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기담
임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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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좋을까. 낡은 고가의 먼지 낀 다락방에서 거미줄과 함께 우연히 찾아낸 정체불명의 부적 하나―용도도 내력도 알 길 없는 그 빛바랜 부적의 붉은색 문양 같은, 왠지 음울하고 기이하고 또 알록달록한 그 이야기를.

_「나비길」, 『황천기담』



  여기 특별한 공간, 황천(黃川)이 있습니다. 죽으면 간다던 그 황천(黃泉)이냐고요? 아닙니다만 딱히 아니라고만 이야기할 수는 없네요. 그런 대답이 어디있냐라고 물으신다면 아주 긴 이야기가 시작될 텐데 들어보시렵니까? 


 황천, 그곳은 마시기만 하면 삼팔선을 넘은 인민군이고 그 뒤를 쫓는 국군이고 피냄새를 잊고 어린아이가 되어버리는 술(「칠선녀주」)이 있고 나비를 몰고 온 순백색의 청년(「나비길」)이 있으며 탐욕의 괴물을 배에 품은 한 남자의 지난한 황금 쫓기가 땅 밑에 ‘캬륵’거리고(「황금귀(黃金鬼)」) 슬픔을 잊는 비밀스러운 의식이 거행되는 공간(「월녀」)이요, 남녀가 “철커덕” 붙어버려 떨어지지 않는 기이한 사건 속에 사랑을 찾는 이들이 있는(「묘약」) 곳이지요. 그러니 제가 서두부터 의뭉스럽게 군것이 이해가 되실는지요. 온갖 기이한 것들이 흘러나오는 지류이자 벌거벗은 욕망을 마주하는 심연의 공간.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겉으로는 평화로운 듯하지만 내부에선 무언가 용암처럼 불길하게 들끓고 있는 소읍. (...) 이를테면 윌리엄 포크너 소설의 ‘요크나파토파 카운티’ 혹은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마콘도’ 같은” 마을, 황천. 

 그렇습니다. 어서 오세요. 여기가 바로 황천(皇川)입니다.



거침없는 상상력을 아름답게 펼치는 농익은 이야기의 힘



 여기 한데 묶인 연작들은 원래 ‘황천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지난 수년 동안 띄엄띄엄 발표해왔던 것들이다. 이 소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욕망’이다. 스스로 욕망의 화신이 되거나, 욕망에 사로잡힌 타자들에 의해 괴물과 유령으로 변해가는 인물들의 이야기.

_작가의 말, 『황천기담』



 연작 소설이기에 프롤로그 격인 「칠선녀주」부터 소설집의 대미를 장식하는 「묘약」까지 순서대로 술술 읽어나가길 권합니다만 굳이 한편만 읽겠다면 전 「황금귀(黃金鬼)」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을 강타했던 금광 광풍에서 착안한 듯한 이 소설은 황금에 미친 한 남자와 그 남자로 인해 자식을 잃고 평생을 기다림으로 보내야 했던 아내의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백화옥’을 수십년간 운영한 소탈한 여장부 백화는 어느날 정체불명의 소리를 듣습니다. “후우...... 후우......” “바람 소리인 양 아스라이 맴도는 소리”, “상처 입은 짐승처럼 가쁘고 불안하게 씨근덕대는 숨소리”, 그건 바로 남편 황충의 숨소리였습니다. “황천읍을 몽땅 사서 잘난 네년의 손에다 쥐여”준다던 그가 떠난 지 삼십육 년, 이제 그의 나이도 여든다섯일 터입니다. 살아있을 리가 없건만, 소리는 기이하게도 땅 아래에서 점점 더 백화의 집으로 가까워져만 갑니다.

 땅 아래에는 백화의 남편 황충이 출구를 찾아 땅 아래를 천천히 기어가는 중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는 질문은 일단 이 감주부터 마시시고 꿀떡 삼키시지요. 황충은 손에 금괴를 쥔 채 백화 앞에 자신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의기양양하게 외치게 될 순간만을 기다리며 삽십육 년만의 귀가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그의 뱃속. 먹은 것 없이 지낸지가 수십 년이라 이제는 가죽과 뼈만 남은 황충의 몸이건만 유독 배만이 불룩 튀어 나와 있습니다. 언제부터였을까, 황충의 뱃속에는 무언가 살기 시작했습니다.



 “갸륵......캴......캴......캬륵......”

  뱃속에서 놈이 또 소리를 질렀다. 뭔가 불만스럽다는 신호였다. 본능적으로 그는 자신의 배를 그러안았다. 곧 끔찍한 통증이 덮쳐오리라.

_「황금귀(黃金鬼)」), 『황천기담』



 도대체 이런 괴물 놈이 왜 황충의 배 안에서 기생하는지 알 턱이 없습니다. 업보일까요. 황충이 집에 가까워져 갈수록, 배 안의 놈 역시 점점 더 공격적으로 내장과 뼈마디를 물어뜯기 시작합니다. 대체 황충은 왜 지하에서 금괴를 쥔 채 집으로 귀가하는 걸까요, 아니 왜 황금에 그토록 눈이 멀었던 걸까요? 아니, 그 사연까지 제가 다 이야기하면 재미가 있겠습니까? 지금 놀리는 거냐고요? 아니, 아니 쟤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황충과 백화의 곡절 많은 삶에 황금이 얽혀 들어간 그 피떡진 욕망의 맨 얼굴을, 제 졸렬한 입담보다 임철우 선생의 시원시원한 서사와 그 이야기의 흐름을 촘촘히 메운 노련한 미문에서 확인하시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두 아이가 나타난 건 오늘 새벽이었다. 새소리인가 하고 무심코 들창을 열다가, 백화는 풀썩 주저앉았다. 집 맞은편 높다란 전봇대 위였다. 아이들은 똑같이 전깃줄에 다리를 걸고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백화를 보자마자 아이들은 재빨리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철봉을 하듯 전깃줄에 나란히 매달린 채 그녀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초롱초롱한 눈의 사내아이는 여섯 살쯤, 얼굴 윤곽이 흐릿한 여자아이는 아홉 살 정도였다. 백화는 그들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오래전 유치장과 피란열차 지붕에서 죽은, 그녀의 아이들이었다. 순간 눈물이 비 오듯 철철 쏟아졌다. 

_「황금귀(黃金鬼)」), 『황천기담』



기담에서 마주하는 내 안의 지옥이여



 한 작품만 말한다 해서 다른 작품들이 범작이라는 건 아닙니다. 이야기의 포문을 여는 「칠선녀주」가 황천이라는 공간을 대략적으로 그려내며 따뜻하게 데운 술 한 잔으로 본격적인 여정에 예열을 해준다면, 뒤이은 「나비길」은 소문의 폭력과 동성애 코드가 만난 보기 드문 수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명의 영화가 있기도 한 애니 프루의 「브로크백 마운틴」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 단편은 성애를 넘어 인간의 순수성에 대한 질투와 본능적 파괴본능이라는 숱하게 거론된 주제를 농익은 글솜씨로 탁월하게 풀어냅니다. 무엇이 탁월하냐, 묻는다면 이 이야기를 다 읽고 가슴이 지끈거리는 순간을 두고 탁월하다라고 말할 수 있습죠. 일곱남자의 기구한 한(恨) 보듬어 안는 여자, 「월녀」의 이야기는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나 아름다워 한참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사내들은 묵묵히 마당을 가로질러 우물로 향한다. 바가지와 수건을 손에 쥔 천씨가 앞장을 섰다. 달빛 가득한 마당은 눈에 덮인 듯 온통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다. 우물가에 이르자 사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저마다 옷을 벗기 시작한다.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우물은 어느새 지표면 높이까지 그득히 샘물이 차올라 있다. 청년이 무릎을 꿇고 손바닥으로 찰랑찰랑 물을 쓰다듬어본다. 우윳빛 샘물은 더없이 부드럽고 따스하다. 어느새 일곱 명의 사내들은 모두 알몸을 하고 있다. 앙상하고 볼품없는 그 일곱 개의 몸뚱이 위에도 달빛은 흥건히 쏟아진다.


(...)


 사내들은 저마다 정성스레 몸을 씻기 시작한다. 바가지에 우윳빛 샘물을 가득 떠 담아, 머리 위에서부터 촬촬 내리붓는다. 물방울이 유리알처럼 하얗게 부서져내린다.

_「월녀」, 『황천기담』



 마지막 작품 「묘약」은 전설의 명주 ‘칠선녀주’ 제조를 둘러싸고 마을에 벌어지는 암수가 달라붙는(세상에 남사스럽게도 가위도 저끼리 달라붙고, 열쇠는 자물쇠와 들어붙고, 남자는 여자와 교합하다 딱 붙어버리니) 기이한 사건들 속에 주인공 홍녀와 그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 대로 올라가는 기구한 역사와 한 남자와의 숙명이 딴청 할 틈 없이 펼쳐집니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기담들이 있습니다(지금도 저기 저렇게 태어나고 있습니다만). 어쩌면 우리가 기담에 열광하는 것은 그 기이함 때문이 아니라 그 기이함이 거울처럼 우리의 얼굴을, 얼굴 너머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욕망을 비추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본 적 없는 들은 적 없는 기묘한 초상으로 움틀거리는 이야기, 그 살아있는 이야기, 수없이 많이 똬리를 튼 이야기의 시원에서 바라보는 인간 욕망에서, 우리는 두려움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쾌감을 느낍니다. 그 쾌감은 저 기묘한 세계가 바로 내 안의 지옥이라는 깨달음에서 비롯되지요. 낯선 데서 마주한 내 벌거벗은 욕망을 타자로서 바라보는 카타르시스. 그런 ‘번쩍’하며 등골이 서늘해지는 순간들이 가득한 이야기가 바로 『황천기담』입니다. 그러니 자꾸 꽁무니만 빼지 마시고 어딘가에 표지판도 없이,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올 사람을 불러들이는 마을, 황천으로 기꺼이 떠나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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