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행복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존재라고 해야 할까?
광고 회사에 다니며 자신의 생각이나 심신의 상태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숨 가쁠 정도로 일에 파묻혀 살다가 알게 된 사실~
동거하던 남자의 바람,
그 배신은 사라의 일상을 마구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감정 상태는
어떠신가요?
기분은
어떠세요?
행복하신가요?
현기증과 구토로 인해 고통받던
사라,
신체검사를 받던 중 의사의 질문을 받게
되는데...
의사는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아하~
얘기인즉 신체에는 이상이 없다는
의미이고,
그렇다면 심리적인 면을 살펴야 한다는
의미이렷다.
역시 짐작대로 사라는 우울증상을 앓고 있는
것이었다.
의사는 21세기의 감기 같은 거라면서 우울증을 설명했고 항우울제를
처방했다.
케리다 데자메
엔트라르
해석하면 ‘예 나 좀 들여보내 줘’란 말이다.
기계적인 삶,
마치 일 중독자처럼 살아온
사라다.
어느 날 몸에 찾아온 이상한 변화로 자신의 모습을
봤을 때,
그녀는 자신의 일상에서 행복의 부재를 확인하게
된다.
마흔이 다 되도록 난 뭘 한
걸까?
축하할
만한 거라도 있나?
아니
잘못한 게 있나?
왜
아침마다 진저리 치며 일어나야 하는 거지?
내 삶이
나를 역겨워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상주의를
품은 언론인이었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머라고 말할까?
새 천년이
시작될 무렵 영국에 온 젊은 연인들이었던 우린 지금 어떻게 된 거지?
(생략)
난
누구지?
나 잘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지금 헤매고 있나?
그래,
헤매고
있었다.
-p.
45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은 생활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일이다.
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 본
내용이다.
소원은 생의 목표이고 사람들은 저마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소원을 지니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당신,
지금 행복한가?
현재의 심경이 어떠한지를 묻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나마 사라에게는 말을 걸어주는
고양이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다.
아니 저자는 심경이 답답한 우울증을 돌파할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여기고 난데없는 고양이를 등장시킨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상처로 인해 삶이 행복에서
갑자기 불행으로 바뀔 수 있지만 고양이 라면 드러내 놓고 사람을 할퀴거나 외면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사람이 남기고 간 상처는 다시 그 어떤 사람의
따뜻한 마음으로 치유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작용하는 힐링 효과는
그렇게 천천히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난 안쓰럽고 힘없는 인간의
손톱으로 창틀을 부여잡으려 했다.
하지만
미끄러져서 비틀거리다 곤두박질쳤고,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어 절망에 빠져 습한 런던의 공기를 향해 사지를 버둥댔다.
너무 많은
걸 알고 싶어 하다 이렇게 된 거다.
행복해지고
싶었지만 그 방법은 모르는 인간의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난 죽음을 향해서 곤두박질쳤다.
고양이도,
들쥐도,
인간도
모두 언젠가는 맞이하게 되는 죽음을 향해서.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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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순간,
그 절망감에 울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면서 어느 누구의 손도 선뜻 잡을 수가 없는 순간,
이 책에서 사라에게 다가온 고양이 시빌처럼 세상을
온 가슴으로 느끼며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야 함을 알게 하는 누군가가 절실하다.
사람의 감정이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때쯤이면 아프고 아리던 상처도 제법 아물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마음이 겪는 일이라 그런지 사라의 일상과 심경을
공감할 수도 있고 그녀가 다시 본연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길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