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알게 된 팀 켈러 목사님의 저서들에 감동받고 찾아 읽게 되는데요.
이번에 새롭게
선보이는 책이 있어서 받아 놓고는 부피가 작아서 그랬겠죠.
그만 다른 책에 가려 소개가 늦어진 책이기도 합니다.
탕부 하나님이란 주제의 설교를 팀 켈러 목사님을 통해 접하게 되다니
기대되었습니다.
기존 우리가 교회에서 접했고 성경 본문으로 접했던 탕자 이야기인데요.
이번에 만난 책의 제목은 생소한 표현이 아닐 수 없었지요.
바로 「탕부 하나님」이니까요.
팀 켈러 목사를 보는 시각이 소개되는 부분이 있어서 공유합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팀 켈러 목사를 뉴욕에서 주목받는 목사님이라고
소개하죠.
뉴욕 타임스는 자신의 청중인 도시인의 언어를 구사하는 켈러
박사의 말솜씨에 감탄하고 있네요.
논리적이고 성경적이면서 설득력 있는 팀 켈러 목사님의 탕부 하나님, 어떤 내용들을 다루는지 알아보았습니다.
먼저 탕자?라고... 그런데 탕자는 어떤 사람이죠?
문자적인 의미는 생각해보지 못했었고 다만 집을 나간 사람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이 책 「탕부 하나님」을 읽으면서 비로소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라고 하면 우리는 당연히 집을 나간 작은 아들 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팀 켈러 목사님은 작은 아들뿐만 아니라 큰아들의 행동도 주목해서 볼 것을
제안합니다.
그가 동생을 책망하고 동생을 받아준 자신의 아버지께 무례하게 굴었던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임을 지적합니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부모님의 재산은 당연히 자신들의 몫이라고 말이지요? 그래서 부모님이 재산을
누구에게 상속하는지 또는 누구에게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때론 이 책에 나오는 큰 아들처럼 화를 내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 지방에 상속에 대한 어떤 전례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자신이 축적했던
재산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자녀들이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특권은 분명 아버지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아무에게든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탕자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불순종한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 행동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란 사실 이 책을 통해 다시금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그 집에서 제일 좋은 옷이라면 아버지의 옷이었을 테고, 이는 아들의 신분이 회복되었다는
확실한 증표다. 아버지의 말은 이런 뜻이다. ‘나는 네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거다. 뼈 빠지게 노역을 다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겠다. 네 힘으로 자격을 얻어서 이 집안에 다시 들어오는 게 아니다. 내가 그냥 너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지위와 명예의 옷으로 네 헐벗은
몸과 가난과 누더기를 덮으련다.’
- p.50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탕자에게 베푼 사랑과 죄 사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베푸신 사랑입니다. 그동안 이 책의 내용에서 소개하는 탕자의 비유를 읽으며 혹시 탕자를 비판한 사람이 있진 않은가요?
그렇다면 그들도 큰 아들처럼 위에 계신 분께 불경을 저지르는 행동임 기억해야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종종 믿지 않는 사람에게 표적이 되곤 합니다.
자신들은 법규를 어겨도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거나, 생활규범에서
살짝 비켜나도 자신들의 허물은 깨닫지 못하고 비판하며 냉혹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이고 그래서 더욱 본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애쓰며 살아갑니다. 팀 켈러 목사님의 저서 이 책 탕부 하나님을 읽으면서 신앙의 자세를 점검해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언행이 좀 더 신중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복음의 빚진
자임을 기억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예수님처럼 모든 면에서 닮아가길 원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단순히 한 나라를 정치적 압제로부터 해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죄와 악과 죽음 자체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다. 인류를
본래의 집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분은 강함으로 오지 않으시고 약함으로 오셨다. 그분이 오셔서 겪으신 유랑은 마땅히 우리가 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분은 아버지의 임재로부터 축출되어 우리 대신 영적 소외라는 극한의 절망과 어둠 속에 내던져지셨다. 인류의 반항에 대한 모든 저주와
우주적 실향을 친히 당하셨다. 우리를 진정한 집으로 맞아들이시기 위해서.
- p.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