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분 전까지 악을 쓰다
김연자 지음 / 삼인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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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지촌, 그들의 삶엔 무슨 일이 벌어졌나
김연자 에세이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서평


“기지촌 출신 활동가”로 널리 알려진 김연자씨가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분 전까지 악을 쓰다》라는 제목의 자전 에세이 집을 냈다. 이 특별한 제목이 선택된 이유는 그녀가 준비한 비문 때문이다. “정열적으로 열심히 산 여자, 죽는 순간 오분 전까지 악을 쓰고 열변을 토했던 여자 여기 묻히다.” 그녀의 글 속에는 살기 위해 ‘악’을 쓰던 그녀의 질곡 가득한 삶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글 쓰는 일을 ‘똥 푸는 일’에 비유한다. 자신의 인생에 담긴 싫은 것들, 후회스러운 것들, 아픈 것들이 똥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미선씨는 김연자씨의 삶이 우리 역사, 근대화 속에서 빚어진 생채기와 같다고 말한다. 어머니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로 간 아버지 때문에 일찍부터 빈곤에 시달리던 김연자 모녀. 그들은 여수에서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그 시절은 총체적으로 인권이라는 개념이 부재한 혼란스러운 시절이었다. 김연자씨는 어려서부터 친척오빠, 길을 안내하던 군인 등에게 성폭력을 당했지만 아무에게도 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청소년 시절, 여관에서 자살을 꾀하기 위해 수면제를 먹고 죽으려 할 때도 여관의 사환이 그녀가 정신 없는 틈을 타서 성폭력을 저질렀다. 이 성폭력은 평생 그녀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마음의 병이 된다.

김연자씨는 자서전을 완성하고 난 뒤 "이 책은 다른 게 아니라 한 여자가 성폭력을 당하고 어떻게 평생을 방황하며 살다가 치유되는가의 이야기다." 그래서 김연자씨는 비슷한 상처를 안고 있는 동료들에게 마음의 힘을 되찾게 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책 곳곳에는 그녀의 상처와 한이 곳곳에 스며들어있다. 가난해서 서울로 올라온 어린 그녀는 버스차장, 책 외판원, 구두닦이 등 눈에 들어오는 일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고단함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어간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찾아간 시립부녀보호소에서 그녀는 '몸 파는' 여자들을 처음으로 만난 한편 그 안에서 알게 된 명희와 언니, 동생 하면서 연인관계로 지내게 된다.

훗날 시립부녀보호소의 악조건을 참지 못한 여자들이 탈출을 시도해 보호소가 쑥대밭이 된 후, 명희와 연자씨는 자연스럽게 돈을 벌러 동두천으로 향하게 된다. 그녀들에게는 별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돈을 모아서 명희와 잘 살겠다는 연자씨의 소망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실현되지 않는다. 심지어 동두천에서 아버지의 배다른 자식이었던 미자를 비롯하여 동창들을 만나게 된다. 당시의 경제적 빈곤과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마음의 상처 등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동두천으로 들어오는 여성들이 많았던 것이다.

기지촌 생활은 연자씨가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나 많았다. 법적으로 성매매가 금지되어 있는데 버젓이 국가가 여성들을 상대로 성병검진을 했다. 포주와 클럽주의 착취도 문제였지만, 기지촌 여성들은 한미관계의 불평등함 속에서 최악의 조건에 처해있었던 것이다. 미군에게 성병을 옮겨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여성들을 한 달간 감금상태로 두는가 하면, 동두천의 여자가 죽어나가도 미군은 줄행랑치기 쉬웠다. 가족들은 한 여성이 죽고 나면 남긴 돈이나 물건을 가져가는 데 바빴다. 때문에 동두천 여성들은 집단적인 행동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연자씨는 ‘자매회’와 같은 기지촌 여성 자치회에서 자리를 맡는 등 활동적으로 일했는데, 화대를 깎으려는 미군들 앞에서 시위도 하고, 송탄의 성병검진에 문제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 검찰까지 뛰어가고 클럽 일대에 “포주, 클럽주인, 펨푸, 성병 진료, 보건소, 이들의 착취에 우리는 과감히 일어나야 합니다”라는 내용의 유인물을 뿌리기도 했으며, 군산에서는 미군 범죄 최초의 무기 징역형이 선고되기까지 몸을 아끼지 않았다.

힘겨운 기지촌 생활과 투쟁만큼 동료 여성들과의 관계에 대한 묘사가 이 책을 감동적으로 만든다. 일찍이 어머니를 모시고 명희와 함께 잘 살고 싶어서 동두천으로 들어갔던 만큼 연자씨의 삶에는 한평생 고락을 함께한 어머니에 대한 애증, 어쩔 수 없이 미군과 결혼시켜 떠나 보냈던 명희에 대한 사랑과 아쉬움, 그 외 같은 처지에서 고생한 여성들에 대한 진한 애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는 '커피 떨어지고 양담배 떨어지면 방문턱에도 안 들어오는 년들'이라고 화내다가도 계속되는 여성들의 항의와 하소연, 울음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흔들렸다고 한다. 엄마에게 버림받고 아빠에게 버림받고 짓밟히는 등 저마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가진 여성들이 자꾸만 죽어가자 연자씨는 하혈을 계속 하고, 돈도 벌지 못하는 암담한 상황에 처한다. 그때 그녀는 '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종교에 귀의해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공동체를 만든다. 처음에는 교회와 함께 일을 했지만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항의가 들어오는 바람에 아예 따로 천막교회를 짓는다. 그녀는 그 천막이 '내 평생 보아온 가장 아름다운 교회'였다고 술회한다.

이후 그녀는 송탄으로 돌아가서 참사랑 선교원을 열고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운동을 시작한다. 고 윤금이씨 살해사건만 해도 그녀는 기지촌 여성이 단순하게 동정의 대상이 되는 것이 불편했다. 그녀는 "단 한번도 제 욕심껏 시도해본다거나 이뤄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살수 있었던 삶의 희망"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다급한 마음에 누구 하나라도 만나게 되면 기지촌 여성의 억울한 삶을 말하는데 애썼던 그녀는 스스로도 조급함 때문에 오해를 샀으며, 대외활동 측면에서도 방송이나 언론, 학술대회를 통해 그녀의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불쌍한 처지라는 점만 강조되거나, 조사의 들러리로 전락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난 후 어머니와 정신적인 화해를 하면서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찾은 그녀는 앞으로도 기지촌 환경을 더 살만하게 만들어가기 위해 활동하겠다고 말한다. “나는 동두천, 송탄, 군산에서 가족과 떨어져 살던 여자들, 혼자 울던 여자들, 억울하게 죽은 여자들, 함께 저항했던 여자들, 슬픔을 깔깔거림으로 묻고 살아가던 여자들을 잊을 수가 없다. 여기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한 시대와 역사 속에서 그들의 삶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지금 이 나라 기지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계속 얘기할 수 밖에 없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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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녀
넬리 아르캉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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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몸을 부정함으로써 세상에 항거하다
넬리 아르캉의 《창녀》(putain) 서평

‘창녀’라는 제목의 이 책은 묘한 거부감과 시선을 끄는 도발성을 갖추고 있다.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을 부르는 명칭은 맥락에 따라 다르고 또 애매하다. 성매매 피해여성, 성판매자, 매춘여성…. 명명은 그 집단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래서 특정한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다. ‘창녀’(putain)라는 제목은 단순하게 성매매를 비하하는 것도 아니고 섣부르게 도발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5년 동안 성매매에 종사한 경험을 토대로 글을 쓴 지은이 넬리 아르캉에 따르면, 성매매는 현실의 뒤틀리고 황폐한 성관계의 결정체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가족 시나리오를 늘 상상한다. 아이를 낳은 후 늙어버린 어머니를 내버려두고 딸과 같은 젊은 여성들과 성관계를 가지는 아버지, 그 아버지가 창녀가 된 딸과 대면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설정은 김기덕의 영화 《사마리아》를 연상시킨다. 《사마리아》의 초점은 딸을 욕망하는 아버지-남성의 욕망과 죄책감이다. 그래서 ‘마리아’와 같은 역할을 맡은 딸은 남성 욕망의 대상이자 구원하는, 기능적이고 도구적인 인물이다.

넬리 아르캉은 이 박제된 딸들에게 목소리를 불어넣는다. 딸들은 여성을 철저하게 성적으로 상품화하는 사회를 비웃고 딸과 같은 여성들을 탐하는 남성들을 까발리며, 자신의 의지대로 하지 못하는 여성의 몸에서 죽음을 찾는다. 이를테면 《창녀》는 김기덕 영화의 여성 판이라고 볼 수 있다. 《창녀》는 극단적인 상황 설정 때문에 어떤 독자들에게는 거부감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거부감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차이로 환원 가능하다.

넬리 아르캉의 소설은 끝없이 중얼거리는 독백 같다. 좀처럼 문장이 끝나지 않는다. 그녀의 중얼거림은 마치 죽음과도 같은 상태에 처한 인간의 삶에 대한 감각,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고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황폐한 상태 속에서도 무언가를 붙잡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함을 연상시킨다. 그녀는 자발적으로 성 산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여성이 성 산업에 종사하기 쉬운 사회적 환경을 냉소한다. “내가 매춘하기 쉬웠던 것은 원래부터 내가 타인들의 것이라는 점을 평소에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이미 나는 창녀로 운명지어진 거나 다름없고 실제로 창녀가 되기 전부터 창녀였던 것 같으니까 말이야.”

지은이의 가족 상황은 지극히 평범하다. 어린 딸을 사랑하고 세상이 악하다고 믿는 독실한 신자인 아버지, 딸을 낳은 이후 아버지의 관심에서 벗어난 어머니, 그리고 일찍 죽어버린 언니. 그녀는 가톨릭 수녀들 아래서 정갈한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나 대학에 가면서 비로소 집에서 벗어나 바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런데 이 평범한 삶에서 그녀는 여성이 어떤 성적 존재로 규정되어 있는가를 철저하게 파악해냈다. 아버지가 관계를 맺는 젊은 여성과 자신은 별 다른 차이가 없는 존재다. 어머니는 자신을 낳은 후 아무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한 채 마치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죽은 듯 산다. 그녀는 어머니의 늙은 몸 앞에서 무거운 죄책감을 느끼는 동시에 경멸감을 느낀다. 그래서 잠자는 공주와도 같은 어머니가 차라리 어머니가 속은 채로 영원히 잠들어버리는 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다움이란 끝이 없으면서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돼야 고갈되고 마는 순응성이라구.” 그녀는 세상의 모든 여자들을 자신이 꼼지락대는 걸 누가 봐주기를 기대하는 굼뱅이이자 거울만 보고 사는 스머페트 같다며 철저하게 여성집단을 비하한다. 이 같은 여성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대답으로 거식증과 성매매가 등장한다. 지은이에게 거식증은 여성이 먹기를 거부하여 자신의 몸을 부정하고, 나아가 그 기이한 신체를 존재하게 함으로써 세상에 간접적으로 항거하는 방식이다. 성매매는 철저하게 도구화된 육체를 통해 ‘여성의 존재가치는 젊은 몸뚱아리’라는 숨겨진 논리를 적나라하게 현시한다.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도구로 끝없이 축소시키는 방식을 통해 지은이는 세상 자체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는 죽음 근처에서 왕복하는 경험이다. 그녀는 자신의 문학이 ‘죽음 쪽에서 삶에 말을 거는’ 글쓰기라고 규정한다. 《창녀》가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도식화하는 방식은 《피아노 치는 여자》, 《두 연인》에서 엘프리데 옐리네크가 선보인 도발적인 방식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러나 《창녀》에는 보다 묵직한 슬픔이 깃들어있다. 그 슬픔은 도망갈 곳 없는 현실을 피하고 싶은 죽음충동, 지리멸렬하고 추한 삶을 한 방에 해결해 줄 압도적인 숭고함을 찾는 충동에서 나온다.

성충동과 죽음충동이 인간에게 공존하고 있다는 프로이트의 명제는 넬리 아르캉에 의해 보다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게 발전한다. 그녀에게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성충동은 그 황폐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죽음과 맞닿아있다. “세상에 창녀와 그 고객을 한데 맺어준 황폐함을 잊게 해줄 건 아무것도 없어”, “언젠가 내가 딸을 낳으면 이름을 모르간이라 지어줄 거야. 그 애 안에다 영안실(morgue, 모르그)과 신체기관(organe, 오르간)을 뒤섞어 넣는다는 의미지, 죽음의 냉기와 삶의 무게를 한꺼번에 포괄하는 이름을 부여한다고나 할까.”

지은이는 짐승처럼 왈왈 짖어대면서 자기 얼굴을 때려주길 바라는 남자 고객을 회상하면서 “그 치욕과 고통을 통해 발기하는 세상 둘도 없을 저놈의 똥개새끼”들의 더러운 속내를 만천하게 공개하고 싶다고 말하다가도, “어차피 우리 모두는 몇 안 되는 표상들에 사로잡힌 존재들 아니야? 누구도 원치 않았고 전혀 상관도 없는 몇몇 불가항력적인 운명이 서로 꼬이고 되풀이되면서 사방팔방 날뛰는 가운데 우릴 지배하는 거 아니냐구.”하며 세상을 비꼰다. 남성집단에 대한 냉소와 비난, 죽음 충동과 글쓰기에 대한 간절한 욕구,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여성집단에 대한 비하 등이 뒤섞인 이 책은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 긴장감과 집요함을 통해 매력적인 텍스트로 탄생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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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 샤워
야마다 아카네 지음, 최선임 옮김 / 작품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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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결혼에 얽힌 상식을 뒤흔드는 책
야마다 아카네의 《베이비 샤워》 서평

언젠가 친구와 타로 카드 점을 본 적이 있었다. 친구는 자신이 아이를 낳아도 괜찮을 것인가 라는 난제를 가지고 점을 봤다.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서라도 태어나는 생명은 환영 받아야 한다.” 야마다 아카네의 소설 《베이비 샤워》의 마지막 문장을 본 순간 타로 점을 보던 친구가 다시금 생각난다.

내 친구뿐 아니라 대부분 여성들에게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고 복잡한 문제일 듯싶다.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에서 경제적 문제까지 난제가 무수히 널려있다. 여자이기 때문에 꼭 엄마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자신이 아이를 키울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한 점검도 피해갈 수 없다. 생물학적 나이와 질병의 유무 또한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이렇게 따지다 보면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래서 “아이란 결국 뜻하지 않게 생겨도 결과적으로는 좋을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처럼 여성에게 아이 낳기란 정답이 없지만 고민해 볼 만한 문제다.

《베이비 샤워》는 임신 8개월 경에 임부를 둘러싸고 열리는 여자들만의 파티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소설은 색다른 가족의 품에서 자라난 주인공 ‘나’가 자신의 가족이 형성되는 과정을 서술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나’는 자신의 가족이 색다를지라도, ‘베이비 샤워’의 자유로운 환영을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나’의 주장이 보여주듯, 《베이비 샤워》는 핵가족 도식의 붕괴가 가시화된 현대 사회에서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아이를 가진다는 것이 무엇이며, 사회는 이 여성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짚어보는 소설이다. 텔레비전 디렉터 출신의 지은이는 “결혼에 얽힌 현대인의 상식을 뒤흔들고 싶었다”고 당당하게 밝힌다.

지은이가 내세운 주인공은 이제 서른아홉 살이 된 비혼여성 미소노와 쿄코다. 두 여성 모두 방송계에서 전문적이지만 완벽하게 생계를 보장하지는 않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각자 결혼한 애인을 만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요리 프로그램 도우미인 미소노가 어느 날 아이를 갖겠다고 선언하면서 이들의 일상은 변하기 시작한다.

미소노는 부유한 남편과 아이를 가진 완벽한 전업주부이자 요리사인 루리코로부터 “제대로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라”는 충고와 함께 “아이를 만들지 않는 관계는 장난이며 무의미한 사랑”이라는 신랄한 비판을 듣는다.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라는 충고는 아무리 흔해빠진 정론이라 할지라도 비혼여성들에게 상처가 된다. 또한 미소노는 중국인 애인에게 ‘인종차별이 걱정되어 아이를 만들 수 없다’는 말을 들으면서 현실의 벽을 실감한다.

한편 미소노 때문에 쿄코는 아이를 가지고 싶어하지 않는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여성이 아이를 가지는 문제에 대해 미소노와 쿄코가 나누는 대화는 결혼과 엄마 되기, 양육과 관련된 많은 담론들을 충분히 포괄한다. 유전과 모성애의 문제부터 ‘단독세대’가 점차 보편화 되어가는 현대 사회의 경향, 피임의 보편화와 출산율 저하의 문제까지 이들이 나누는 폭넓고도 핵심적인 대화는 지은이가 가족과 여성의 문제를 매우 세심하게 고민했음을 보여준다.

《베이비 샤워》의 문제제기 방식은 가볍고 산뜻하다. 쿄코는 프리랜서로 불안하게 살면서 ‘불륜’을 하고 있는 자신들의 현재가 금전적인 원조를 받지 않는 부분만 뺀다면 1백 년 전 “창녀”나 “첩”의 삶과 유사할 것이라고 통찰하고,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도넛 가게의 쿠폰처럼 여자이기 때문에 받은 “엄마 되기 쿠폰”을 사용하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조롱하다가도 ‘하고 싶은 대로 하자’는 미소노의 생각에 동의한다.

연애와 결혼, 가족, 아이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흔해빠진 정론이 아니라 당사자의 심리적 상태와 의지일 것이다. 가족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4인 핵가족의 모습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고, ‘불륜’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으면서도 가끔 상대 남자의 가정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 하는 미소노와, 상대 남자의 성병 바이러스에 의해 자궁경부암에 걸린 후 누가 자신에게 바이러스를 옮겼는지 궁금해 하는 쿄코의 모습은 인상적인 비혼여성의 단면이다.

결국 미소노는 파리에서 건너온 게이 남자와의 관계에서 아이를 가지게 되고, 우연히 지하철에서 만난 젊은 남자 츠요시와 결혼한다. 그러나 이들의 삶이 사회적 공격으로부터 안전하지만은 않다. 주인공 ‘나’는 초등학교 친구들에게 동성애 이야기를 하다가 학부모에게 혼나는 등 순탄치만은 않은 학교생활을 보낸다. 쿄코는 ‘불륜’이 상대 남자의 부인에게 들키는 바람에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이런 삶의 방식도 있다”는 쿄코의 주장은 지은이의 생각과 합쳐져서 믿음직스럽게 다가온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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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보는 시선의 역사
에드워드 루시-스미스 지음, 정유진 옮김 / 개마고원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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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테마로 자리잡은 남성 누드
《남자를 보는 시선의 역사》 서평

여신, 님프, 혹은 고대 로마나 오리엔트의 백일몽 속에 있는 존재. ‘누드’라고 하면 통상 성적인 측면이 강조된 이상화된 여성의 몸을 떠올리기 쉽다. 특히 1960년대 이후 페미니즘의 영향이 커지면서 미술계에서 여성의 누드는 논쟁적인 주제로 떠올랐다. 즉 많은 연구자들이 기존의 남성중심적인 미술사를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다시 쓰면서, 역사의 뒤로 사라진 여성 예술가들의 작업을 발굴하는 한편 미술의 전통적인 작업들을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의 누드가 여성의 몸을 성적인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나아가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사회적 시선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 알려지게 된다. 또한 미술계 자체적으로도 다양한 소수자 그룹들이 수용되면서, 성적 존재로 이상화된 여성 누드들은 점차 그 모습을 감춘다.

그런데 누드에 대한 일련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미술계를 넘어선 대중문화 영역에서는 상업성과 예술적인 성질을 동시에 보유한 수많은 누드들, 특히 누드 사진들이 생산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현대 회화와 조각에서 인물과 같은 구체화된 이미지를 더 이상 선호하지 않는다는 점과 관계가 있으며, 누드를 바라보는 관점을 보다 다양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남자를 보는 시선의 역사》는 여성 누드 대신 남성의 누드 작업을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통해 살펴보면서 상대화된 시각을 제공한다. 지은이 에드워드 루시-스미스에 따르면 실제로 미술사에는 여성의 누드 이상으로 남성의 누드가 상당한 양을 차지하다가 19세기 중반 경에 와서야 자취를 감추었다. 그 이유는 미술의 주요 고객이 귀족에서 부르주아지 대중으로 변했기 때문인데, 이들은 누드화가 성적인 자극만을 제공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때문에 화가들은 남성이 다수를 차지하는 고객들에게 보다 쉽게 작품을 팔기 위해 벗은 남성 대신 벗은 여성의 이상화된 몸을 주로 그렸다는 것이다.

고대사회에서부터 남성의 누드는 여성의 누드만큼 남성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을 반영했다. 남성의 신체는 모든 사물의 척도이자 미의 기준으로 여겨졌다. 영웅들 또한 근육질의 남성으로 화폭에 등장했다. 그리스도까지 근육질의 남성이 되어 인간의 죄를 대속한 영웅적 면모를 강조하는 인물로 변신했다. 이 대속하는 남성 누드는 고통과 격렬함으로 가득 찬 이야기 가운데 감정 이입의 중심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죄를 대속하는 남성 누드의 정 반대에, ‘고상한 야만인’의 이미지가 있었다. 서구의 제국들이 팽창하면서 비서구인들의 누드가 차례로 서구에 유입됐는데, 이들이 신체에 상처를 내어 장식을 하는 관습 등은 야만적이면서도 예술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특히 문신은 현대사회에서 ‘고상한 야만인’의 은유를 통해 현대사회가 가하는 여러 제약과 규범들을 거부하는 사람을 상징, 패션의 관습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상화된 소년상 또한 자주 등장했다. 서양미술에서 사춘기 소년의 표현은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특히 그리스 사회의 동성애 문화는 소년들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다. 소년들은 남/녀 양성적인 존재 앤드로자인(androgyne)로 그려지기도 했는데,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난 소년 헤르마프로디토스가 그 예다. 헤르마프로디토스는 그를 사랑한 님프 살마키스와 한 몸이 된 존재로 여러 차례 조각의 주제가 된다. 현대의 대중음악계에 나타난 앤드로자인, 데이빗 보위는 남성과 여성의 경계가 모호한 이미지를 연출하면서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듯한 신비로움과 소외의 정서를 환기했다.

이처럼 남성의 누드는 여성의 몸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만큼, 남성의 성기를 노출하는 것은 여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서양미술은 남성의 성기를 처리하는 데 있어 만족할 만한 방법을 고안해내지 못했다. 특히 사진 발명 이후 남성 누드는 사진이라는 매체의 정확성으로 인해 그림과는 달리 성적인 맥락을 분명하게 담게 됐다. 때문에 여성의 그릴 권리와 남성 누드는 깊은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후반 여성들이 사회로 진출하기 시작할 때 미술계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가장 유명한 미국화가 중 한 명이자 교육자였던 토머스 에이킨스는 ‘모델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아카데미 학생이면 누구나 누드를 완벽하게 연구하고 습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동료 교수와 학부모들의 눈총을 견디지 못해 사임해야 했다.

현대에 와서 남성의 누드는 감정의 정직함을 중시하는 아방가르드 운동 및 이후 현대 미술의 중심 테마로 자리 잡게 된다. 많은 남성 작가들은 자신의 무능력함과 솔직함, 충격유발을 위해 자신의 누드를 작품으로 삼았다. 남성의 누드는 성적인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이미지를 연출하여, 여전히 종속적인 성을 드러내는 대부분의 여성 누드와 비교해볼 때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또한 미국 게이들이 주축이 된 동성애자해방운동의 영향은 남성 누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1950년대의 게이 미술가인 로버트 라우셴버그와 재스퍼 존스는 미술계로부터 배제됐으며, 1960년대의 앤디워홀과 데이빗 호크니도 상당한 경멸을 받았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면 남성 동성간의 로맨틱한 사진들이 자유롭게 출판되기 시작한다.

현재 남성의 누드는 게이 남성, 자신의 성적 욕구에 솔직해진 이성애자 여성, 그리고 매력적인 남성 모델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일반 남성들 모두에게 잘 팔리는 상품이자, 엘리트 미술 영역에서 인기를 끄는 테마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예 터부시되거나 혹은 가치가 낮은 관습적 작업으로 인식되는 여성 누드에 비해 썩 괜찮은 대접이다. 지은이는 여성의 누드에 비해 남성의 누드가 에로티시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효과적으로 억제된 대상으로 수용되기 때문에, 대중문화영역과 미술계 모두에서 인기를 끈다고 분석한다. 그렇다면 이는 레즈비언이나, 여성의 누드에서 새로운 감각을 찾는 여성들에게 또 다른 불평등인 셈이다.

지은이는 다음과 같이 현재의 상황을 정리하고 있다. “다만 남성 누드를 찾는 여성 관람객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오랜 시간이 지나 마침내 여성 자신이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게 된 것뿐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 주제를 다루는 권위 있는 여성 화가나 여성 사진가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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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로 가는 길 - 라사의 앞 못 보는 아이들, 개정판
사브리예 텐베르켄 지음, 김혜은 옮김 / 도서출판빗살무늬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시각장애인의 힘을 믿어보라
사브리에 텐베르켄의 《티베트로 가는 길》 서평

티베트 학을 전공한 독일의 한 시각장애인 여성이 티베트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티베트로 가는 길》의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러하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자칫하면 신문의 구석에 실릴 훈훈한 미담기사 정도로 여겨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티베트로 가는 길》의 지은이 사브리에 텐베르켄의 경험은 결코 미담의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독자들의 마음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자극한다. 시각장애인 스스로의 힘으로 다른 시각장애인들에게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리라는 강한 신념과,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꿋꿋하게 이겨나가려는 의지가 책 전반에서 흐르기 때문이다.

사브리에 텐베르켄은 10살 경에 시력을 잃었다. “사회가 시각장애인은 타인의 도움에 의지해야 하며 동정을 받아 마땅하다는 진부한 관념에 단단히 얽매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살지만, 그런 진부한 관념에 경쾌하게 응수할 줄도 아는 멋진 여성이다. 그녀는 시각장애인이 스스로 상황을 파악하고 일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일반인들의 편견에 반대한다.

“나는 소리, 냄새, 바람, 추위, 더위 등을 통해 얻은 모든 인상을 상상력을 총동원해서 바로 아주 구체적인 그림으로 옮겨놓는다.” 그런 그녀의 감각에 대해 사람들이 ‘실제’가 아니라고 평가할 때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눈으로 본 것이 귀나 코, 혀와 피부로 느낀 것보다 더 ‘실제적’이란 말인가?”

‘실제’를 파악하는 지은이 특유의 감각은 티베트라는 생경한 지역에서 살아가는 시각장애인의 삶을 독자들에게 잘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고산병을 조심해야 하고 말을 타면서 위험한 산길을 지나야 하는 티베트에서 그녀가 겪은 힘든 일들이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그녀가 겪어야 했던 가장 큰 고난은 무엇보다도 장애인 스스로 학교를 세울 수 있는가에 대한 사람들의 의심이었다. 한국도 그렇듯 그녀는 티베트와 독일 양국에서 장애인 운동을 장애인 스스로 하기 어렵다는 편견에 맞서 싸워야 했다.

티베트의 시각장애인들에게 그녀가 직접 개발한 점자를 가르치는 것이 그녀의 꿈이었다. 사실 장애인에 대한 일반적인 배려가 상당히 높은 편인 독일에서 태어난 그녀지만, 경제적으로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데다가 장애인을 위한 체계가 여러 모로 부족한 티베트 학을 전공하고 점자를 만드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티베트까지 혼자서 찾아가서 학교에 필요한 정책과 지원금을 논의하는 일도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모든 일을 잘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시각장애인 혼자서 그런 사업을 해낼 수 있을지 못미더워” 했다. 유럽의 장애인 협회에서 온 사람들은 그녀가 비전문적인데다가 학생들을 고향에서 ‘분리’해서 기숙학교로 데리고 오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사실 외관상 가족과 격리하는 방식은 문제가 많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시각장애인인 지은이 나름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판단이 담겨있다. 지은이는 ‘일반학교’에서 당한 놀림과 괴롭힘으로 인해 자신감을 갖지 못했으며 자기 능력을 발견할 기회를 갖지도 못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티베트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많은 시각장애인 아동이 집에서 방치되고 있는 실정인데다가, 인구밀도가 낮아서 집에서 학교로 통학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녀는 시각장애인 아동이 시각장애인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다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사회에 통합되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외에도 많은 문제들이 산적했다. 그녀가 가입한 독일의 협회는 그녀가 지나치게 규모가 큰 사업의 재량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다고 판단하고, 보고서 자체를 왜곡해서 그녀의 성과를 깎아내려 정부지원을 받기 어렵게 만들었다. 티베트에서 학교 일을 돕는 이들은 예산을 빼돌리고 있었으며, 가끔 찾아오는 이방인들은 제멋대로 사진을 찍고 촬영을 해서 그녀를 곤란하게 했다. 심지어 비자 연장을 허가 받지 못해서 티베트를 떠나야 할 상황까지 닥치기도 했다.

모든 고난을 돌파한 것은 지은이 자신의 낙천적이고 끈질긴 성격, 그리고 우연찮게 만나게 된 호의적인 사람들, 그리고 점차 발전해가는 학생들의 몫이었다. 결국 그녀가 시작한 시각장애인 학교는 보다 좋은 학교시설을 찾고, 그녀의 사업에 호의적인 협회와 만나면서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다. 그녀가 이룬 결실들은 장애인의 힘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는 사회적 편견을 지우는 하나의 선례가 될 듯싶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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