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온도 - 얼어붙은 일상을 깨우는 매혹적인 일침
이덕무 지음, 한정주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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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십 년쯤 전인가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었다. 예쁘고 맛있는 디저트를 먹어도 재미있거나 슬픈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친구들이 재미있다고 다 웃는 상황 속에서도 무덤덤해서 삐걱삐걱 뭔가 고장난 느낌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느끼지 않기 위해 상황에 맞춰 표정을 지어냈지만 ‘뭐 때문에 저렇게 웃고 즐거워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나마 슬픈 감정은 느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그 감정도 ‘내가 억지로 만들어낸 감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아 있긴 한 것인지, 이 세상이 진짜 실재하는 것은 맞는 것인지 의심이 들었다. 나도 사람들도 상황도 전부 의미가 없었다. 점점 무기력해졌다.
그래서일까 이런 상태가 올 조짐이 보이면, 더 자극적인 상황을 쫓았다. 가늠할 수 있는 지표들이 있는데, 그 중 ‘시 읽기’도 포함된다. 좋아하는 시인의 시인데 얇은 시집을 전부 읽어 나갈 때까지 ‘단어와 단어의 나열’이라는 생각이 들면, 또 저 무기력한 상태로 들어가는 길로 들어선 것이다. 일주일~이주일 동안 어떤 것이든 호기심이나 감사가 느껴지지 않아도 마찬가지이다.
시는 시인의 감정과 생각을 생략, 압축하여 은유적으로 표현한 글이다. 다른 어떤 글보다 상상력과 감성이 필요한 장르이다. ‘무덤덤’하다면 행과 연속에 시인이 숨겨 놓은 이미지와 감정을 간접적으로 느끼며 세세하게 감상할 수 없다. 난 기교? 있는 시보단 담백한 느낌의 시를 좋아한다. 내가 사용하는 일상 속의 단어가 시에 적절하게 배치되었을 때 마법처럼 생생하게 살아나는 그 느낌이 좋다. 내가 쓰면 죽은 언어인데, 시 속에선 살아 있다.
‘시의 온도’는 18c 조선 실학자이자 시인인 이덕무의 시를 엮은 책이다. 독서법 책에 자주 등장하는 ‘간서치 이덕무’.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책에 미친 바보라고 불릴 정도로 독서를 좋아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조선 시대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18c. 정조,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등 수많은 지식인들의 교류가 활발했던 시기라고 알고 있다. 이덕무도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등과 만나며, 글을 짓고 우정을 나눴다고 한다.
흰 바탕에 푸르스름한 매실 하나. 책 표지를 보면 이 책의 느낌을 잘 표현한 것 같다. 저 매실을 한 입 베어 물면 설익은 신 맛이 느껴질 것 같다. 상쾌한 하고 청량한 자극. ‘얼어붙은 일상을 깨우는 이덕무의 매혹적인 일침’이라는 부제와 잘 어울린다. 이덕무의 소품문(에세이)을 엮은 ‘문장의 온도’에 이은 책이라 비슷한 표지이겠지만(흰 주황색 복숭아 하나), ‘시의 온도’만 놓고 봐도 굿 초이스이다.
시인은 아니지만 시인의 관찰력과 감성은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는데 지쳐 마음이 딱딱해지면 다시 말랑말랑하게 되돌아가는데 시간과 노력이 적잖이 소요된다. 우리가 무기질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딱딱한 마음이 되기 전 미리 예방 차원에서 일상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기본 체력을 비축해 두자는 말이다. 그림 그리기, 퍼즐 맞추기, 글쓰기, 사진 찍기, 독서, 모임 참여 뭐든 상관없지만, 이 책에선 이덕무의 ‘시'를 통해 그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모든 사물은 자기 낢의 소리와 색깔과 감정과 경계를 갖추고 있으며, 시인은 단지 시적 언어로 그것들을 형상화할 뿐이라는 얘기다. (중략) 비록 천지만물이 시를 짓지 않을 수 없게끔 몸짓을 한다고 해도 시적 감수성과 시적 사유가 없다면 어떻게 시를 지을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시의 탄생은 사물의 몸짓 + 시적 감수성 혹은 시적 사유 + 시적 언어가 결합할 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p. 201)
“시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대화하고 공감하고 교감하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시를 읽으면 사물과 공감하는 시인의 ‘감수성’을 읽을 수 있다. 시를 읽으면 사물과 교감하는 시인의 ‘사유’를 읽을 수 있다. 시를 읽으면 사물과 대화하는 시인의 ‘상상력’을 읽을 수 있다. 공감과 교감과 상상력은 사람이 사람일 수밖에 없는 필요충분조건 중의 하나다.”(p. 205)
예술의 기능 중 하나는 우리가 섬세하게 살피지 못하거나 놓쳤던 감정, 잊어버린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 예술가들은 우리가 쉽게 지나치거나 압도되어 마주 볼 수 없었던 것을 포착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봄을 맞이할 새도 없이 혼란한 시국인 이때 ‘얼어붙은 일상’을 깨워주는 이덕무의 시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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