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을 막는 방파제 1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정란 옮김 / 새움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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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머니의 시선을 통해 본 식민지 현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 서평


권태로운 삶을 바꾸기 위해 프랑스령 식민지 베트남으로 떠난 어머니. 남편이 죽은 후 그녀는 15년간 극장의 피아니스트로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식민지 관리국으로부터 농사를 지을 땅을 불하(국유나 공유 재산을 개인에게 파는 것)받았다. 그녀는 그 땅을 두 자식에게 물려주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가 산 캄 평원의 땅은 단 5헥타르를 제외하고는 매해 바닷물이 범람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농사가 가능한 5헥타르에는 이미 그들이 살 방갈로를 지어버렸다. 알고 봤더니 그녀의 가족에 앞서, 이미 네 가구가 그 땅을 불하받은 후 파산하거나 죽어버렸다. 식민지 관리국에 뇌물을 찔러주지 않은 탓이었다.

궁지에 몰린 그녀는 통나무로 방파제를 짓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매해 범람하는 평원에서 겨우 살아가는 농부들 앞에서 방파제만 지으면 모든 일이 해결된다고, 더 이상 사기만 치는 관리국에 끌려 다니지 않아도 되며, 불결함과 전염병 때문에 태어나는 만큼 죽어가는 수많은 아이들을 방치해도 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녀는 미처 다 짓지도 못한 방갈로를 저당 잡혀 간신히 은행에서 돈을 대출 받아 모든 재료를 구입했다. 그러나 통나무를 재료로 쓴 데다가 주먹구구식으로 지은 허술한 방파제는 금새 바닷물에 휩쓸려 사라지고 만다.

이제 어머니에게는 자긍심을 지닐 만한 그 어떤 것도 없다. 그녀는 방파제를 짓기 위해 장부를 뒤적거리며 고민하고, 자식들이 싫어하는 맛없는 섭금(얕은 물에서 먹이를 찾는 다리가 긴 새) 고기의 영양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며, 가끔 과거의 안온했던 나날들을 회상한다. 그리고 그녀의 두 자식, 조제프와 쉬잔은 지독한 더위 속에서 자신을 도시로 데려가 줄 여자 혹은 남자를 기다린다.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발표한 세 번째 소설이자 첫 번째로 내놓은 자전적 소설인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는 식민지의 궁벽한 시골에서 가난에 내몰린 채 살아가는 세 가족의 애증 어린 모습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이 책과 《연인》, 《북중국의 연인》은 자전적 소설이며 성인남성과 사춘기 소녀 사이의 미묘한 성적 관계라는 비슷한 모티브를 다룬다). 또한 뒤라스 특유의 서정적이고 아름다우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관능적인 감정들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스타일이 빛을 발한다.

부르주아 가족 이미지처럼 안락하고 평탄하게 삶을 살기를 원했던 어머니는 사기와 배신, 가난과 무능력, 자책에 짓눌리면서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흡수해버린 기괴하고 슬픈 괴물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방파제에 집착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차피 패배로 끝나버릴 지라 하더라도 단지 숨을 쉬며 살기 위해서 희망이 필요한, 극도의 절망에 몰린 인간의 자화상 그 자체다. 자식들은 방파제에 대한 쓸데없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조금은 미친 듯한 어머니의 품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들이 떠나면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는 어머니가 죽을 것 또한 알고 있다.

이들의 상황에 변화를 가져오는 존재가 예쁜 쉬잔에게 접근한, 부유한 남자 무슈 조다. ‘처녀’ 쉬잔의 미모와 무슈 조의 부가 맞교환되면서, 세 가족에게 변화가 불어온 것이다. 소심하고 어리숙한 무슈 조는 쉬잔의 손을 잡거나 그녀를 껴안는 대신 그들 가족에게 샴페인을 대접한다. 암묵적으로 허용된 성매매인 셈이다. 작가는 쉬잔을 그와 결혼시켜서 한몫 잡으려는 어머니와, 쉬잔과 딱 한번이라도 자고 싶어하는 무슈 조 사이의 신경전을 능숙하게 그려내어 상황 자체가 추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그 상황을 둘러싼 인물들의 절박함을 통해 어떤 절실한 감정 또한 전달한다.

무슈 조에게 알몸을 보여준 대가로 축음기를 선물 받고 급기야 다이아몬드 반지까지 얻어온 쉬잔, 혹시 쉬잔이 무슈 조와 성관계를 가진 게 아닌지 의심하면서 쉬잔을 마구 때리는 어머니,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이 역겹다는 것을 잘 아는 조제프. 이들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팔기 위해 도시로 떠나지만 결코 기쁘지 않다. 돈이 생겨봤자 또다시 어머니가 식민지 관리국, 은행과 서신교환을 하며 화를 내는 지루한 상황이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후반부는 시골을 떠나온 조제프와 쉬잔의 성장을 더 비중 있게 다룬다. 조제프와 쇠잔은 비슷한 상황을 공유하고 있기에, 근친상간에 가까울 만큼 밀도 높은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이 어머니와의 분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공간은 낯선 사람들이 모여드는 도시의 극장이다. 극장의 낯선 화면에 빨려 드는 행위는 그들에게 유일한 위안이며, 어머니와는 분리된 대도시라는 낯선 시공간이 던지는 충격을 중화해주는 장소다. 한편 어머니와의 분리는 타인과의 성관계로 시작된다. 조제프는 극장에서 알콜 중독인 남편과 함께 다니는, 조금은 지친듯한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벗어나도록 만든 원인이 그녀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었다고 쉬잔에게 숨김없이 고백한다.

한편 쉬잔은 극장을 다니면서 결코 상류층 백인들에게는 인기를 끌 수 없는, 가난한 백인 여자인 자신의 처지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또한 전 세계를 다니면서 실을 팔러 다니는 어느 성실한 세일즈맨의 구애를 받으면서, 예쁜 외모를 지닌 ‘처녀’인 자신의 상품가치를 확인한다. 자신의 가슴을 만지며 ‘사랑한다’고 외치는 무슈 조의 손이나 세일즈맨의 구혼이나 그녀에게는 별 다를 바 없다. 작가는 그들이 머무는 호텔에서 일하는 성매매 여성들에 대해 차분하고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는데, 아마도 쉬잔을 비롯한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일시적으로라도 성매매를 하게 되는 상황에 대한 고민이 녹아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후에 쉬잔은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곳의 유일한 남자인 아고스티와 관계를 가지면서 어떤 변화를 체험한다.

이제 성장한 자식들은 식민지 관리국에 대한 어머니의 외롭고 질긴 투쟁을 조용히 거둬들이고 싶어한다. 이 애증 어린 관계는 어머니가 "난 누굴 위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힘없이 읊조리는 순간 종지부를 찍는다. 조제프는 어머니가 관리국에 보낸 편지를 숨겼다가 쉬잔에게 넘긴다. 그 편지는 식민지 관리국이 어떻게 돈을 불리고 있는지, 식민지에 희망을 품고 건너온 가난한 백인들과 ‘원주민’들을 어떻게 착취하는지를 폭로하고 있다. 식민지 관리국은 절대로 방파제를 짓지 않으며 병원 하나 만들지 않는다. 대신 비포장도로를 깔아서 부유한 백인들이 사냥하도록 만드는 데 급급하다.

쉬잔의 어머니는 결코 식민지의 비참한 현실을 투쟁적으로 비난하는 위치에 서 있지 않았지만, 식민지 관리국에 의해 어이없이 속고 착취당했다는 점에서는 ‘원주민’들에 가깝다. 때문에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는 직접적인 비판은 아니지만, 어머니의 시선을 통해 식민지의 뒤틀린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캄 평원의 무기력한 풍경, 죽어가는 아이들에 대한 묘사나 두들겨 맞으면서 비포장도로를 건설한 에피소드는 실감을 더해준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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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좋아한 적 없어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체스터 브라운 지음, 김영준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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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건조하고 쓰디 쓴, 소년의 성장기
체스터 브라운의 《너 좋아한 적 없어》 서평


체스터 브라운의 《너 좋아한 적 없어》는 상당히 보기 드문 스타일로 소년의 성장을 솔직하게 다룬 만화다. 체스터 브라운은 1980년대 등장한 캐나타의 얼터너티브 만화의 선두주가로 꼽히는 작가로, 언뜻 보기에도 판화처럼 검은 배경 위에 몇 개의 하얀 칸으로 전개하는 방식이나 가는 선으로 그려진 다소 그로테스크하고 힘없이 보이는 인물들의 모습은 영미계열의 인디만화라는 인상을 풍긴다. 괴기스럽고 특이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다른 작품과는 달리 《너 좋아한 적 없어》는 극도로 사실적인 상황을 절제미 있게 연출한다.

일상적 폭력과 의사소통의 단절 드러내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임을 확실하게 표시하기 위해서일까, 작가와 주인공의 이름은 같다. 체스터는 지방의 중소도시로 여겨지는 어느 마을에서 살고 있다. 그는 키스와 레드 제플린의 음악을 좋아하고 그림을 그린다. 그는 ‘졸라’, ‘씨발’과 같은 욕은 모자라고 무식한 사람들이 쓰는 거라고 충고하는 어른스러운 이웃집 친구 코니의 말을 듣고, 그 말을 쓰지 않겠다고 학교에서 선언했다가 친구들에게 놀림 당할 정도로 소심하다.

코니의 동생 캐리는 이런 체스터가 좋아서 차고에 ‘체스터가 좋아’라고 쓰고, 설거지를 도와달라고 그를 부르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지만 정작 체스터는 가슴이 크고 섹시해 보이는 캐리의 친구 스카이에게 빠져 어쩔 줄 모른다. 체스터의 엄마는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하는데, 그 상황에서도 체스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무덤덤하게 엄마가 준 크리스마스 생일 선물을 뜯을 뿐이다.

체스터의 주변에 펼쳐지는 상황은 지극히 일상적인 동시에 적나라하다. 작가는 일상적인 폭력, 의사소통의 단절과 외로움을 드러낼 에피소드들을 적절하게 골라내어 차분하고 집요하게 그려낸다. 보기 싫은 부분들을 정면으로 보여주는 식이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 모두 직설적이고 왜곡 없이 그려진다. 예컨대 체스터의 엄마가 차를 몰면서 뒷자리에 앉아있는 체스터와 그의 동생에게 “난 패드를 넣은 브래지어를 한단다. 그러면 다른 여자 크기 정도는 돼 보이거든”이라며 남자들의 기대에 맞춰 ‘여성적’으로 보여야 하는 자신의 상황을 고백하지만, 자식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검고 큰 여백, 헐렁한 그림체와 절제된 대사 때문에 그 효과는 더욱 증폭된다. 가끔 등장하는, 비스켓을 먹는 체스터의 모습은 영화적 연출을 연상케 하는데, 건조하고 쓰디 쓴 일상을 상징적으로 처리한다.

가족과 학교, 그리고 연애

가족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단란한 가족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가정 안에서 엄마는 끊임없이 아들들과의 거리를 좁히려고 애쓰지만 실패하는 존재이며, 아빠는 아예 존재감마저 희미하다. 예를 들어 엄마가 심부름을 가달라고 부탁하면 아들은 그 부탁을 거절하는데 그 결과 엄마는 상처 받았다고 토로하고 아들은 상처를 주었다는 자의식은 있지만 죄책감이나 미안함 등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무덤덤하게 구는 식이다.

학교는 우월하다는 것을 표출하지 않으면 사정없이 무시당하는 공간이다. 체스터에게 몰려온 남자아이들은 “너도 쟤 먹고 싶지?”, “가슴도 만지고 싶지?”, “좋아. 그럼 ‘질’ 해봐” 등 소년들이 가질 법한 성적 판타지들을 쏟아내며 그런 판타지를 감히 발설하지 못하는 체스터를 은근히 따돌린다. 연애 또한 달콤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체스터는 겨우 스카이에게 고백하지만 정작 데이트 신청을 할 용기가 없다. 캐리는 질투하지 않는 척 체스터와 스카이 사이를 잘 되게 해주려는 듯 행동하지만 그 모습은 오히려 둘 사이에 끼어들고 싶어하는 그녀의 비굴한 상태를 드러낼 뿐이다.

어쩌면 ‘소년의 성장’이라는 말은 반쯤만 맞을지도 모른다. 체스터는 엄마의 죽음이나 연애 사건, 왕따 사건 등을 통해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변화하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을 길러 낼 방법을 모르며 그냥 내버려둔다. 대신 무덤덤하고 건조한 상태를 상징해 줄 만한 사물들을 그려서 표현하는 방식을 익힐 뿐이다. 병원 침대에서 쪼그라든 끔찍한 형상을 한 채 엄마는 죽어가고 캐리는 체스터의 물건을 가지려다가 거부당하자 끝내 “너 좋아한 적 없어! 알아?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다고!”라고 외치며 체스터와 싸운다.

이런 상황 앞에서 죄책감을 가질 법도 하며, 저항감이나 혐오를 느낄 수도 있을 테지만 그는 그저 잔디를 깎을 뿐이다. 그렇게 그의 소년시절은 일단락된다. 체스터의 수동적인 태도나 어쩔 줄 몰라서 감정적인 호의를 거부하는 모습은, 사회화 과정에서 감정적인 영역을 다루지 않는 남성들의 면면과 그에 대한 자의식을 엿보게 한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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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류소연 옮김 / 다른우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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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웨딩드레스 뒤에 숨은 계산
엘프리데 옐리네크 《연인들》 서평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여성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 그녀의 소설은 신랄하고 냉혹하기로 유명하다. 그녀는 실험실 속의 쥐를 보듯 사회를 관찰하는데, 어디엔가 꼭 있을 법한 전형들을 설정해 그 인물들의 행동과 숨겨진 심리를 낱낱이 해부하고 비판한다. 그간 한국에 소개된 《피아노 치는 여자》의 경우 중년 여성에게 ‘작업’을 거는 젊은 남성의 정복욕이나 딸을 통제하고 싶어 안달이 난 어머니의 행태를 까발리고 있다. 그녀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킨 이유도 남성, 여성을 막론하고 속물적이고 추한, 감추고 싶은 면모들을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신분상승과 로맨스 사이

《연인들》은 ‘남성과 여성의 결혼의 정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제시된 소설이다. 작가의 의견에 따르면 대학을 나온 몇몇 여성들을 제외하고는, 여성들에게 결혼이란 자신의 미래 계급을 결정짓는 것으로 다가온다. 즉 최대한 ‘여성적인 여자’가 되어서 트집 잡힐 일은 숨겨야 하는 상품시장인 셈이다. 여성들에게만 그런가. 결혼은 한 집안에게 미래의 소득과 인맥 관계 등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회적 계약이다. 그래서 상대 남편뿐만 아니라 양가 부모들까지 합세해서 어떻게든 가장 좋은 결과를 얻고 싶어한다. 자연히 이해관계를 따지는 온갖 치졸하고 보수적인 계산들이 난무한다.

물론 결혼은 그 같은 물질적인 속성을 하얀 웨딩드레스 속에 숨기고 낭만적인 로맨스의 결말로 자신을 전시한다. 그래서 여성들은 신분상승과 낭만적 로맨스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다양한 행동을 취한다. 작가는 능청스럽게도 결혼을 마주한 여성들의 모습을 두 가지 사례를 통해 보여주겠다고 한다. 도시에서 브래지어를 만드는 공장에 다니는 브리기테와 시골에서 재단사 일을 배우는 파울라가 그 예다.

이들은 각각 결혼을 원하는 도시 여성과 시골 여성을 대변하며, 또한 남편의 가치를 계산하며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고 애써 믿는 속물적인 여성과, 사랑이 성공하면 자연스럽게 신분 또한 상승할 것이라고 믿는 순진한 여성을 대변하는 일종의 ‘샘플’이다. '연인들'은 결코 순수한 사랑을 나누지 않는다.

도시에 사는 브리기테는 별 매력은 없지만 전기 기술자라는 비교적 부유한 미래가 보장된 남자 하인츠와 결혼하기 위해 ‘여자로만 살기’로 결정한다. 그녀는 여성적인 외모만을 가지고 있을 뿐 어머니가 ‘미혼모’라는 약점을 지니고 있으며 돈도 별로 없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재봉틀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그녀에게 탈출구란 하인츠와의 결혼 밖에 없다. 하인츠와의 결혼은 쉽지 않다. 하인츠의 부모들은 브리기테를 반대하며, 요리를 배우는 교양 있는 여자 수지를 선호한다. 자신을 물건처럼 다루는 하인츠와의 섹스 또한 불쾌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브리기테는 온갖 모욕이나 수모를 마다한 채 임신만을 기다린다. 브리기테에게 ‘하인츠 이외의 삶은 아무것도 없다’.

한편 시골에 사는 파울라는 재단사 일을 성실하게 배울 것을 다짐하는, 순진한 소녀 견습생이다. 파울라의 집은 가난하며, 아버지는 알콜 중독으로 자주 어머니를 때린다. 그런데 어느 날 파울라에게 아버지처럼 술을 자주 마시며 자동차를 제외한 그 모든 것에 무관심하지만 잘생긴 남자 에리히에 대한 낭만적인 사랑이 싹튼다. 파울라는 자신과 사랑하게 되면 에리히가 바뀔 것이라고 믿는다. 그녀는 빨간 원피스를 입고 에리히의 집에 찾아가서 일을 거드는 등 ‘여성적’으로 보이기 위해 애쓴다. 마침내 그녀는 임신하게 되고 주변의 설득에 의해 겨우 에리히와 결혼하게 되지만 결과는 좋지 않다. 에리히는 여전히 술을 자주 마시며 파울라에게 무관심하다.

절망적인 여성들의 블랙코미디

결혼을 둘러싼 여성들의 속사정을 폭로하기 위함일까, 이 소설은 일반적인 소설과는 상당히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교훈적인 이야기를 간략하고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우화에 가까운 인상이다. 즉 배경에 대한 묘사나 인물의 심리에 대한 서술, 줄거리의 반전 같은 본격소설이 갖추고 있을 법한 요소들은 거의 배제되어 있다. 대신 결혼을 계산하는 인물들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이를 신랄하게 때로는 동정적인 선언조의 문체로 폭로하는 내용이 가득하다.

저자는 마치 변사처럼 모든 상황을 요약하고 정리한다. 수지와 브리기테가 하인츠의 부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요리접시를 서로 나르겠다고 다투는 모습이나 에리히 집안의 변기를 닦는 파울라의 상황은 그 과장된 비굴함 때문에 실소를 자아내면서도, 결혼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여성들의 절망적인 상황이 느껴져서 씁쓸하다. 일종의 블랙코미디인 셈이다.

브리기테와 파울라의 모습을 통해 《연인들》은 얼핏 보기에는 결혼이 사랑과 안정적인 가정을 획득할 수 있는 가장 무난한 과정으로 보일 수 있지만, 결코 쉽지 않으며 자신의 주체성을 지우며 살아가는 고단한 여정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결혼을 벗어날 수 있는, 대안이 있을까? 하인츠와 브리기테는 결혼해서 안정적인 가정을 만들고, 교양 있는 여성 수지는 또 다른 대학생과 결혼해서 우아한 삶을 꾸리며, 시골에 사는 파울라는 불행한 결혼생활 끝에 성매매를 하다가 이혼까지 당한다.

사회적인 구조에 의한, 어쩌면 결코 바뀌지 않을 결혼의 풍경이다. 대신 작가는, “그러나 우리의 파울라는 아직도 차 열쇠를 찾고 있군요”라는 말을 통해 오히려 결혼으로 매듭지어지는 운명에서 완전히 밀려난 파울라에게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희미한 암시를 남긴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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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 A Life - 고요한 밤의 빛이 된 여인 미다스 휴먼북스 3
도로시 허먼 지음, 이수영 옮김 / 미다스북스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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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된 ‘천사’ 이미지를 벗어난 헬렌 켈러
도로시 허먼의 《헬렌 켈러》 평전

대부분의 어린이용 위인전처럼 헬렌 켈러 역시 위인전에서 장애를 이겨내고 인간적 승리를 거둔 여성이자 장애인의 복지를 위해 노력한 천사 같은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천사’라는 박제된 이미지와 판에 박힌 서사를 걷어내고 난 후의 많은 것들이 궁금해진다. 헬렌이 정말 ‘천사’같은 성품만을 지니고 있었을까? 평생 예외적인 장애인으로써 관찰 당하면서 살아야 했을 텐데 억하심정이 생기지 않았을까? 평생을 바쳐서 헬렌을 가르친 애니 설리번은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도로시 허먼은 대중적인 이미지 뒤에 가려진 헬렌 켈러의 입체적인 모습을 발굴해낸다. 여기에는 4년간에 걸친 철저한 자료 조사가 뒷받침됐다. 헬렌 켈러가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유행할 때 몇 차례 FBI의 혐의 리스트에 오를 정도로 체제 비판적인 인사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지은이는 헬렌 켈러가 장애에 대한 낯설음과 두려움, 거부감이라는 대중 심리를 통해 걸러진 결과 사회적으로 위협적이지 않은 착한 성인으로 남았다고 이야기한다. 헬렌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장애를 극복한 소녀로 유명해진 로라 브리지만 역시 빅토리아 시대의 보수적인 감수성이 선호하는 순수하고 고결한 여성으로 이미지화된 바 있다.

지은이는 헬런 켈러의 활동 궤적과 미국 사회와의 연관성에 주목하는 한편, 헬런 켈러와 그녀 주변의 사람들이 빚었던 관계와 그 심리적 갈등을 편지 등을 통해 꼼꼼하게 추적한다. 예컨대 애니 설리번은 결코 희생적인 선생님이 아니었다. 가난한 아일랜드 이주민의 딸로 태어난 애니는 빈민보호시설에서 사랑했던 동생의 죽음을 이겨내야 했으며 그녀를 추행하려는 남자들과 싸우면서 고된 성장기를 보냈다. 그 결과 그녀는 “세상이란 뿌리부터가 잔인하고 처참한” 것이라고 믿었다.

애니는 헬렌을 교육시키면서 직업을 가질 수 있었을 아니라, 유년기의 외로움에서 비롯된, 사랑을 받으려는 강렬한 욕망을 충족할 수 있었다. 확실히 헬렌과 애니의 밀착된 관계 사이에서 흐르는 감정은 평범한 선생/제자의 것이 아니라 순수한 애정과 집착의 경계를 넘나드는 깊은 종류의 것이었다.

헬렌 켈러가 활동하던 시절 미국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형편없었다. 때문에 헬렌 켈러는 자신이 천재 소녀나 성인으로 이미지화되거나 실험 대상이 되는 일을 기꺼이 수락하면서 장애인 권리 찾기에 힘쓴다. ‘볼 수 있는 것은 빛이며 볼 수 없는 것은 어둠’이라는 견해는 헬렌을 비롯한 시각 장애인들의 사회 활동을 원천적으로 가로막는 것이었기에 그녀는 장애인이 결코 아무것도 감각하지 못하는 존재가 아님을 널리 알려냈다.

한편 사회운동가로서 헬렌은 다소 감상적이고 소박하기는 했지만 좌파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든 억압이 사라지기를 원했다. 사회주의는 헬렌에게 최초로 고통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배출하도록 해주었다. 그녀는 엠마 골드먼과 같은 무정부주의자와 급진주의 지도자들과 친구가 됐으며 마르크스와 레닌을 열렬히 숭배했다.

그러나 헬렌 주변의 사람들이나 후원자들, 매체 편집자들은 헬렌이 장애인에게 요구되는 착한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할 때마다 우려를 표명했으며 그녀에게 화를 냈다. 이는 장애인이 사회운동가의 이미지를 가진다는 것이 당대의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서 이중적으로 어려운 문제였음을 잘 보여준다.

헬렌의 후원자들은 전투적 여성 참정권자와 사회주의자를 지지하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전쟁을 반대하는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부 출신의 보수적 견해를 지닌 가족들부터 헬렌과 마찰을 빚었으며, 귀족적인 취향의 애니는 보드빌과 같은 대중적인 형태의 공연을 즐기는 헬렌의 소박하고 민중적인 취미를 불편해했다.

헬렌의 사회 활동은 그 자체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갈등이 충돌하는 장이었다. “사람들은 헬렌 켈러를 불쌍히 여기면서 장애인이 자신의 신체조건을 극복한 성공사례로 추켜세웠다. 하지만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녀가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 간혹 날카로운 의견을 말할 때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헬렌이 남긴 일기나 편지는 헬렌이 장애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군식구’가 되어야 하는 현실에 괴로워했다. 또한 장애 여성들을 가르치기를 원했는데, 여성들이 교육을 받으면 남성들이 여성이 약한 성(性)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성관계나 결혼과 같은 섹슈얼리티의 영역을 포기해야만 하는 현실적 한계를 씁쓸하게 토로하기도 했다. 그 때는 애니가 헬렌에게 ‘강간이란 여자의 동의 없이 여자를 학대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 너무 자유주의적인 것이 아니냐고 비난 받을 정도로 여성의 성이 억압당하고 있었다.

한편 그녀는 유명인사가 된 자신의 처지와는 달리 여전히 개선되지 않는 차별적인 현실 때문에 슬퍼했다. 그러나 명사가 된 ‘찬란한’ 헬렌에 대해 많은 장애인들은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며 질투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것 같다. 분명 헬렌은 ‘혜택 받은’ 장애인이었으며 본의 아니게 구축된 선한 이미지는 장애인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일상적인 규범이었으니 말이다.

시각장애인 협회 임원 중 누군가는 이천 장이 넘는 헬렌의 아름다운 사진 가운데 딱 한 장, 그녀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눈물을 흘리는 사진에 대해 “너무 심각. 치워버릴 것.”이라고 적어 놓았다고 한다. 나머지 사진 속에서 헬렌은 육체적인 정상성과 심리적인 안정감을 갖춘 ‘성인’ 이미지였다.

이 에피소드는 헬렌 켈러가 죽고 난 후 그녀가 위인전 등의 매체를 통해 사회에 어떻게 수용되어 왔는가를 예견하는 것 같다. 헬렌 켈러는 장애를 극복한 한 명의 개인적인 위인이었을 뿐, 결코 장애인에게 차별적이고 ‘정상’에 집착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에서 조명되지 못했다. 《헬렌 켈러》 평전은 헬렌 켈러라는 인물에 대한 복원인 동시에 사회가 장애문제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를 되짚어준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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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어둠 - 우울증에 대한 회고
윌리엄 스타이런 지음, 임옥희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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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울증은 “치료가 필요한 병”
윌리엄 스타이런의 《보이는 어둠》 서평


영화배우 이은주의 자살 이후 새삼 우울증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그러나 우울증의 실체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정도가 진전된 것 같지는 않다. 이는 이은주 죽음의 원인을 둘러싼 많은 논의들이 증명한다. 노출연기, 소속사와의 마찰부터 시작해서 우스갯소리이긴 하지만 '김정일 지령설'까지 떠돌았다. 그러나 우울증 그 자체가 자살을 유도할 수 있다. 우울증은 병이 진전될 경우 충분히 자살에 이르게 만들 만큼 무서운 병이다.

《보이는 어둠》의 지은이이자 소설가 윌리엄 스타이런은, 우울증을 불치병에 비유한다. 회복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윌리엄 스타이런은 심각한 우울증에 걸렸으며 한동안 자살충동에 시달렸다. 어렵사리 회복된 그는 《보이는 어둠》에 우울증의 초기 증세와 병세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느꼈던 괴로운 경험, 그리고 회복의 과정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일반적으로 정신질환과 관련된 책들이 그 특성상 병의 증세를 객관적으로 기술해야 하므로 (어쩔 수 없이) 구체적인 심리상태와 환자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불편함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면, 이 책은 그 같은 단점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지은이는 우울증이 쉽사리 표현 가능한 것이었다면 그 경험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이 병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대체로 동정심과 공감대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경험에 기초해서는 그 이해할 수 없는 형태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우울증은, 익사 혹은 질식할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고 고백한다. 초기에는 일상에 대한 막연한 낯섦을 경험했던 그는 점차 지나치게 민감한 상태 속에서 상식 밖의 괴상한 행동을 저지르는 한편 육체적인 통증 또한 겪게 됐다. 끔찍한 불안이 발작적으로 엄습하는 가운데, 그는 비로소 자신의 고통이 허탈감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심각한 병으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게 된다. "나는 광기의 날개가 펄럭이는 것을 느꼈다."

불면증과 그로 인한 피곤, 목소리의 변모, 성욕과 식욕의 둔화와 같은 우울증에 수반되는 증세를 겪으면서 그는 자신이 다양하게 바뀌는 고통을 기록하는 기계에 불과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게다가 우울증은 불치병처럼 손쉬운 치유책이 없는 병이니 만큼 계속되는 고통을 견뎌야 할 목적을 가지기란 어렵다. 중증의 우울증 상태가 되면서 그는 일상 자체를 포기하려는 충동에 시달리고, 천천히 죽음을 준비한다. 이 모든 행위는 연극적인 것인데, 제 2의 자아가 따라다니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제 2의 자아는 일종의 유령 같은 관찰자로서, 그가 다가오는 재앙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혹은 어떻게 무너지고 마는가를 관찰한다."

그래서 지은이는 우울증으로 인해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을 성격파탄이나 나약한 자로 몰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1987년 프리모 레비가 우울증으로 자살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로서 극악한 나치의 수중에서도 견뎌낸 사람이 나약하게도 자기를 파괴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울증에 시달렸던 지은이는 화가 나서 《뉴욕 타임즈》에 격심한 우울증의 고통은 앓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렵다고, 따라서 우울증의 본질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 있어야만 우울증으로 인한 무수한 자살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독자란에 기고했다. 말기 암 희생자들을 비난할 수 없는 것처럼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을 수 없었던 비극적인 사람들에게 비난을 퍼부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계속되는 자살 충동 속에서 지은이는 갑작스레 과거의 소중한 기억을 떠올리게 되고 스스로 입원을 결심한다. 그는 적정한 약물치료와 입원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물론 '적정한' 정도가 환자에게 만족스러운 수준이어야 할 것이다. 우울증에서 회복된 후 그는 우울증의 원인을 알아보지만 엄청나게 많은 가설들을 확인하고, 오히려 이 수많은 가설들이 우울증의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인을 찾자면, 자신의 경우 상실에 대한 '불충분한 애도'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경우 우울증을 앓았던 아버지로부터의 유전과 열세 살 때 겪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불충분한 애도'가 주요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정신병에 대한 금기가 심한 한국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을 정신질환으로 보지 않으며, 동시에 치료를 요하는 질환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울증은 분명 치료가 필요한 병이다. 지은이는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을 막기 위해서는 주변인들의 끈질기고 헌신적인 격려가 필요할 것이라며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용기를 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엄청난 모독이지만, 반복해서 그런 격려를 보여주면 위험에 빠진 사람은 대부분 구출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한 끈질긴 격려를 보내기 위해서는 우울증의 실체에 대해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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