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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 붕괴
해도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평점 :
SF는 종종 과학적 배경과 상상력이 균형을 이루지 못해 ‘기발하지만 공허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해도연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 《진공 붕괴》는 그 정반대 지점에 서 있다. 현직 우주과학 연구원으로서의 지식과 깊이 있는 문학적 감수성이 교차하는 이 책은, 우리가 사유할 수 있는 우주와 인간의 경계를 치밀하게 탐색한다. 여섯 편의 단편은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모두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집요한 질문을 우주의 끝에서 되물으며 서로를 비춘다.
〈검은 절벽〉의 라미는 지구도 태양도 사라진 우주에서 생존과 진실 사이에서 고립되고, 〈텅 빈 거품〉의 상미는 멸망이 예정된 유토피아에 남을지 불확실한 우주로 떠날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는 생존 본능과 진실에 대한 집착, 그리고 ‘행복’이라는 개념의 허구성에 대한 깊은 고찰로 이어진다. 특히 “유토피아는 거대한 기만”이라는 조슈의 말은 기술이 약속하는 미래가 정말 모두를 위한 것인지 묻는 정치적 성찰까지 내포하고 있다.
이 책의 진가는 과학적 상상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성과 감성, 기술과 사랑, 객관과 욕망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간의 본질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마리 멜리에스〉에서 인공 뇌를 이식받은 마리는 사랑이 자신의 것인지, 복제된 기억의 산물인지 혼란스러워하고, 〈콜러스 신드롬〉에서는 사랑했던 딸을 되찾기 위해 시간을 수차례 되감는 아버지 재호가 결국 아내에게 복수당하며 자기 욕망의 폭력을 직면하게 된다. 인공지능과 타임루프 같은 설정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인간 내부의 어두운 심연을 끄집어내는 장치다.
가장 인상 깊은 작품 중 하나는 〈안녕, 아킬레우스〉다. 피터는 타임루퍼를 추적하던 중 사랑을 선택하게 되고,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오늘’을 반복할지, ‘사랑 없는 내일’을 선택할지 고민한다. 이것은 SF가 아니라도 보편적인 인간의 딜레마다. 작가는 이처럼 거대한 우주와 극한의 과학기술 속에서도 ‘사랑’, ‘기억’, ‘자아’라는 원초적 감정을 중심에 둔다.
《진공 붕괴》는 제목 그대로, 어떤 공허한 틈을 향해 인간 존재가 붕괴되는 과정을 그린다. 하지만 그 붕괴는 절망이나 파괴가 아니다. 오히려 그 틈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리고 더 나은 내일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각 단편이 묻는 질문은 명확하다. 기억을 잃은 ‘나’도 여전히 나인가? 복제된 사랑도 진짜 사랑인가? 그리고 내일이 없다면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책은 하드 SF 팬들에게는 정교하고 과학적인 세계관의 향연을, 문학 독자들에게는 날카로운 질문과 감정의 복합성을, 그리고 철학적 사유에 목마른 이들에게는 충분히 깊이 있는 성찰의 시간을 제공한다. 해도연이라는 이름이 왜 SF 장르에서 가장 신뢰받는 작가로 꼽히는지를 증명하는 책이다. 당신이 어떤 독자든, 이 책은 읽는 순간부터 당신에게 되묻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내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