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멀리 나는 새는 집이 따로 없다 - 낙장불입 시인 이원규의 길.인.생 이야기
이원규 지음 / 오픈하우스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멀리 나는 새는 집이 따로 없다》에서 발췌하여 필사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환계를 선언하고 사라졌던 수경 스님을 1년 만에 남몰래 만났다. 스님은 수염과 머리를 기른 산중처사로 독거생활을 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순간 조금 낯설기는 했지만 눈빛이 사자처럼 형형했다. 삼보일배와 오체투지 등의 휴유증으로 무릎 관절이 많이 아픈 것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건강해보였다. 그동안 산중 외딴집에 머물다 누군가 거처를 찾아낼 것 같으면 산문을 나가 남몰래 전국의 폐사지를 답사하고 아쉬람에서 수행했다며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하셨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으니 살만하네. 돌이켜보면 적당히 가난한 집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출가해서 조계종단이라는 더 큰 부잣집에서 더 잘 먹고 잘 살았지 뭐. 허허, 그러니 난 출가한 적도 없는 셈이여. 너도 지리산의 처음처럼 다 내려놔. 그 무거운 것들을 들고 있지 말고 이젠 다 내려놔. 뒤돌아보지도 말고."
한동안 말과 글을 줄이고 건강부터 챙기며 살아야겠다. 일단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의 말무덤에 찾아가 예를 갖추고 싶다. 다시 길동무도 없이 홀로 길을 나선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모든 길이 곧 집이다.
여강 근처에 사는 홍일선 시인의 농장 이름은 '바보숲 명상농원'이다.
"전국의 닭 잘 키우는 고수들을 다 찾아다녔지. 결론은 자연농법이었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물과 사료를 주는 게 핵심이야. 깻묵과 쌀겨 등을 버무려 닭 모이를 직접 만들어주니 힘들기는 해도 닭님들이 건강해. 야산에 풀러놓으니 지렁이와 쑥이며 어성초 등을 먹고, 자연농법으로 키우니 닭장에 아무 냄새가 안나. 닭님들이 새들처럼 훨훨 날아다녀. 구제역, 조류독감 이런 것도 다 속도전과 대량 생산의 욕심 때문이야. 성장촉진제와 항생제가 버부려진 사료를 먹이고 전깃불만 누부신 지옥 같은 밀집사육이 문제야. 도대체 저항력이 생길 수가 없지. 악순환이야. 지금의 이 세상도 마찬가지 아닌가. 요즘은 시 한 편보다 닭님들이 낳아준 건강한 달걀 하나가 더 소중해."
추사 김정희나 다산 정약용처럼 이치와 도리에 따라 천하만민을 위한 애민사상으로 학문을 탐구하고 펼치는 '광기에 가까운 열정'이 그들을 진정한 지식인의 반열에 오르도록 했다. 진정으로 미쳐야 열정적인 광인이 되어 전문가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귀농·귀촌·귀향이 다 옳은 것만도 아니었다. 비교적 '죄를 덜 짓는' 아름다운 선택이지만 이마저 스스로 대오각성大悟覺腥의 일생을 걸고 하느냐, 억압적인 상황에서 마지못해 패배적으로 하느냐, 꽤 많은 사람들이 꿈꾸기에 멋질 것아서 따라서 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굳이 지적하자면, 귀농·귀촌을 꿈꾸거나 현실화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우선 멋진 집을 짓고픈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이다. 먼저 풍수지리를 공부하게 되고, 마을에서 적당히 떨어지고 자연 풍광이 뛰어난 곳에 땅을 사고 포클레인으로 터를 만든 뒤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싶어한다. 생태건축의 양식이든 아니든 그 가상한 꿈을 나무랄 수만은 없다.
하지만 이런 발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딜레마에 빠진다. 모든 집이 그렇듯이 막상 설계를 마치고 집을 짓게 되는 순간 애초의 계획보다 더 많은 비용(적어도 5할 이상)이 들게 되니, 어쩔 수 없이 도시에서 팔고 온 집값이나 전셋갑을 소진하게 된다. 말하자면 적응 기간의 예비비가 그만큼 줄어드니 차라리 도시에서의 순응적 불안감보다 더 심한 고통과 마주치게 된다. 도시 근교에서는 절대 이루지 못할 그야말로 꿈꾸던 집에 멋진 정원과 텃밭까지 갖추었지만 심리적으로는 쫓기게 되는 것이다.
몇 개월 지나고 보면 귀농생활의 수입이란 것이 실제로는 월 몇 만원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자신이 산 땅값마저 지역 주민 시세보다 훨씬 비싸게 샀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고, 행여 다시 되팔려 해도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려면 돈 많은 도시인 혹은 또 다른 귀농을 꿈꾸는 이들에게 되팔 수밖에 없으니 이 또한 암묵적인 사기의 카르텔 형성에 동조하게 됨으로써 남모를 죄의식에 휩싸이게 되고, 남은 예비비는 곶감 빼먹듯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압박감이 뒷골을 엄습해 온다.
문제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다. 돌아갈 수도 없는 헛꿈을 꾼 것이다. 영화 속에서나 본 듯한 혹은 이미 정착에 성공한 몇몇 지인들의 모습을 보고 나름대로 생태적인 설계를 했으나 이 또한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자본주의적 질서 속에서 한 발도 빠져 나오지 못했다는 반증인 동시에 소위 녹색성장이라는 두 얼굴의 행태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를 바 없는 궁여지택이거나 속도전적인 패착이 아닐 수 없다.
지리산뿐만 아니라 전국의 거의 모든 바닷가와 산중과 강변에는 이렇게 수많은 집들이 들어서고 있다. 대개는 별장이지만 이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전원생활을 꿈꾸거나 생태적 마인드의 귀농을 이룬 사람들의 집이다. 겉만 보면 참으로 멋진 집이지만 사람의 마을과는 단절된 사유재산적 공간에 불과해 결과적으로 생태파괴에 동조한 셈이 되는 것이다.
막상 살다가 깨닫게 되는 문제는 비단 이뿐만이 나이다. 애초에 터를 잡을 때 풍수지리의 반만 보았던 것읻. 지수화풍을 다 읽은 게 아니라 대개는 바람을 모르고 물을 모르고 오로지 경치만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가뭄이 들거나 태풍·폭우·폭설 등 조금의 기상이변리아고 생기면 그때서야 왜 이 땅에 애초부터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는지 뒤늦게 알게 된다. 목욕이나 수세식 화장실 이용은커녕 당장 식수가 끊기거나 외딴섬처럼 고립되는 정도를 넘어 거센 바람에 지붕이 날아가거나 산사태로 축대가 무너지는 등의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머리로는 느림의 미학을 꿈꾸었느나 그 모든 게 너무 빨라서 자초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적응 과정을 뼈아프게 거치고 나면 비로소 천천히 자연의 한 몸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만 때로는 빠른 것이 오히려 늦은 것이라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말이다.
만약 꼭 같은 조건으로 귀농한다면 전혀 다른 방법도 있다.
우선 자신이 살고 싶은 마을의 빈집을 구하고 그 마을 주민으로서의 적응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인 지혜와 공동체적인 마인드를 갖추며 최소한 사계절을 살아본 뒤에 집 지을 땅을 사더라도 절대 늦지 않다. 왜냐면 마침내 주민들의 시세에 맞게 살 수 있다는 경제적 비용 문제 뿐만이 아니라 집터에 대한 풍수지리적 이해가 두루 갖춰지기 때문이다. 되도록이면 이미 수백 년간의 검증이 끝난 빈집을 취향에 맞게 고쳐서 사는 게 훨씬 생태적인 일이지만, 굳이 새로이 집을 짓겠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