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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ㅣ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평점 :
책에 대한 나의 취향도 계속 바뀌는 터라 양장본을 무지하게 좋아했던 시절도 있었고(책을 오래도록 소장할 욕심으로 그득했던 때인 것 같다), 가볍게 들고 다니며 읽을 수 있는 문고본을 좋아하는 지금같은 때도 있다(지금은 그냥 책이란 흘러가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다 ㅎㅎ). 그래서인지 나는 열린책들이란 출판사를 좋아한다. 양장본이 판치는 우리나라에서 일본 문고본 정도는 아니어도 나름 문고본을 지향(?)해 주는 듯한 인상을 주는 출판사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끼는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새로운 책이 나왔다. 미국도 영국도 일본도 아닌 스웨덴 작가가 쓴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책 속표지에는 이런 설명이 적혀 있다. '이 책은 실로 꿰매어 제본하는 정통적인 사철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사철 방식으로 제본된 책은 오랫동안 보관해도 손상되지 않습니다.' 사철방식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책의 만듦새가 난 참 맘에 든다. ^^ 총 500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이지만 들고 다녀도 무겁단 느낌은 주지 않는다. 종이 질도 맨들맨들하기보단 약간은 거칠고 두꺼운 슥슥 넘어갈 때 인간적인 느낌을 주는 재질이다. 책 내용은 얘기도 않고 너무 외모에 대해 주절거렸나? ㅋㅋ 그렇다고 누가 뭐래도 표지 이야기 안 하고 갈 수가 없다. 아 저 위트 넘치는 표지 좀 보라지!! 구부정한 자세로 병원복인지 파자마인지 모를 것을 입고 슬리퍼를 신은 채 트렁크를 끄는 100세 할아버지. 그 옆에 바다와 구름과 별과 해와 바람이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색감이 너무 예쁜 파란 표지!! 반했오반했오~~하하! 아 계속 이러면 너무 외모지상주의자(?) 같으니까 이제 내용 얘기 좀 해 봅시다.
1. 알란 칼손의 100년 인생, 그 안에 녹아든 세계 현대사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알란 칼손이란 스웨덴 사람이 100년 간 살아가면서 세계사의 굵직굵직한 순간에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황당한 설정에 있다. 처음에 책 소개를 보고도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그냥 어이없는 소설 아니야? 싶었었는데 읽다보면 어느새 빠져들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현재의 상황 전개와 과거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진행되는데 나는 과거의 이야기를 더 흥미롭게 읽었다(이건 개인차가 있을 것이다). 워낙 역사에 관심이 많은지라 (관심만 많고 아는 건 없지만 ㅋㅋ) 상상 속 이야기지만 실제 있었던 사건들과 버무려지는 장면을 보는 게 너무 유쾌했다. 해리 트루먼 미대통령부터 스탈린, 김일성, 마오쩌둥까지 이념불문, 지위·국적불문 그와 만나면 그의 사람이 된다. 꺄아~ 매력적인 사람 같으니라고. 학교라고는 3년밖에 다니지 않은 알란이 세계의 지도자들을 포섭하는 장면들을 보면 킥킥 웃어대지 않고는 못 배길 거라고 확신한다. ^^
2. 살아있는 캐릭터 열전
이 소설 속에는 100년이라는 시간이 말해 주듯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들 한명 한명의 캐릭터가 살아있네~~!! 알란 칼손은 자신의 100번째 생일날 요양원 창문에서 풀쩍 뛰어내린다. 그러곤 모험심 강한 이 할아버지는 지루한 인생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마구잡이로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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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란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쓸데없는 기대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 반대로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될 터, 쓸데없이 미리부터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요나스 요나손,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271p. |
무지막지한 살인과 시체손괴가 벌어지는데도 이 소설이 이토록 유쾌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인물들 때문이다. 돈을 훔치고 살인을 저지르는 100세 노인을 위시한 무리도, 그들에게 돈을 뺏기고 뒤를 쫓는 조폭(?)들도, 각자 사연들을 간직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큰 구조의 이야기 안에 어쩜 이리도 잘 녹아있는지. 작가의 필력에 입이 쩍! ㅋㅋ
3. 은근히 숨겨 놓은 심각한 이야기
그런데 만약 이 소설이 이런 황당한 이야기만 쭉 늘어놓고 있다면 내가 저정도의 별점은 주지 않았을 텐데. 이 소설은 그 위트 속에 현대 세계사를 관통하는 여러가지 무거운 주제들을 하나씩 짚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전쟁, 이념, 종교 같이 현재까지도 종식되지 않은 갈등의 도화선들을 가벼운 척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멍청하기 짝이 없는 헤르베르트 아인슈타인과 그의 아내 아만다 아인슈타인이 발리를 잠식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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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아니야, 이제 당신은 자동차 운전에 관한 한 이 섬에서 제일가는 권위자가 되었어. 따라서 어떤 운전이 좋은 운전인지 결정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야. 내가 살아 보니까, 옳은 것이 옳은 게 아니고 권위자가 옳다고 하는 게 옳은 거더라고……」
헤르베르트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 그래…… 무슨 얘긴지 알 것 같아!」
▼요나스 요나손,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364p. |
우리는 그렇게 권위에 고개 숙이며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결국 권위를 어떤 식으로든 먼저 취한 사람에게, 나라에게 우리는 고개를 조아리게 되어있는 현실. 뼈아프게 다가온다.
정치를 제일 싫어하면서도 정치적으로 처신을 잘해 목숨을 부지하는 아이러니한 알란의 인생에서 나는 세상의 부조리를 마주했다. 그러나 만약 이 이야기가 진지함으로 포장되어 있었다면 이 정도로 흥미롭진 않았을 것 같다. 두툼한 두께만큼 읽고 난 후의 만족감도 두툼했던 오랜만에 만난 재미난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