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지렁이에게 안부를 묻는다
권정생 외 지음 / 옹기장이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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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늘도 나는 지렁이에게 안부를 묻는다에서 발췌하여 필사한 내용입니다.

 

 

우리 농장에서는 혼자 외롭게 자라는 작물을 보기 어렵다. 정부에서 권장하는 단일작물의 대규모 재배를 거부하고 같은 밭에 두둑을 달리하여 갖가지 작목을 심는 혼작은 기본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벼포기 사이사이에서 배추가 사이좋게 자라던 때가 있었고, 지금은 들깨와 고구마, 고추와 고구마, 고추와 배추, 벼와 자운영이 정답게 잘 자란다. 지금 열거한 작물들은 같은 밭에서 두둑을 달리하여 혼작을 한다는 말이 아니라, 같은 두둑에서 공생한다는 말이다.

 

 

한 작물을 다량으로 심을 경우에는 그 작물을 좋아하는 각종 병해충들이 발생하지만 여러 작물을 혼작하거나 공생체계를 형성하면 작물세계가 건강해질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농약이나 비료를 한 번도 준 적 없는 우리 고추는 병충해를 입은 흔적이 거의 없고, 같은 모종을 심은 다른 집들이 진작 끝물고추를 따버린 지금도 우리 고추는 초기와 비슷할 정도로 고추꽃이 왕성하게 피어나고 있다.

 

 

또한 기계로는 아무리 해도 20cm 이상 깊이 갈 수 없지만 풀이나 작물의 뿌리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30cm~1m를 들어갈 수 있으므로, 풀과 미생물이야말로 최고의 땅갈이 선수이며 땅을 기름지게 만드는 주체임을 인정하고 기계경운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올해도 고추밭에 파종한 배추나 벼가 심겨진 땅에 뿌린 자운영은, 전혀 땅갈이를 하지 않았는데고 잘 잘 자라고 있다.

 

 

거친 땅을 새로 사서 경작지를 만들어가는 데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돌이었다. 골라내도 골라내도, 밭갈이를 하다 보면 언제 골라 냈느냐는 듯이 끝도 없이 튀어나오는 돌덩이들이 참 성가신 존재였다. 그러나 생각이 바뀌고 나면 오히려 돌들이 반갑고 고맙기까지 하다. 요즘은 농사를 짓는 데 미량요소의 공급원이 되는 미네랄이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그런데 미네랄은 대부분 각종 암석을 물에 담가두어 얻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비싼 돈 들여 남들이 만들어낸 미네랄을 사서 사용하느니 밭에서 나온 돌들을 과일나무들 근처에 흩어두고 풀로 덮어놓으면 비가 올 때마다 빗물을 머금었다 조금씩 내어놓으니 이것이 바로 최고의 미네랄 농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요즘은 돌들에게도 고맙다고 자주 인사를 한다.

 

 

또한 우리는 '자발적 가난'이라는 삶을 향해 차츰 생활을 간소화해가면서 경제문제의 짐을 가볍게 하고자 한다. 소박한 삶은 돈을 많이 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정신적 노이로제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고, 적은 수입으로도 저축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소박한 삶을 단지 경제적 해결책의 차원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자발적 가난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의무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소박한 삶이야말로 우리의 터전과 환경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깨끗한 물과 공기가 참으로 귀한 시대이다. 이대로 계속 나갈 수는 없다. 이대로 가다간 비록 우리야 당장 죽지 않더라도 우리의 아들딸 혹은 우리의 손자손녀들이 이 지구에 더 이상 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가난하게 산다는 것은 더 이상 부끄러움과 수치가 아니라 다음 세기를 위한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될 것이다. 사실상 우리의 성현들은 이미 이런 지혜를 실천하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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