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면서 같은 - 교포 만화가 데릭 커크 킴의 섬세한 성장기록
데릭 커크 킴 지음, 김낙호 옮김 / 길찾기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한국계 미국소년의 솔직한 성장담
데릭 커크 김의 《다르면서 같은》 서평

“오리엔탈 맛이란 게 도대체 뭐지? 동양 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맛이 있다는 거야?” 슈퍼마켓에서 음식을 고르면서 한국계 미국인 사이먼과 낸시가 대화를 나눈다. 사이먼의 질문에 대해 낸시는 “간단해. 여기 닭고기 맛과 소고기 맛이 있지? 연역법에 의하면, 이 속에는 아마 동양인을 갈아 넣을 꺼야”라며 냉소적이면서도 발랄하게 답한다.

사이먼과 낸시는 시종일관 이 같은 분위기로 일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자연스러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을 건드리는 인상적인 장면들을 엮어나간다. 사이먼처럼 한국계 미국인 데릭 커크 김이 그린 만화 《다르면서 같은》은 미국 인디만화적인, 일상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블랙코미디적인 상상력이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경계인적인 정체성과 배합된 성장만화다.

중편 《다르면서 같은》은 우연한 기회에 고향을 방문하여 사춘기의 실수를 회상하는 소년의 후회를 그려낸 만화다. 사이먼은 친구 낸시와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살았던 고향 패시피카로 떠나게 된다. 낸시의 방으로 ‘벤 리랜드’라는 남자가 낸시 방의 예전 입주자 ‘사라 리차슨’에게 수없이 지독한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내왔는데, 낸시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벤의 마음을 받아들이겠다는 답장을 보내버린 것이다. 이들은 사이먼의 고향 패시피카에 밴 리랜드가 산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장난 삼아 패시피카로 향한다.

누구에게나 고향의 낯익은 거리와 동창들은 오래 지냈던 만큼 복잡한 감정을 유발한다. 사이먼은 패시피카를 “자기 고등학교에서 단 1마일도 떨어지기 싫어하는 비참한 교외거주 인생패배자들의 집합소”라며 비하한다. 학창시절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동창 에디는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은 상태로, 오랜만에 만난 사이먼에게 반갑게 인사한다. 사이먼은 “에디란 녀석은 학창시절 내내 나랑 내 친구들을 괴롭혔어… 이제는 오랫동안 헤어진 친구인 양…. 이해가 안 가”라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한다.

사이먼의 복잡한 감정은 슈퍼마켓에서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시각장애인 여자친구 아이린을 마주치면서 절정에 달한다. 사이먼은 아이린과 친하게 지냈지만 ‘자신이 다른 데이트 상대를 못 찾았다고 생각할까봐’ 속 보이는 거짓말을 해가면서 아이린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한다. 하찮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친구에게 상처를 준 그 사건은 사이먼에게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남아있다.

슈퍼마켓에서 간신히 용기를 내어 아이린을 쫓아간 사이먼에게 아이린은 자신의 이야기를 해준다. 아이린은 어렸을 때 도자기를 깼는데 ‘물건을 깨는 애’로 보이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 때문에 엄마에게 자신이 깨지 않았다고 계속 우겼다. 아이린의 엄마는 아이린에게 ‘거짓말을 알아차리는 괴물이 있는 종이봉투’에 손을 넣어보라고 권한다. 아이린에게 겁을 주어서 잘못을 실토하게 만들 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린은 손을 집어넣고서도 깨지 않았다고 우겼고 그녀의 엄마는 실망한다. 아이린은 사이먼에게 “그 이후 난 계속 정직하게 살았어”라고 말한다. 거짓말을 끝내 실토하지 않았던 그 경험이 오히려 그녀를 진실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한편 ‘괴물 혹은 변태’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벤 리랜드는 평범하고 친절한 아시아계 남자였다. 기대와는 다른, 자신의 초라함과 대면하는 경험을 겪은 후 사이먼과 낸시는 해가 저무는 해변가에서 현재의 불안한 심경을 나눈다. 물론 《다르면서 같은》은 지극히 현실감 나는 세계를 그리는 만화인 만큼, 사이먼과 낸시의 고민 또한 자신의 경험에 삶의 전 의미를 거는, 심각하고 진지한 수준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아이린의 거짓말 이야기에 충격을 받은 데다가 동창들의 결혼 소식까지 접한 사이먼은 “내가 7년 전에 사춘기적인 거짓말이나 늘어놓던 패배자 그대로일지 몰라서 두려워. 지금은 좀 달라졌을까?”라고 고민하고, 낸시는 이에 대해 “자아도취 호로자식 그 자체구나”라며 한 대 쏘아주고서는 ‘계속 친구가 되 주겠다’며 슬쩍 위로해준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일상의 순간들 가운데 인상적인 상황을 뽑아내어 담백하게 처리하는 데릭 커크 김의 탄탄한 솜씨는 다른 단편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Pulling’은 친구와 잡초를 뽑는 일상적인 사건과 주인공이 애인과 헤어지게 되었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괴로운 심경을 오버랩 시켜서 담아냈다. ‘휘발유’는 주유소에 언제 들리는가의 문제로 미묘하게 다툰 부부의 모습을 통해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어긋나기 쉬운 인간관계의 불완전함을 포착해 낸 수작이다.

재치 넘치는 상상력이 돋보이는 만화들도 있다. 연애를 하지 못하는 불만족스러움부터 자살충동까지 심각한 감정들을 장난치듯이, 그러나 정확하게 다루는 ‘올리버 픽’은 21세기적 부조리극 같다. ‘똥침’은 작가가 느낀 한국과 미국의 문화 차를 잘 보여주는 만화인데, 한국에 와서 말이 통하지 않아서 괴로운 데다가 결정적으로 화장실이 미국과 너무 달라서 애먹었던 상황을 하느님에게 똥침을 당하는 코믹한 설정으로 그려냈다. 작가는 미국에서 한국인으로 살면서 오리엔탈리즘 때문에 겪게 되는 불쾌한 상황을 잘 그려내면서도 섣부른 민족주의로 빠지지 않는다.

《다르면서 같은》은 소년의 남성적 자의식을 감춤 없이 내보이는 만화이기도 하다. ‘아시아계 남자가 새천년의 섹스 심벌이 될 것이다’라며 떠벌리지만 집에서 홀로 포르노테이프를 보는 모습이나, 한국에서 마르고 왜소한 외모 때문에 여자들에게 인기 없어서 괴로웠다고 토로하는 장면들은 솔직 담백하다. 어른이 된 후에 고등학교 시절의 신문을 훑어보면서 자신의 글의 미숙함을 그제야 깨닫고 좌절하는 에피소드 또한 재미있다.

또래 여자아이들이 쓴 글이 감동적이고 진지했다는 점을 지금에서야 알았다고 후회하며 “내가 스파이더맨의 결혼생활이나 대중소설들의 섹스코드나 신경 쓰고 있는 동안, 진짜 삶, 진짜 사람들이 옆을 스쳐 지나간 것이다. 나는 정말 멍청이였다”라고 고백할 줄 아는 힘은 《다르면서 같은》을 매력적으로 만든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 www.ildaro.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픈 아이들의 세대 - 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우석훈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서울을 떠나라”
우석훈의 《아픈 아이들의 세대》 서평

서울에서 아토피로 고생하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3~4월의 황사는 날로 강도가 심해지고 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서울의 대기 오염이 점차 심해지고 있는 것 같다. 서울의 대기 상태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물론 군데군데 대기 오염을 측정하는 센서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파편적인 수치들을 가지고 서울이 당면한 상태를 진단하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생태경제학을 전공했으며 초록정치연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석훈씨가 쓴 《아픈 아이들의 세대》는 부모들에게 아이를 위한다면, 어서 빨리 서울을 떠나라고 권유한다. 현 상태대로 개발이 진행된다면, 새로 태어날 아이들이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아토피를 비롯한 각종 유아질환에 시달릴 “아픈 아이들의 세대”가 된다는 것이다.

서울을 떠나라는 갑작스런 권유는 당혹스럽다. 그러나 지은이는 그에 대한 근거를 조목조목 제시한다. 이 책의 장점은 환경오염의 구체적인 정도를 서울, 나아가서 한국 전체에서 이루어지는 건설 및 경제정책의 문제점과 연결 지어 쉽게 설명한다는 것이다.

도시건설은 ‘생명 없는 발전’

우선 지은이는 피엠텐(PM10) 수치를 설명한다. 피엠텐은 10마이크로미터 미만의 미세입자들로, 주로 자동차 배기가스에 섞여있고 공사장 주변에서 날아오기도 한다. 지은이는 집에서 기르던 화분들이 집단폐사상태에 처한 사건 때문에 서울 피엠텐 현상의 심각성을 깨닫게 됐다. 화분들은 수건으로 닦아주자 다시 살아났다. 피엠텐은 기준치에 도달해야 인체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오염물질과는 달리, 아무리 미량이라도 인체에 축적돼 보건상의 피해를 낳는 무서운 물질이다.

지은이는 피엠텐 현상이 심각할 수밖에 없는 서울의 환경 상태를 둘러본다. 서울은 피엠텐 오염도가 OECD 가입국 중에 단연 1등이다. 서울의 인위적인 녹지란 녹지로서의 기능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한다. 서울시에서 생태 운운하며 실시한 청계천 복원사업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상류지역의 복원이 없는 만큼 청계천에는 고도 처리한 생활하수와 지하철 역사에서 나오는 지하수가 흐르게 되는데, 이 생활하수에는 ‘환경 호르몬’에 해당하는 수많은 물질들이 섞여 있다.

또한 청계천 인근은 모두 고밀도 개발이 이루어질 예정인데, 이 재개발은 엄청난 피엠텐을 양산할 것이다. 현재 서울시는 각 구청마다 25개의 뉴타운 사업과 8개의 강남북 ‘균형발전 촉진지구’가 동시에 착공할 예정이다. 여기에 1천 개에 달하는 소규모 재개발사업까지 진행된다면, “서울에서 아이를 키워도 좋은 곳은 없다”.

‘서울형 스모그’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지은이는 다양한 부분에서 환경오염의 원인을 찾는다. 크고 넓고 편리한 ‘뉴욕 스타일’이 추구되다 보니 한정된 생태조건을 지닌 서울이 과부하를 겪는다. 또한 아파트를 선호하는 한국만의 특수한 스타일은 도시건설자본의 고층 아파트 건설 및 상업용지 전환을 촉진한다.

무늬만의 녹지를 남겨놓은 채 아파트가 계속 늘어나는 서울. 지은이는 이를 가리켜 ‘생명 없는 발전’이라고 비판한다. 서울은 강원도의 댐에서 물을 공급 받고, 서해안 근처에 쓰레기를 매립하며, 도시 외부의 생명을 끊임없이 위협할 뿐만 아니라, 무분별한 개발 때문에 내부의 생명까지도 위협하는 공룡과도 같다는 것이다.

생명을 화두로 삼은 경제론 필요

도시개발만이 문제가 아니다. 지은이는 이경해 전 한국농업경영인 중앙연합회 회장의 자살 이후, 농림부가 농민을 “달래기” 위해 실시한 농촌정책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음을 폭로한다. 농림부는 세계화 시대의 경쟁에 뒤쳐지지 않게 ‘전문농업’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 주장과 함께 농지법을 개정해 전체 농지의 50%정도만 절대농지로 보전하고 나머지 땅에는 전면적인 개발을 허용하려고 한다. 그러나 개발 허용은 골프장과 카지노 건설로 이어질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물론 건설경기가 살아나야 경제가 나아진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지은이는 건설과 빈곤과의 관계를 설명하여 뉴딜정책의 허구성을 폭로한,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쿠즈네츠의 이론과 그에 기반한 통계수치를 빌어서 그 같은 관념을 반박한다. 국내 총생산(GDP) 가운데 대부분의 정상적인 국가들이 8~15%를 건설부분에 사용하는 데 반해 한국은 24%나 사용한다.

그런데 1인당 국민소득과 국내 총생산 대비 건설업 매출 비율을 살펴보면, 건설업 매출이 과도할 경우 경제위기가 발생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 한국 상황은 부동산 투기 붐이 일어났던 미국의 대공황 직전과 오히려 유사하므로, ‘한국형 뉴딜’ 정책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것은 억지다.

지은이는 현 한국사회의 경제 담론이 “외형적으로는 뉴욕의 맨해튼에 근무하는 금융기업 종사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내용상으로는 악덕 부동산업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고 비판한다. 때문에 건설에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경제를 위해서라도 ‘생명’을 화두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생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체들은 환경질환으로부터 아이를 지키고자 하는 어머니들이다. 지은이는 어머니들이 이 시대의 모순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지적하며, 아버지 또한 생명의 감수성을 가지고 ‘생명’을 지키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늘어나는 평균수명에 대책을 세우자고 호들갑을 떠는 한편 살아있는 동안 며칠이나 아프지 않을까를 생각해야 하는 다음 세대를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사회”라는 지은이의 지적이 통렬하게 다가온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 www.ildaro.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네코 후미코 -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
야마다 쇼지 지음, 정선태 옮김 / 산처럼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식민지 독립운동에 함께한 일본인 여성
야마다 쇼지의 《가네코 후미코》 서평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 일본인이자 조선인 독립운동가를 사랑했으며, 천황제에 반대하기 위해 황태자에게 폭탄을 던지려 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언도를 받은 여자 가네코 후미코를 소개하는 말이다. 그녀는 일본 내에서는 천황제를 반대했다는 전력 때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한국에서는 식민지 조선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공동투쟁을 계획했다는 점 때문에 상당한 관심을 받아왔다.

가네코 후미코는 어떻게 일본인이라는 선험적 조건을 뛰어넘어 식민지 조선에 공감하게 되었을까. 지은이 야마다 쇼지는 가네코 후미코의 험난한 삶의 여정에서 원인을 찾는다. 가네코 후미코는 비록 일본인이었지만 “일본의 식민지화 첨병집단으로부터 소외”된, “억압하는 쪽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였다. 야마다 쇼지는 가네코 후미코가 감옥에서 자살하기 직전 남긴 자서전과 재판기록, 후미코의 친척 및 친구 인터뷰를 통해 가네코 후미코의 삶과 사상적 변화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지은이는 후미코의 양친 체험이 그녀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기초가 된 가장 기본적인 원체험이라고 말한다. 아버지 사에키 분이치는 후미코를 낳은 후에도 어머니 가네코 기쿠노를 호적에 올리지 않았으며, 유곽에 출입하는 등 가정을 등한시하다가 결국 기쿠노와 딸 후미코를 버렸다. 어머니 또한 딸 후미코를 “창녀”로 파는 것을 고려하는 등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두었다.

후미코는 그 충격에 대해 “아버지는 나에게서 도망쳤으며 어머니 또한 이렇게 나를 버렸다. 어린 나이기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자신의 신세를 슬프도록 저주했다”고 술회한다. 또한 그녀는 호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학교에 어렵게 입학했으며 입학 후에도 차별 받아야 했다. 이는 불합리한 국가질서에 대한 비판의 출발점이 된다.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데도 무적자라는 이유로 그 현실에서 살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게 법률입니다.”

후미코는 양녀가 되어 친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조선으로 떠난다. 할머니 사에키 무쓰는 후미코가 가난한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농사일을 배우는 것을 반대하는 등 권위적이고 인정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할머니에게 고집이 센 후미코가 마음에 들 리 없었다. 후미코는 부엌일을 도맡아서 했지만 용돈 한번 받지 못했으며 일상적으로, 별 이유 없이 학대를 당했다. 한때 후미코는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나처럼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고통을 가하는 사람들에게 복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죽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하고 자살을 포기한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와서도 아버지가 그녀를 제멋대로 돈이 많은 외삼촌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하는 등 후미코의 고난은 그치지 않았다.

이처럼 고단한 유년을 보냈기 때문에 후미코는 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을 꿈꾸었다. 그녀는 집을 뛰쳐나와 고학을 하면서 당대 일본사회를 풍미하던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하게 된다. 그러나 후미코가 사귀게 된 남자들은 대체로 무책임했으며 그 결과 후미코는 인간성 자체를 불신하게 된다. “나는 지금껏 너무나 많은 사람의 노예로 살아왔다. 너무나 많은 남자들의 장난감이기도 했다.”

자신의 ‘자아’를 확립하기를 갈구하던 후미코는 조선인 활동가 박열을 만나게 된다. 박열은 약육강식 관계가 사라지기 위해서는 일본의 제국주의뿐만 아니라 사회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던 허무주의자였다. 그녀는 일본인 사회주의자들보다 훨씬 진지했던 조선인 박열이 근대의 제국주의적 세계관 자체를 제거할 수 있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박열과 동거생활을 시작하면서 “동지로서 함께 살 것이며 자신이 여성이라는 관념을 제거할 것”을 약속 받는다. 그녀는 ‘연약한’ 여성으로 간주되는 것을 거부했으며, 종속적인 관계 또한 벗어나고자 했다.

후미코와 박열은 조선인의 투쟁을 널리 알리는 잡지 《흑도》, 《뻔뻔스러운 조선인》 등을 발행하고, 당시의 사회에 ‘반역’하는 사람들의 대중조직 ‘불령사’를 결성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 물론 이들의 나이가 젊은 만큼 조직은 탄탄하지 못한 편이었으며, 특히 박열의 활동은 자기과시적인 혁명적 로맨티시즘의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었다.

박열은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을 통해 폭탄을 입수할 계획을 짰으나 실패로 돌아가는데, 이 폭탄입수 모의는 박열과 후미코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 관민이 합심하여 조선인들을 학살했는데, 이 어처구니없는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해진 것이다. 박열과 후미코는 황태자를 암살하여 한 ‘불령스런 조선인’으로 몰려 재판을 받게 된다.

당대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 천황제가 문명개화를 선도했다는 이유로 천황의 권위가 매우 높았다. 또한 이 문명개화의식은 조선을 포함한 아시아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의식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인의 폭탄투척은 대역죄로, 사형이 확실했다. 그녀가 사형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천황제를 인정하는 ‘전향’을 해야 했다. 그러나 전향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라 생각한 후미코는 재판을 자신의 사상을 펼칠 장으로 삼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2년여의 재판기간 동안 “나는 안에서 타오르는 참된 질서 외에 국가나 정부의 간섭을 거절하고 싶다”고 외쳤다. 사형언도 후 천황의 “은사”를 통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그녀는 석 달 후 자살하고 만다. 아마도 형무소에서 계속되는 전향 권유와 심한 검열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저는 일본인이긴 하지만 일본인이 너무 증오스러워 화가 치밀곤 합니다…. 저는 정말이지 이런 운동(조선독립운동)을 속 편하게 남의 일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습니다.”

가네코 후미코처럼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 공감하고 독립운동에 함께하려 한 일본인은 거의 없었다. 또한 여성으로서 ‘조선사람과 결혼해서 불쌍하다’는 세간의 인식을 무릅쓰고 박열을 사랑하였으며, 가부장적인 당대 사회의 관습을 벗어나서 평등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 또한 그녀를 돋보이게 한다. 비록 그녀가 일찍 죽은 까닭에 그녀의 아나키즘적 사상은 이론적으로 확실하게 정립되지 못했으나, 한 명의 실천가이자 억압 받은 여성으로서 부단히 자신의 삶을 점검하여 내면에서 우러나는 참된 자아를 따라 살고자 한 그녀의 삶은 여전히 많은 점들을 시사한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 www.ildaro.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축! 속도위반결혼
타카시미즈 미네코 지음, 우니타 유미 그림 / 길찾기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뭐 임신이라고?!!
만화 《축! 속도위반결혼》 서평

임신, 결혼, 육아는 많은 여성들의 일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런 문제와 관련된 정보들은 그냥 읽기만 해도 부담스러울 때가 많다. 장기간 계획을 짜서 결혼하는 것을 정석으로 삼거나, 엄마가 아이의 곁에 붙어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결혼에 드는 비용 문제를 지나치게 높게 잡는 등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듯한 분위기 때문이다.

《축! 속도위반결혼》은 갑작스레 결혼하게 된 어느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예외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결혼 이야기를 풀어낸다. 《축! 속도위반결혼》이라니, 언뜻 보기에는 TV드라마 같은 제목이지만 정보가 쏠쏠하다. 이 만화는 ‘속도위반’ 결혼을 하게 된, 평범한 여성과 남성인 유키와 라이타의 여정을 쫓아가며 임신, 결혼, 출산 및 육아에서 부딪치게 되는 상황들을 제시하고, 알아두면 좋은 정보를 담고 있다. 또한 ‘속도위반결혼’과 관련된 여러 가지 설문조사들이 요즘의 결혼풍속도를 잘 보여준다.

실수로 배란주기를 잘못 계산하는 바람에 갑작스레 임신을 하게 된 유키. 유키는 어렵사리 약국에서 임신진단시약을 사서 임신 사실을 확인한 후 라이타와 함께 병원에 찾아간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는 유키와 라이타는 정신이 없다. 한창 직장생활 중인 유키는 회사문제, 돈 문제, 부모님 문제로 불안하다. 라이타는 애 아빠가 된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밴드생활을 하고 있는 처지라 터무니없이 작은 월수입이 신경 쓰인다.

이들의 낯섦과 불안은 상당히 일반적인 반응이다. “아이가 생겼을 때 당신은 어떤 상황이었나요?”라는 설문에 대해, 절반 이상이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때 생겼다’라고 답했다. 흥미로운 결과 중의 하나는, “임신했다!!고 알았을 때의 심정은?”이라는 질문에 대해 일본의 경우 ‘기뻤다’라는 답이 23%나 달하는 반면, 한국은 7%에 그쳤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분위기 상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임신할 경우 여전히 부담스럽고 걱정된다.

결혼하기로 합의한 유키와 라이타는 부모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결혼을 준비한다. “부모님이 반대하는 경우의 설득법”, “그래도 반대한다면, 가족 중 누군가를 한 편으로 만들 것”과 같은 간단한 팁이 이들의 이야기에 곁들여진다. 임신한 유키가 회사생활에 필요해서 찾게 되는 ‘임부의 법적 권리’와 같은 정보도 꽤 쏠쏠하다. 물론 이 같은 정보는 “일단, 법률상 그렇게 되어있다”는 전제가 있긴 하다. 한편 “임신 중의 섹스, 어떻게 했나요”라는 팁을 통해 임신 중 섹스에서 주의해야 할 점도 가르쳐 준다.

이제 결혼을 준비하는 이들. 모르는 것투성이다. 혼례 스타일은 어떻게 해야 하고 장소는 어디서 해야 하며, 같이 살 집을 구하는 문제도 어렵다. 좌충우돌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다양한 방식의 결혼식이 소개되고, 반드시 남들이 하는 것처럼 형식에 꼭 맞춰서 하지 않고 간단하게 끝낼 수 있는 방법도 제시된다. 이 책은 결혼 상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면 후에 자기주장을 하지 못하므로, 동등한 입장을 유지하라는 충고도 빼놓지 않는다. 특히 임신한 유키가 사이즈 조절 가능한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장면이나, 건강을 위해 보다 유리한 회사부서이동을 포기한 후 ‘세상에 뒤처지는 것 같아서’ 우울증에 걸리는 장면은 눈길을 끈다.

유키는 아이를 낳고 육아를 시작한다. 여러 산모의 솔직한 출산 체험담은 흥미롭다. 아이 기르는 일이 피곤하다는 건 이미 《비빔툰》같은 만화에서 많이 그려진 바 있다. 여기에 《축! 속도위반결혼》은 “남편의 육아참여”라는 장을 따로 설정해서 남편을 육아에 참여시키는 방법에 대해 소개한다.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육아의 현장에 들어온 라이타는 깜짝 놀라지만, 분유를 준비하는 기본적인 일부터 배워나간다. 남편은 산모의 고생을 잘 알지 못하는 반면 육아는 ‘잘 틈도 없는 상황’이므로 가능하면 남편을 육아에 많이 참여시켜야 한다고 권유된다.

이 책의 장점은 상식적인 정보를 담고 있으면서도 여성의 생각과 결정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것이다. “속도위반결혼에서 힘들었던 점”에 대한 조사 결과에서 “주위의 반응”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경제적인 문제나 직업 문제도 어렵지만, 가장 힘든 것이 속도위반결혼에 대한 편견이라는 점이다. ‘출산대란’을 걱정하기 전에, 갑작스레 닥친 임신에 대해 여성이 어렵게 내린 결정을 존중하는 성숙한 분위기가 필요한 것 같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 www.ildaro.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쟁과 학교 - 학교는 어떻게 아이들을 전장으로 내몰았나
이치석 지음 / 삼인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반공교육을 기억하십니까?
《전쟁과 학교》 서평


얼마 전 교육부가 학교를 전시체제에 대비하는 시스템으로 짜고 있었다는 내용의 공문이 밝혀져서 논란이 됐다. 그런데 한국의 학교는 전시체제, 즉 전쟁과 관련이 없는 교육의 산실로 존재한 적은 거의 없다. 지금은 사라진 ‘국민학교’라는 단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국민학교’는 ‘국민교육헌장’과 함께 ‘반공국민’을 교육하는 곳이었다. ‘국민학교’에서 매달 이루어지던 수많은 반공포스터와 반공글짓기 행사들, 그리고 ‘영웅 어린이’로 되새겨지던 이승복 어린이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학교가 국가주의를 주입하고 전시체제를 대비하는 훌륭한 수행자였다는 혐의를 지우기 어렵다.

《전쟁과 학교》의 지은이 이치석은 학교에 뿌리 깊게 내린 전쟁과 국가의 흔적에 대해 깊이 반성하는 의도에서 책을 쓰게 됐다고 밝힌다. 지은이는 이 땅에 처음으로 미션 스쿨의 형태로 근대적 학교가 세워진 이후 학교는 ‘국민 만들기’에 일관하면서 청일전쟁, 러일전쟁, 양차대전, 그리고 한국전쟁에 이바지해왔다고 지적한다. 학교는 철저하게 국가에 의해 국민을 동원하고 나아가서 전쟁에 동원될 군인들을 양성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근대적 시스템이 그렇듯, 전쟁과 학교의 연관성 또한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간다. 일본은 겉으로는 내지인과 조선인을 같게 만드는 동화정책을 펼쳤으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내지인과 조선인이 같아질 수 없는 차별정책이 다분했다. 중일전쟁 이후 태평양전쟁에 돌입한 일본은 군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식민지 조선인들을 군인으로 양성하기 위해 교육 시스템을 개편하고 교과서 내용을 바꾸어 충실한 ‘황국 신민’으로 만들려고 애쓴다. ‘황국신민’은 학교교육이 목적하고 상징화한 대표적인 인간유형이다. 그 결과 수많은 ‘죄의식 없는 악인’들이 탄생되어 전쟁에 참여했다.

‘국민학교’라는 이름도 일제 말기에 탄생한 이름이다. 책에 따르면 ‘국민학교’는 파시즘 교육체제의 완성을 목표로 했다. 당시 학교 풍경은 군대 그 자체였다. 천황경배와 황국신민서사, 애국훈화로 구성된 애국조회시간이 그 예다. 또한 체조, 복장검사, 무도연습 등을 통해 학생들의 집단의식을 강조했다. 또한 강한 남성상과 현모양처의 여성상으로 남성과 여성을 분리해서 지도했다. 특히 황국신민체조는 일본 고유의 무사도를 가르치는 의식으로, 국민정신함양에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별 다른 거부감 없이 일상화된 황국신민의 의식화를 지도했으며 많은 한국학생들은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답게 한일합방을 미화하는 정신 상태를 지니게 됐다.

해방 이후의 학교 풍경도 일제시대의 학교체제를 그대로 계승했다. 남한의 미군정 교육은 내용만 친미로 바꾸었을 뿐 대부분의 교육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또한 미군정은 “영어과목이 바로 친미교육을 상징하며 이것이 바로 미군정의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사회화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며 영어를 제2국어로 삼았다. 이를 기점으로 영어는 대학입시를 위한 중고등학교 필수과목으로 결정되고 학교교육의 핵심위치를 차지한다. 소련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북한에서 탈문맹화가 이루어진 시기는 국가에 충성을 바치는 ‘국민’과 ‘인민’의 종자가 뿌리내리던 시기와 일치한다. 이제 일제의 친일국민은 대한민국의 반공국민으로 계승됐다.

반공교육은 미국에 대한 환상과 북한 공산당에 대한 증오심을 만들어냈다. 특히 반공주의는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사라진 것으로 한국인의 집단정신에 매우 뿌리 깊게 남아있다. ‘국민정신교육’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반공교육에서 북한 공산군의 잔인한 짓은 매우 과장되어 그려져서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라는 반응을 절로 이끌어낸다. 반공화보전시, 반공포스터 전시, 반공표어 및 계몽, 반공웅변으로 이어지는 수 많은 행사들은 마치 학교가 미래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특히 이승복 어린이의 이야기는 매우 비인간적이고 반교육적임에도 불구하고 매해 전승되었다. 지은이는 이승복 이야기의 잔인함이 전쟁폭력의 본색을 드러낸다고 지적한다.

한편 학교와 전쟁,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 것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빼놓을 수 없다. 지은이는 양차 세계대전과 교육문제를 통해 한국의 학교풍경을 읽어내는 데 도움을 얻고자 한다. 1차 세계대전은 유럽을 휩쓴 민족주의의 결과물로, 학교 또한 이를 피할 수 없었다. 1913년에 발간된 프랑스의 초등학교 역사 교과서에서는 전쟁 이야기가 판을 쳤다. 모든 역사는 전쟁과 살육을 중심으로 기술되었다. 조국을 위해 피 흘리는 어린이들의 뜨거운 삶이 아동문학에 다수 등장하였다. 특히 당대에 호응이 높았던 ‘영웅 어린이’는 원초적 폭력에 빠진 어린이로, 학교 군사교육의 극치였다. 어린이들은 적을 증오하며 괴물로 간주하는 사명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게 됐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죽을 때까지 싸운다’는 기치를 내건 히틀러 유겐트가 유명했다. 이들 청소년은 히틀러의 군대와 다름없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실제로 전선에서 학생들은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지은이는 이 시기가 ‘학교가 학교로서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린 시기’라고 주장한다. 학교는 새로운 세대를 교육하는 장이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국가가 수행하는 전쟁에 학교가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전쟁이 새로운 세대의 발목을 잡는 비극이다. 이 비극을 멈추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학교와 전쟁의 뿌리 깊은 연관성과 그 잔재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 www.ildaro.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