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늑대, 그리고 하느님
폴코 테르차니 지음, 니콜라 마그린 그림, 이현경 옮김 / 나무옆의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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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개’가 주인에게 버려집니다. ‘개’는 주인을 참 잘 따랐는데, 그 주인이 길에 개를 버리고 간 것이죠. 개는 주인을 기다리지만 주인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책은 그림도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고개를 숙인 ‘개’의 모습이 처량해 보입니다. 자신을 보살펴주는 주인, 안락한 집, 자신을 나타내는 개 목걸이... 이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것입니다. 온전히 ‘개’라는 자신의 존재만 남게 된 것이죠. 사람들도 이런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다 커서 독립하고 자신을 보았을 때, 학생도 직장인도 그 무엇도 내 세울 수 없는 백수/백조 또는 은퇴인 상황일 때, 자신을 지칭했던 것들이 부질없어 졌을 때 등 이런 순간 온전히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도대체 나를 뭐라고 정의 내려야 할까. 사춘기도 아닌데 정체성의 혼란이 오기도 하고 공허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남들과 비교해 비참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나를 감싸고 있던 두터운 ‘페르소나’가 벗겨진 것입니다.
집에서 길러진 개는 어찌해야할지 알 수가 없는데, 그런 개 앞에 노란 눈을 가진 ‘늑대’가 나타나 ‘달의 산’으로 가라고 말합니다. 늑대는 뒷다리 고기를 개에게 식량으로 주고 훌쩍 사라집니다. 집에서 주인의 보살핌을 받으며 안락하게 지내온 ‘개’에게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곳이었죠.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도 이 늑대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늑대는 ‘개’를 온전함으로 이끄는 ‘인도자’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인도자’가 꿈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마음의 속삭임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인도자’는 우리가 두려워하며 피했던 길 또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낯선 길로 이끕니다.
‘개’는 여차저차 해서 숲으로 들어가고 ‘달의 산’을 향해 순례길을 가는 늑대 무리와 마딱드리게 됩니다. 늑대들은 개를 무리에 받아들이죠. 개는 이들과 다니면서 개울을 건너고 사냥하고 자신의 소리를 내는 법을 배우며 ‘야생성’에 눈을 뜹니다. 더 이상 도시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가죠.
인간에게 가장 친숙한 동물인 ‘개’가 원래는 ‘늑대’였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아주아주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우리의 선조들이 사냥을 하고 채집하고 농사를 짓던 시절, 야생 동물들이 길들여집니다. ‘늑대’가 길들여져 야생성을 잃어버리고 ‘개’가 된 것이죠. ‘개’와 ‘늑대’의 관계를 살펴보면, 우리의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사회의 문화, 관습, 시선 등에 맞춰 우리는 ‘사회화’ 되었습니다. ‘사회화’가 필요한 것이긴 한데, 너무 지나쳐 ‘진정한 나’를 향해 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개와 늑대들이 ‘달의 산’의 정확한 위치도 모르고 막연히 북쪽으로 향하는 것처럼 우리는 혼란 속에서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순례길을 가야합니다. 쉬운 길이 아니죠.
‘개’는 순례길 여정에서 보들보들 하던 발바닥이 딱딱해지고, 윤기가 흐르던 털이 푸석푸석해 집니다. 먹이를 찾지 못해 굶고, 추위에 벌벌 떨며 흙바닥에서 잠을 잡니다. 때론 주인과 함께 도시에서 살았던 때가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달의 산’이 진짜 있는 곳인지 의심이 들기도 하고, 여정을 함께 하는 ‘늑대’들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끝끝내 ‘개’는 ‘달의 산’에 도착합니다. 어?? 천국 같을 줄 알았던 ‘달의 산’이 아무 것도 없는 허허 벌판입니다. 무슨 상황일까요? 이쯤에서 달의 산에 서 있는 ‘개’의 모습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달의 산’을 향해 가는 순례길 과정 속에서 ‘개’는 자신의 ‘야생성’을 찾아 ‘늑대’가 되었습니다. 어느 선사의 말처럼 ‘달의 산’은 우리가 강을 건너기 위한 ‘배’일 뿐이죠. 어찌되었던 간에 ‘개’는 인도자 ‘늑대’의 조언을 따라 긴 여정을 거쳐 ‘진정한 나’, ‘개성화된 나’를 찾게 되었습니다.
“자유롭게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그렇지만 가능한 일이기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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