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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진다 꽃이 핀다 - 박남준 시인의 산방 일기
박남준 지음 / 삼인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꽃이 진다 꽃이 핀다》에서 발췌하여 필사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모악산과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칠 년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길지 않은 날들을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전주로 일자리를 옮긴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림 그리는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산속에 집을 하나 구했다. 집을 고쳐봐야겠는데 사람을 좀 찾아달라. 친구와 연락이 되어 선배와 함께 산속의 집을 찾아갔다.
그 집으로 가는 길이 어딘가 눈에 익었다. 선배가 구했다는 집은 다름 아닌 내가 한 두어 달 세를 들고 싶어했던 무당집이었다. 급히 전주로 내려오르나 나는 아직 이곳저곳 후배의 집을 전전하던 때였으므로 옳다 됐다 여겼다. 선배의 배려로 그 집을 당분간 쓰기로 했다.
뚝딱뚝딱 헌 문짝을 구해 와 방문을 달고 아궁이만 있던 곳에 부뚜막을 만들어 무쇠 솥을 걸었다. 살림살이라고는 배낭 하나에 담겨온 등산 장비와 책 몇 권이 고작이었다. 소꿉장난처럼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짓고 국이나 찌개는 버너를 사용하거나 잉걸불을 이용했다. 그때가 1991년 삼월이었다.
외롭고도 쓸쓸하지 않는 날이 왜 없지 않았겠는가. 궁핍함으로 인해 쌀이 떨어지고 숨이 차도록 물만 가득 들이킨 채 주린 배를 잔뜩 웅크리며 오지 않는 잠을 청하던 날도 있었다.
그렇게 십 년 세월이 흘렀다. 동안 불어난 살림살이들이 내 발목을 붙들며 문을 열어놓고 다니던 집을 이젠 자물쇠를 채우고 다녀야 하는 불편을 주기도 하지만 언젠가 다 버리고 떠나야 할 것들, 야 너 떠나면 이건 내가 가져간다. 벌써 이것저것 내 차지라고 서로 우기며 그 몫을 찜해 놓은 친구들도 있다.
그래 나도 일을 좀 해야겠군. 농사를 지어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산골에 살면서 채소들마저 사먹을 수는 없는 일이어서 조금씩이지만 해마다 이런저런 씨앗들을 뿌린다.
동치미를 담고 겨우내 처마 끝에 말려놓은 무청으로 실가리국을 끓여 먹고 쑥이 나오면 쑥국을, 냉이국을, 달래를 캐서 된장을 많이 넣고 물을 자박자박 잡아 밥을 할 때 쪄내거나 끓여낸 달래장을 해먹고 고사리국을 먹고 취나물을 무쳐 먹고, 굳이 무얼 뿌리고 가꾸지 않아도 들에 산에 먹을 것들이 지천을 이루고 있지만 올해는 아욱 씨앗을 많이 뿌렸다. 혼자 먹기에는 많은 양이었지만 나를 찾아오는 이들 중에 유별나게 아욱국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이 있어서 일부러 많이 뿌렸는데 이제 좀 먹을 만하게 자랐다.
그러나 그건 내가 관여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그 일을 참견한다면 그건 이 우주 자연의 순리를 거슬리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내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일깨워준 것이다.
그들로 인해 배운 바가 크다. 산중의 삶들 또한 사람들의 세상에 일어나는 일과 그리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사람들도 또한 이 우주 자연의 뭇 생명들 중 하나이지 않는가. 가까운 분들 중에 최근 빚보증을 서주었다가 집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거리로 내몰린 분이 있다.
지금껏 살아오며 이뤄놓은 모든 경제적인 기반을 다 잃어버린 그분들이 다시 일을 시작하고 있는 모습을 얼마 전에 보고 왔다. 쓰러졌으나 무너지지 않고 일을 시작하시는 그 건강한 땀들이 튼튼한 밑거름이 되어 풍요롭게 일어설 수 있는 날을 가만히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