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일기
정정화 지음 / 학민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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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화 선생의 장강일기를 처음 펼친 건 꼭 4년 전의 일이다. 2019,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대한민국은 분주하였다.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의 기억과 기념이 준비되고 있었다. 필자도 그 뜨거운 현장에 참여했다. MBC 라디오에서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아 이름도, 명예도 없이 망실(忘失)된 여성 독립운동가 3인을 조명하는 기획을 선보였는데 중국어가 가능하다는 이유로 중국 현지 취재 코디네이터를 맡게 되었던 거다. 3인 중 한 분이 정정화 선생이었다.

 

중국으로 떠나기 전, 벼락치기 공부를 위하여 집어 든 게 바로 이 책이다. 1998년에 출간되어 도서관 구석진 모퉁이에 보관돼, 사람의 손길이라곤 전연 닿지 않은 듯싶은 빛바래고 누레진 책. 그것은 독립운동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소리 없이 증언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이와 같은 생각도 들었다. 독립운동 자체에 대한 무관심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화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 망각의 정도가 더했던 건 아닐까. 가부장적 전통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오랜 시간 공적 서사로 인정받지 못한 것 역시 사실이다.

 

장강일기는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 선생 개인의 일대기이기도 하지만, 임시정부의 태동부터 귀환까지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당사자의 구술 증언으로서 그 역사적 가치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책의 줄거리를 구구절절 기술하는 것도 리뷰의 한 방법일 수 있겠다만, 책을 읽으며 스쳐 갔던 생각의 사금파리들을 이곳에 끄적여 본다.

 

#반쪽짜리 역사

 

한반도를 반쪽으로 만든 분단체제의 규정력은 아직도 사회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 우리의 독립운동사는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애도와 추모의 가능성은 민족주의냐 사회주의냐의 이념 지향에 따라 일차적으로 가려지고, 이어 젠더가 또 다른 구분 선으로 작용한다. 2018년 기준 교과서에 수록된 독립운동가는 208명이다. 이 중 고작 16명이 여성이고, 16명 중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은 사람은 11명이 전부이다. 절대적인 수적 열세 외에도 진짜 문제는 달리 있다. 2018년 국회 대정부질문 당시 교육부 차관은 유관순 열사 말고는 아무도 답하지 못했다. 부끄럽지만 그것은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정정화 선생은 홀로 지내는 남성 독립운동가를 보살피며 임정의 안살림을 도맡다시피 하였다. 독립운동에 내외의 구분, 주된 것과 부차적인 것의 구분은 가당키나 할까. 총 들고 전선에 나간 사람만을 독립운동가로 규정하며 역사의 외연을 축소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는 윤동주 시인처럼 펜을 저항의 수단으로 선택하였고, 누군가는 최재형 선생처럼 실업 구국의 길을 걸었다. 그간 너무 쉽게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었던 여성의 가사와 돌봄, 정정화 선생의 헌신은 고귀한 노동이자 운동으로서 인정받아 마땅하다.

 

최초의 여성 의병, 윤희순. 독립을 향한 불덩어리, 남자현. 하늘을 나는 독립의 꿈, 권기옥. 조선의용대 광복군, 전월순.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 최용신. 민족해방을 꿈꾼 장군의 딸, 지복영. 임시정부의 여성위원, 방순희. 그리고 <장강일기>의 주인공, 임정을 뜨겁게 품은 정정화. 그들의 이름을 뒤늦게나마 다시 불러본다.

 

#우리도 난민이었다

 

임시정부의 국내 귀환은 비참했다. 정정화 선생의 기록에 따르면 우리는 난민이었고 거지떼였다.” 부산으로 가기 위해 몸을 실었던 미군의 엘에스티라는 수송선은 난민 수송선이었다. 임시정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해외로 망명한, 정치적 난민들에 의해 세워졌다. 그리고 이 망명정부를 지탱했던 것은 일찍이 해외로 나간 한인 디아스포라들의 후원이었다. 미국, 중국, 연해주의 동포는 물론 쿠바 애니깽 농장과 멕시코 사탕수수 농장의 동포들도 십시일반 성금을 보내왔다. 한마디로 102년 전, 대한민국 시작의 중심에는 난민과 디아스포라가 있었다.

 

하지만 백 년이 흐른 2018, 제주도에 도착한 500명의 예멘 전쟁 난민에게 보였던 한국 사회의 태도를 정정화 선생이 살아 목도(目睹)하였다면 무어라 할까 궁금하다. 한국 독립운동의 경험은 단순한 저항의 서사에서 한 걸음 나아가 평화와 연대의 보편적 가치의 발견으로 이어질 잠재력이 충분히 있다. 이제 독립운동을 재해석하고, 새로운 시대적 가치를 선양하는 일은 후속세대인 우리의 몫이다.

 

정정화 선생의 독백처럼 관심은 때와 필요에 따라 열고 닫는 문이 아니라 항상 세상과 잇대어 있는 끈이어야 한다. 100주년을 맞아 분위기에 휩쓸려 독립운동을 향해 잠깐 달아올랐던 나의 관심을 반성한다. 독립운동은 기억하고 기념할 이벤트 이전에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살아내야 할 정신이다.

 

이제 장강물에 침잠해있는 더 많은 정정화들의 이야기를 길어 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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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국경제 침략사 - 쌀·금·돈의 붕괴
김석원 지음 / 한길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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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근대화론’은 최근 ‘반일 종족주의’ 담론과 결합해 대중적 위세를 떨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 논점의 허구와 모순을 논박하는 데 분명 유용한 참고서가 될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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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국경제 침략사 - 쌀·금·돈의 붕괴
김석원 지음 / 한길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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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국경제 침략사는 김석원 교수가 농업경제학의 태두이자 본인의 조부이기도 한 김준보 선생의 유고를 재구성한 저서이다. 책은 한 세기 전 조선(한국)을 수탈했던 침략자의 민낯을 속속들이 보여준다.

 

저자는 특별히 쌀, , 돈 등 세 가지 요소에 주목해 일본이 조선 경제의 뼈대를 어떻게 잠식해갔는지 다양한 통계 데이터에 기초한 논증을 시도한다. 그러한 경제 침략은 단순히 30여 년의 식민지기에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 개항기부터 주도면밀하게 기획돼왔음을 알 수 있다. 따지고 보면 1876년 강화도조약을 통한 조선의 개항 자체가 일본의 생존을 위한 처사였다.

 

깊이 있는 연구서는 아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널리 읽힐 수 있는 대중서로서의 조건을 갖추었다. 제법 오래전에 학계의 소수 일파가 제기한 식민지 근대화론은 최근 반일 종족주의담론과 결합해 대중적 위세를 떨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 논점의 허구와 모순을 논박하는 데 분명 유용한 참고서가 될 것으로 사료된다.

 

사실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밝혔듯이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 노력한다라는 명제는 당연하다. 조선을 개항시키고, 부분적 이권을 침탈하고, 거기에도 만족 못 해 아예 직접적인 식민 통치에 뛰어든 일제가 누구의 이익을 우선시했는지는 자명하다. 물론 조선의 근대화 이행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나, 그 역할을 절대시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이야기다.

 

책을 읽고 다소 우려스러운 부분도 있다. 하나는 일제가 자행한 악행의 나열이 일본 나빠로 단순하게 수렴되면 곤란하다. 애국 내셔널리즘에 기반한 반일/혐일 정서는 오늘날 군국주의 부활을 기도하는 일본 위정자가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반대하여 지나치게 내재적 발전론을 강조함으로써 조선 조정의 실책과 사회의 병폐가 축소 내지 은폐되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다. 고종이 근대적 계몽 군주로 재인식되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한다.

 

역사를 기억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왜 그렇게 속수무책 당했을 수밖에 없었는지 자성(自省)하는 것이야말로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는 지름길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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