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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4일
조성기 지음 / 한길사 / 2023년 3월
평점 :
평소 가지고 있던 10.26 사건에 대한 인식은 그저 ‘대통령의 최측근이 대통령을 암살했다’ 라고만 정의내리고 있었다. 그저 교과서 속 한 페이지로 스쳐지나가는 역사라고만 생각해왔지, 그러한 결단을 내린 ‘김재규’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깊게 탐구해보지 않았다. 본작을 통해 그의 일생과 마지막 행보를 뒤돌아보고, 기존의 생각에서 벗어나 역사를 보는 조금의 넓은 시각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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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작의 제목 ‘1980년 5월 24일’은 그가 사형당한 날이며, 아이러니하게도 5.18 민주화운동이 진행되고 있던 날이다. 작중에서는 그가 교도소에 수감되어 사형을 맞이하기까지의 현재와, 그의 일생 전체를 비추며 교차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10.26 사건이 중요시 다뤄지는 것은 맞지만, 본작은 세상의 흐름과 파국을 그 현장에서 목도해온 인물로서 김재규가 겪어온 삶, 그 안의 현대사 모두를 비춘다. 독자는 김재규라는 눈을 통해 그의 심리와 그가 처했던 상황을 직면한다.
김재규 한 사람의 시점에서 모든 사건이 전개되는 만큼, 단편적이었던 역사의 장면과 달리 김재규를 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데, 이러한 점에서 소설을 읽는다기보다는 회고록을 읽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p. 13
나는 그런 이야기를 아버지에게서 들으면서 김문기 할아버지처럼 임금 죽이기를 꾀하는 일은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임금을 죽이려다가 임금에게 죽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본작을 통해 제가 파악한 김재규는, 꽤 많은 시간을 일본인으로서 살았으나 조선인에 대한 악의에 분노하는 사람이었고, 군인으로서의 사명감을 가진 자였으며 처음에는 그저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이었다.
p. 152
나는 군인으로서 명령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지만 왜 사태가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정부 책임자들에 대해 불만이 생기기도 했다. 북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군대가 그 자리를 비우고 시민들의 시위를 막기 위해 동원되는 현실이 답답하기만 했다.
허나, 점차 자신의 일이 올바른 목적을 위해 수행되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박정희의 의도를 의심하며 자신이 지금껏 정권의 유지를 위해 힘써온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의 무게를 실감한다. 이러한 과정은 박정희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이 결코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며, 정말 오랜 시간을 고뇌한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p. 240
나의 모델이요 나의 우상이었기 때문에 더욱 죽이고 싶은 대상이기도 했다. (중략)
겉으로는 충동적으로 보여도 오랜 세월 동안 무의식적으로 의도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박정희를 암살한 것은 결과적으로 김재규였지만, 시대가 그를 행동으로 이끌었다. 작품을 읽는 내내 떠오르는 질문인 ‘과연 누가 박정희를 죽였을까’에 대한 답은 결국 한명으로 결론지을 수 없는 것이다. 김재규가 아니라도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었으며 그 총을 들기까지의 용기를 먼저 발휘한 사람이 김재규였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부하들이 김재규의 명령을 따른 것에도 그러한 이유가 조금은 포함되어있다는 증거라고 보여졌다.
p. 241
다만 내가 유신을 끝낼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시대의 염원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을 뿐이었다.
비록 박정희의 죽음은 또다른 신군부 세력(전두환)을 등장시키는 결과를 불러왔지만, 민주화로의 움직임도 함께 가져왔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것처럼, 김재규 또한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의 방법을 택한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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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웠던 점은 책의 부록으로 인물 관계도가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책의 메시지는 격변하는 태통의 현대사 속에서의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이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중심으로 다루기 때문에 내용의 상세한 이해는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라도, 최소한의 내용 전달에 있어서는 독자들에게 수월하도록 해야 할텐데, 인물이 너무 많아 헷갈리기 쉬웠다.
또한, 사쿠라, 아베크족과 같은 단어에 대해 약간의 도움말이 있었다면 내용을 완벽히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됐을 것 같다.
p. 88
정운갑은 비주류가 밀고 있는데 국민들이 신민당 비주류를 사쿠라로 보고 있어서 힘이 없습니다.
p. 213
남녀 수사관들 몇 쌍은 아베크족으로 위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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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7
유신이라는 쓰레기 시궁창 속에서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난 자는 누구인가. 유신을 무조건 추종하던 눈먼 무리 속에서 영혼이 깨어난 자는 누구인가.
p. 357
비정상적인 시대에는 비정상적인 방법을.
미친 운전기사를 끌어내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