 나보다 다른 아이와 더 친해 보이면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질투가 났었다. 엄마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은 불안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텅 빈 가슴 속을 누가 손으로 마구 휘젓는 기분을 느끼며 이리 뒤척, 저리 뒤척.

 

그래도 나는 그들 앞에 서면 웃었다.

 

난 괜찮아. 나 때문에 부담 가질 거 없어. 난 신경 쓰지 마. 난 정말, 아무렇지 않아.

 

그럴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 때는 몰랐다.

 

질투, 그리움, 슬픔, 분노, 두려움, 수치심

 

나는 이런 감정들을 드러내는 것이 자존심 상했다. 드러내는 순간, 이런 감정을 들게 만든 상대에게 내가 지는 기분이었다. (한 때 유행했던 '부러우면 지는 거야.' 라는 말에 얼마나 공감했는지 모른다)

 

남에게 보이기 싫어 뚝 떼어 버리고 싶은 감정들이었으나 이것들이 어찌나 질긴지, 아무리 잡아 뜯어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가렸다. 아무도 볼 수 없게.

 

가짜 이해심으로. 가짜 배려심으로. 가짜 용기로. 가짜 웃음으로.

 

 

 

누구 못지않게 가슴속은 슬픔과 기쁨과 아픔과 분노로 소용돌이쳤다. 미르처럼 감정을 표출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성격이 있고 자신처럼 남들에게 자기감정을 낱낱이 드러내는 게 싫은 사람도 있다. 엄마도 나와 같은 성격이라 지금 저토록 차분한 걸까.

소희의 방_닮은 그림 찾기

 

 

엄마도 지금 그런 거다. 나는 엄마를 잊고 살았지만 엄마는 그동안 어미 원숭이처럼 슬프고 고통스러웠겠지. 딸을 다시 만난 지금 온갖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면서 엄마의 말문을 막고 있는 거야.

 

그렇게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엄마의 침묵에 짓눌리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먼저 말을 걸려고 속으로 연습까지 하다가 그만둔 소희는 조금씩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에어컨 바람이 차가워서라고, 소희는 생각했다.

소희의 방_망각의 강

 

 

엄마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우진에게만 시선을 맞추었다. 소희는 엄마가 선글라스로 피하려던 게 햇빛이 아니라 자신의 눈길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세 번째 만났는데도 여전히 처음인 양 어색한 게 자기 때문인 것만 같았다. 관계가 가까워지려면 어느 쪽이든 먼저 손을 내밀어 잡아야 한다. 소희는 자신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희의 방_먼 여행

 

 

아빠가 사고로 돌아가신 후, 어린 자신을 할머니네 두고 떠났다는 엄마. 재혼했다는 엄마.

 

소희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작은엄마 집에서 지내다 갑자기 엄마와 다시 살게 된다. 소희는 자신에게 무뚝뚝한 엄마를 이해해보려 애쓴다. 가짜 웃음으로 자기 감정은 가린 채. 심지어 엄마의 태도에 대해 자신을 탓한다.

 

소희가 펑펑 울게 해주고 싶다고 <너도 하늘말나리야>를 읽으면서 생각했었다. 아픈 할머니와 단 둘이 살며 투정 한 번 부리지 않고 어른스러운 소희의 모습에 속으로 마음 아파하며 '그러지마'를 얼마나 외쳤나 모른다. 아마 그 외침은 아주 오래 전, 엄마를 그리며 밤 잠을 못 이루던 아이에게도 가 닿았을 거다.

 

소희의 방 초입은 여전히 나를 속상하게 했다. 이 아이는 일찍 철 든 아이, 착한 아이, 공부 잘 하는 아이에 더하여 엄마와 친해지기 위해 붙임성 있는 아이까지 되려고 한다. ....

 

답답한 건 소희 엄마도 마찬가지다. 어쩜 두 모녀가 똑같이 감정 숨기기의 고수인지.

 

선글라스라는 아이템은 감정을 보여주는 두 눈을 가리기에 매우 안성맞춤이지 않은가.

 

뒷좌석의 딸이 보고 싶으면 그냥 보면 되지, 보고 웃으면 되지, 그렁그렁한 눈물 보이는 게 뭐 어때서.

 

 

자신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한 소희 엄마는 재혼한 남편의 폭력까지 용인한다. 어쩌다 한 번 있는 일을 문제 삼았다가 그 하나로 인해 오랫동안 쌓아올린 모든 것이 균형을 잃고 무너질까 두려웠을까. 그런 태도는 소희의 거짓말을 알게 되었을 때도 보여진다. 모르는 척 해준다.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바로 그 점이 소희를 화나게 했다.

 

 

엄마라면 딸이 왜 거짓말을 했는지 그때 물어봤어야 했다. 알고 있음을 밝히고 따끔하게 야단쳤어야 했다. 모른 체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치는 엄마에게 소희는 거짓말을 했다는 부끄러움보다 화가 치밀었다.

소희의 방_족쇄

 

그리고 걷어치운다. 가짜 웃음과 가짜 이해심, 다시 버려질까 두려워 소희의 진짜 마음을 가리고 있던 장막을.

 

214-215페이지에 걸쳐, 소희는 마음을 쏟아내고 나는 눈물을 쏟아냈다.

 

 

소희의 가슴속에 가시처럼 박혀있던 말들이 튀어나와 엄마에게로 날아갔다. 가시들조차 지탱해 주는 힘이었는지 그 말이 떠나간 자리마다 휑한 구멍이 생겼고 그 사이로 찬 바람이 불었다.

소희의 방_족쇄

 

 

어떻게 이렇게 생생하게 묘사하실까. 마치 내 가슴에 구멍이 생겨 찬바람이 지나가는 듯 했다.

 

 

9월에 접어들며 해가 짧아져서 7시만 되도 어둑어둑하다. 킥보드를 타고 아파트 단지로 들어선 아이가 발을 구를 때마다 바퀴 속 LED등이 눈에 띄게 빛을 뿜어냈다.

 

", 불빛 멋있다. 저 끝까지 다녀와 봐."

 

나는 높은 담벽이 서있는 단지 안쪽을 가리켰다. 가로등이 없는 단지 안쪽은 금방 밤이 될 것처럼 컴컴했다.

 

"알았어!" 빨갛고 노랗고 파란 불빛이 번쩍번쩍, 쌩하니 굴러간다 싶더니 금새 꺼졌다. 아이가 뒤를 돌아보더니 말한다. "엄마, 같이 가자."

 

 

", 그냥 갔다 오지. 무서워?" "."

 

 

. 이라는 답이 나오는데 0.1초도 걸리지 않은 아이가 귀여워서 웃음이 터졌다. 정말 무서웠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이 아이는 아직까지 자기감정을 말하는데 솔직한 편이다. 강아지를 보면 온몸으로 어쩔 줄 몰라 하며 내 뒤로 숨기 바쁘다. "아 귀엽다. 귀여운데 무섭다." 하면서.

 

만약 아이가 무서운 감정을 가짜 용기로 가린다면 어떨까? 가린 것을 모르면 위로해 줄 수 없을 것이고, 알면 걱정될 것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자기감정을 숨길까봐.

 

나는 무섭냐는 질문에 바로 응. 이 나오는 내 아이가 다행스럽고 고맙다.

 

아이의 감정을 알면 적절한 반응을 해줄 수 있다. 아이 또한 그럴 것이다. 엄마의 감정을 알아야 반응을 할 수 있다. 아이 때문에 화가 났는데 입 꾹 다물고 참고 있어봐야 아이는 모른다.

 

이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적용된다. 감정 가리기는 서로의 관계를 악화시킨다. 악화되는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질투, 그리움, 슬픔, 분노, 두려움, 수치심...

 

남에게 보이기 싫어 뚝 떼어 버리고 싶은 감정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남에게 보여야 떼어낼 수 있다. 제 손으로 아무리 잡아 뜯어봐야 소용이 없다.

 

소희와 엄마는 서로의 감정을 가렸던 장막을 걷어치운 후에야 비로소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비록 그 과정에서 고성과 눈물이 오갔다 해도. 그런 것은 쌓여있는 감정이 썩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때그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해. 엄마한테 못 할 말이 뭐가 있어. 그동안은 일찍 철든 게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했는데 이제 보니 아니었어. 애들이 부모 속 썩이고, 반항하고, 형제들하고 싸우는 시간도 다 약정 시간에 있는 거야. 너희 때는 그게 당연한 거야

소희의 방_약정시간

 

가출한 소희에게 건네는 고모의 말에서 작가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너도 하늘말나리야>에서 어린 소희 어깨 위에 가당치 않은 짐들을 올려놓았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는 작가님.

 

소희에게 미안했던 마음을 이 작품으로 열어 보이시며 편안해지셨기를 바라본다.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쓰다 보니 소희의 친구들 이야기를 쓰지 못했다.

 

채경이, 가윤이, 지훈이, 준영이.. 십대들의 사랑과 우정 읽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귀여운 우진이와 우혁이를 볼 때면 엄마미소가 지어졌다.

 

혜성처럼 나타나 이 가족의 문제를 짚어준 리나. 그런 언니가 생긴 소희가 부럽다.

 

일관성 있는 캐릭터의 성격이 인물들을 더 잘 이해하게 했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본 것 같다.

 

 

문제(?)가 해결된 소희를 보내주고 나니 바우와 미르가 생각난다.

 

달밭마을에서 떠나는 소희와 작별 인사를 하고 남은 아이들. 이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오늘 당장 <숨은길찾기>를 꺼내들어야겠다.

 

 

 

*해당도서는 무료로 제공받았습니다. 깊이 읽고 제 자신의 이야기와 진심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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