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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좋아한 적 없어 ㅣ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체스터 브라운 지음, 김영준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건조하고 쓰디 쓴, 소년의 성장기
체스터 브라운의 《너 좋아한 적 없어》 서평
체스터 브라운의 《너 좋아한 적 없어》는 상당히 보기 드문 스타일로 소년의 성장을 솔직하게 다룬 만화다. 체스터 브라운은 1980년대 등장한 캐나타의 얼터너티브 만화의 선두주가로 꼽히는 작가로, 언뜻 보기에도 판화처럼 검은 배경 위에 몇 개의 하얀 칸으로 전개하는 방식이나 가는 선으로 그려진 다소 그로테스크하고 힘없이 보이는 인물들의 모습은 영미계열의 인디만화라는 인상을 풍긴다. 괴기스럽고 특이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다른 작품과는 달리 《너 좋아한 적 없어》는 극도로 사실적인 상황을 절제미 있게 연출한다.
일상적 폭력과 의사소통의 단절 드러내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임을 확실하게 표시하기 위해서일까, 작가와 주인공의 이름은 같다. 체스터는 지방의 중소도시로 여겨지는 어느 마을에서 살고 있다. 그는 키스와 레드 제플린의 음악을 좋아하고 그림을 그린다. 그는 ‘졸라’, ‘씨발’과 같은 욕은 모자라고 무식한 사람들이 쓰는 거라고 충고하는 어른스러운 이웃집 친구 코니의 말을 듣고, 그 말을 쓰지 않겠다고 학교에서 선언했다가 친구들에게 놀림 당할 정도로 소심하다.
코니의 동생 캐리는 이런 체스터가 좋아서 차고에 ‘체스터가 좋아’라고 쓰고, 설거지를 도와달라고 그를 부르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지만 정작 체스터는 가슴이 크고 섹시해 보이는 캐리의 친구 스카이에게 빠져 어쩔 줄 모른다. 체스터의 엄마는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하는데, 그 상황에서도 체스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무덤덤하게 엄마가 준 크리스마스 생일 선물을 뜯을 뿐이다.
체스터의 주변에 펼쳐지는 상황은 지극히 일상적인 동시에 적나라하다. 작가는 일상적인 폭력, 의사소통의 단절과 외로움을 드러낼 에피소드들을 적절하게 골라내어 차분하고 집요하게 그려낸다. 보기 싫은 부분들을 정면으로 보여주는 식이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 모두 직설적이고 왜곡 없이 그려진다. 예컨대 체스터의 엄마가 차를 몰면서 뒷자리에 앉아있는 체스터와 그의 동생에게 “난 패드를 넣은 브래지어를 한단다. 그러면 다른 여자 크기 정도는 돼 보이거든”이라며 남자들의 기대에 맞춰 ‘여성적’으로 보여야 하는 자신의 상황을 고백하지만, 자식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검고 큰 여백, 헐렁한 그림체와 절제된 대사 때문에 그 효과는 더욱 증폭된다. 가끔 등장하는, 비스켓을 먹는 체스터의 모습은 영화적 연출을 연상케 하는데, 건조하고 쓰디 쓴 일상을 상징적으로 처리한다.
가족과 학교, 그리고 연애
가족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단란한 가족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가정 안에서 엄마는 끊임없이 아들들과의 거리를 좁히려고 애쓰지만 실패하는 존재이며, 아빠는 아예 존재감마저 희미하다. 예를 들어 엄마가 심부름을 가달라고 부탁하면 아들은 그 부탁을 거절하는데 그 결과 엄마는 상처 받았다고 토로하고 아들은 상처를 주었다는 자의식은 있지만 죄책감이나 미안함 등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무덤덤하게 구는 식이다.
학교는 우월하다는 것을 표출하지 않으면 사정없이 무시당하는 공간이다. 체스터에게 몰려온 남자아이들은 “너도 쟤 먹고 싶지?”, “가슴도 만지고 싶지?”, “좋아. 그럼 ‘질’ 해봐” 등 소년들이 가질 법한 성적 판타지들을 쏟아내며 그런 판타지를 감히 발설하지 못하는 체스터를 은근히 따돌린다. 연애 또한 달콤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체스터는 겨우 스카이에게 고백하지만 정작 데이트 신청을 할 용기가 없다. 캐리는 질투하지 않는 척 체스터와 스카이 사이를 잘 되게 해주려는 듯 행동하지만 그 모습은 오히려 둘 사이에 끼어들고 싶어하는 그녀의 비굴한 상태를 드러낼 뿐이다.
어쩌면 ‘소년의 성장’이라는 말은 반쯤만 맞을지도 모른다. 체스터는 엄마의 죽음이나 연애 사건, 왕따 사건 등을 통해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변화하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을 길러 낼 방법을 모르며 그냥 내버려둔다. 대신 무덤덤하고 건조한 상태를 상징해 줄 만한 사물들을 그려서 표현하는 방식을 익힐 뿐이다. 병원 침대에서 쪼그라든 끔찍한 형상을 한 채 엄마는 죽어가고 캐리는 체스터의 물건을 가지려다가 거부당하자 끝내 “너 좋아한 적 없어! 알아?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다고!”라고 외치며 체스터와 싸운다.
이런 상황 앞에서 죄책감을 가질 법도 하며, 저항감이나 혐오를 느낄 수도 있을 테지만 그는 그저 잔디를 깎을 뿐이다. 그렇게 그의 소년시절은 일단락된다. 체스터의 수동적인 태도나 어쩔 줄 몰라서 감정적인 호의를 거부하는 모습은, 사회화 과정에서 감정적인 영역을 다루지 않는 남성들의 면면과 그에 대한 자의식을 엿보게 한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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