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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서울
최종현.김창희 지음 / 동하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오래된 서울》을 읽었다. 읽다보면 정좌하게 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책은 아니다. 나로서는 무척 재미있게 읽었는데, 나는 재작년에 온 동네 사진 찍고 다니면서 지명과 거리에 얽힌 설화 베껴 적고, 거기에 혼자 열광해서 듣기 싫다는 사람한테도 열심히 이야기 들려주던 사람이다.
반쯤은 학자의 책이다. 원래 학자가 쓴 책을 읽을 때에는 자연스럽게 머리 한 구석이 딴 생각에 잠기는 법이다. 머리 왼쪽으론 책을 읽었고, 머리 오른쪽으로는 ‘똑같이 도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임에도 저자들과 나는 다르다, 어떤 점이 다른가’를 생각했다.
일, 이야기꾼과 학자. 아마 이야기꾼과 학자 사이에 기자가 있을 것이다. 기자 중에도 이야기꾼 같은 기자가 있는가 하면 학자 쪽에 가까운 기자가 있다. 나는 이야기꾼에 한 발 걸친 기자다. 이야기꾼은 거리에 고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에 만족한다. 그 이야기가 재미있으면 그만이다.
책을 쓴 두 분 중 한 분은 학자, 다른 한 분은 학자 같았던 기자다. 학자는 개념을 규정하려 든다. 그는 서울의 시작이 언제인가와 같은 문제를 묻는다. 기자는 뉴스를 만들고 제목을 뽑고 싶어 한다. 그는 서울의 시작은 조선 개국도, 한성백제도 아니고 1104년 남경 행궁 완공이라는 ‘야마’에 만족해한다. 실제의 저자들이 이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책 행간에서는 학자와 기자 사이의 대화, 때로는 다툼이 읽혀진다. 그 논의나 갈등이 실제 저자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것인지, 또는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 각각 진행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책 내용과 관계없이 흥미롭다.
이. 종로구민과 마포 주민, 또는 중인과 상인. 서울, 하다못해 사대문 안을 다 다루는 것도 아니고 옛 이야기만 나오는 것도 아니니 ‘오래된 서울’이라는 제목이 적절한지 모르겠다. 책은 서촌에 집중하면서 다른 지역은 다음 권이 나오면 그때 다루겠다는 식으로 넘어간다. 저자들이 사라져간다고 한탄하고 있지만 서촌은 여전히 굉장히 개성이 강한 동네다. 단순화시킨다면, 북촌은 몇 백 년째 학자와 사대부의 동네고, 서촌은 예술가와 중인의 동네라고 본다. 두 동네는 고상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개성은 나와 맞지 않는다.
나는 지금 내가 사는 마포구 현석동과 신수동 일대가 좋다. 나루터(마포)와 쌀 창고(광흥창)와 옹기 만드는 독막(지금 독막로의 기원), 솥 만드는 무쇠막(신수동의 ‘수’자는 수철·水鐵의 준말이다)의 장사치들이 살았던 동네가 내가 살 동네다. 이상 윤동주 노천명 이중섭 같은 서촌 주민의 이름은 내게 너무 버겁다. 문인 모임에 나가면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것 같아 불편하고 앞으로도 바뀔 것 같지 않다.
삼. 산세를 읽는 사람과 스카이라인이 친숙한 사람. 책에는 1929년과 2009년 같은 위치에서 같은 방향으로 찍은 파노라마 사진이 있다. 그 사진을 촬영한 장소를 알아맞힌다면 서울을 정말 잘 아는 거라고 한다. 나는 보고 알았다. 그런데 책에서 힌트라고 제시한 산봉우리들을 보고 안 게 아니라 건물들의 스카이라인을 보고 알았다.
평생을 콘크리트 위에서 보내고 콘크리트를 편하게 여기며 심지어 그걸 사랑하기까지 하는 나와, 아버지뻘인 두 저자가 도시를 보는 시선이 다를 수밖에 없다. 거창하게 확대해석하면 이것이 자연과 전통에 대한 태도, 그리고 세계관의 차이에까지 이른다. 상수동 거리나 가로수길은 죽은 거리인가, 아니면 기존 거리는 담지 못했던 새롭고 재미난 정보들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오가는 흥미진진한 공간인가. 거리의 역사와 아름다움은 시장에서 거래되지는 않지만 지켜야 할 가치인가, 아니면 아름답고 흥미롭기는 해도 불꽃놀이나 벚꽃처럼 생겼다가 스러지는 데 미련을 갖지 않아야 할 짧은 현상인가. 신흥 상권의 세력 확장은 도시 문화에 대한 위협인가, 아니면 거기에서도 새로운 미학을 찾아야 할 것인가.
사. 완벽주의자와 적당주의자. 태종과 세종의 잠저를 찾아보는 것까지는 나도 비슷한 책을 쓴다면 해볼 듯한데, 정선의 그림을 보고 앵글을 추정한다거나 고려시대 남경역의 상상도를 그리는 일은 도저히 못할 것 같다. 이 집요함과 꼼꼼함에는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하는 심정도 들지만 거기에 압도되는 느낌도 든다. 고급 중식당에서 불도장과 샥스핀을 먹으면서 속으로 탕수육과 볶음밥을 그리는 기분도.
한 줄로 평하자면 아주 좋은 책, 나와야 하는 책이다. 후속편이 계속 발간돼 서강나루 일대를 다룬 편도 나오면 좋겠다. 책보다 나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쓴 독서감상문은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