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버타리아트 카이로스총서 2
어슐러 휴즈 지음, 신기섭 옮김 / 갈무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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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사회 여성노동의 현실 파헤쳐
어슐러 휴즈의 《싸이버타리아트》 서평


“집안일은 노동이 아니”라는 편견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또한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에 과거에 비해 집안일의 양이 줄었다고도 생각된다. 이는 서로 연결되어 가사노동에 대한 편견을 강화한다. 즉 그다지 힘들지 않은 가사노동, 여성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청소기가 있을 때와 없을 때, 절대적인 노동량은 분명 차이가 난다. 그러나 하나의 기기 유무로 비교할 경우 여성이 부닥친 노동의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즉 자본주의 발달에 따른 노동 양상의 변화와 함께 가사노동의 종류가 늘어나고, 가사노동의 성격 자체가 변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정보기술 발전으로 소비노동이 증가했다

어슐러 휴즈의 《싸이버타리아트》는 기술 발전에 따른 현대 노동 양상 변화를 맑시즘적 관점에서 분석하는 책이다. 그녀는 고전적인 맑시즘이 잘 다루지 못했던 문제들 - 여성노동 문제, 가정의 문제, 사무 노동자 문제, 정보 통신 기술의 영향 등을 고찰한다. 때문에 《싸이버타리아트》에는 여성노동과 관련된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또한 저자가 출판업계 노조활동가 출신으로 동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쓰기를 추구했기에, 다른 노동 관련 이론서에 비해 접근도가 높다는 것도 장점이다. 제목 ‘싸이버타리아트’(Cybertariat)는 정보 기술의 발전에 따라 불안정한 노동 환경에 놓이게 된 사무 노동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저자는 20세기에 기술이 발전해서 고용이 줄어들어도, 대량실업사태가 야기되지 않은 원인을 화폐경제 밖에 있던 살림살이의 상품화에서 찾는다. 우선 자본주의 내에서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존의 노동력이 상당부분 필요 없게 되어도, 대량실업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신규 사업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가 보기에 20세기에 등장한 신규 사업의 대부분-라디오, 텔레비전, 음향기기 같은 산업, 냉동식품 등 편의식품 산업, 세탁기, 냉장고, 기타 가전 산업, 화장품 산업 등-이 가내 노동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큰 소리로 글을 읽는 것, 전반적인 가족 오락 거리를 제공하는 것, 음식을 준비하고 보존하는 것, 가족을 돌보는 것,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 등의 일들이 이제 상품화됐다.

그런데 살림살이이의 사회화는 살림살이에 드는 전체시간을 줄이지 않는다. 그녀는 몇 가지 이유를 설명한다. 첫 번째로, 소비자에게 전가되는, 이른바 셀프 서비스라 불리는 ‘소비 노동’의 양이 늘어난다. 예를 들어 소비자들은 대형 슈퍼마켓의 상품 진열대에서 직접 물건을 담고, 채소를 직접 봉지에 넣고, 주유소에서 주유하고, 은행의 자동 입출금 기계에 줄 서는 일을 해야 하는데, 이 역시 노동이다. 이 소비자들의 대부분은 여성이다.

두 번째로 20세기에 등장한 가정학 운동, 미생물 병원설, ‘과학적 모성’의 발전으로 여성들은 더 많은 노동을 수행해야 했다. 저자는 이 상황을 “가을에 겨울철 속옷을 짓고 봄이 되어서야 풀어 빨던 이들은 매일 속옷을 빨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손자들을 낳고 말았다”라고 재치 있게 표현한다. 세 번째로 여성들은 공동체적 생활에서 이탈해, 각자의 집에서 고립되어 가사노동을 수행하기에 오히려 이전보다 노동 시간이 더 늘어난다. 그리고 ‘공적인’ 일터와, ‘사적’ 가정이 엄격하게 구분되고, 가정이 소외되고 짜증나는 노동 환경의 도피처로 여겨지면서 정서적 욕구의 충족역할 역시 주부에게 넘어가게 됐다는 것이다.

보살핌 노동과 여성건강의 상관관계

한편 살림살이의 사회화, 상품화를 통해 창출된 새로운 일자리의 대부분은 여성들에게 돌아간다. 여성들은, 그 이전보다 살림에 돈이 많이 드는 상황 속에서 맞벌이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노동 시장으로 나서게 된다. 살림살이의 사회화는 처음에는 ‘사치’로 여겨지다가,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노동 계급에게로 전파되며 이는 생활수준의 향상이라고 환영 받는다. 시간이 지나면 이는 필수적인 것이 되는데, 이는 사회시설 등이 누구나 이를 갖추고 있다는 전제 아래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같은 일자리들은 ‘미숙련’ 노동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가장 값이 싼 노동자들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여성들에게 많이 돌아가는 것이다 특히 가난한 여성, 이주민들처럼 선택의 여지가 없는 여성들은 집중공략 대상이 된다.

또 하나 흥미로운 부분은 여성의 건강에 대한 설명이다. 저자는 노동환경이, 의학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질병 이외에도 명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불편함, 긴장, 불행한 느낌을 포함한 나쁜 상태를 유발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여성의 건강과 관련된 대표적인 이슈는 생리, 임신 및 출산 문제다. 여성이 생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노출할 경우 사회적인 불편한 시선에 노출될 수 있으며, 그렇다고 해서 아예 이슈화하지 않을 경우 여성들이 사적으로 다양하게 느끼는 불편함(생리통, 소화불량 등)이 드러나지 않게 된다. 임신과 출산 역시 어려운 문제인데, 특히 태아와 엄마를 분리하고 엄마를 태아의 운반자로 여겨서 엄마가 일하는 것 자체를 태아에게 위험을 끼치는 것으로 보는 보수적인 관점은 여성노동자들의 싸움을 더욱 어렵게 한다.

저자는 남성의 몸과 여성의 몸이 생리적으로 다르다는 점 이상으로 여성이 일터에서 겪는 불행이 많다고 지적한다. 여성이 사회적으로 수행하는 일은 집에서 하던 일을 직간접적으로 연장한 것이 많으며, 때문에 이 일들은 보살핌과 관련이 깊다. 보살핌 노동은 보살피는 주체에게 항상 시선이 주목되므로, 여성들은 자신의 복지를 등한시하고 보살피는 자에 의한 잘못이라는 죄의식을 내면화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환자들과의 접촉에서 일어나는 간호사들의 문제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여성들의 직장이 더 열악하다는 점도 여성들에게 스트레스를 줄 가능성이 크다. 저자는 비서 임무와 문서 입력 등 여성들이 맡는 일이 남성들에 비해 비교적 좁은 범위에서 반복적인 움직임을 지속하는 일들이 많다고 지적하는데, 이는 남성노동자와는 또 다른 건강 상해를 가져온다.

좌파 남성지식인들의 허영 비판

이처럼 저자의 관심은 고전적인 사회주의 이론체계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노동 문제들을 풀어내는 데 있다. 그는 사회주의가 정보통신 기술이 발달한 현대의 사무 노동자 문제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전통적인 맑시즘은 사무 노동자를 프롤레타리아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산수단의 유무로만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를 구분하는 것은 노동이 세분화되고 복잡해지면서, 한계로 지적돼 왔다. 특히 그는 ‘화이트칼라’와 같은 명칭이 남성 사무직 노동자를 지칭하는 말이며, 정보통신기술의 변화에 따른 노동자들의 노동 양상 및 여성노동자들의 지칭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는 좌파 남성지식인들이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지 오래된 노동계급의 특징을 낭만화하고, 하나의 특정한 전형으로 만드는 태도에 대해 지적한다. 몇몇 남성 육체노동자에 대한 거의 물신 숭배적 집착, 자신들의 노동계급 선조를 경쟁적이면서도 집착적으로 내세우는 것, 여성주의는 중산계급적인 것이며 ‘진짜’ 노동계급 남성을 소외시킨다는 주장을 하는 것 등은 그들 지식인들의 역사적 위치와 관련이 깊다고 비판한다. 그들은, 영국의 전후 복지국가 체제 덕분에 신분이 상승한 노동계급의 자식들로서, 아버지 계급을 배신했다는 불안과 ‘이상화된’ 노동 계급 남성의 존경을 받고 싶다는 욕구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현실에 대한 대안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비정규직화, 집안의 일터화 경향으로 인해 점점 분산되는 노동자들은, 정보 통신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국제적으로 비슷한 불안정한 노동환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조직화가 좀처럼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대안을 고민하는 저자의 방식은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한 집단들의 아직 충족되지 않은 욕구를 분석하는 데서 대안이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임신한 여성들이 태아 검사를 더 자주 하길 원하는가, 아니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훈련된 산파를 원하는가? 살림살이에는 실제로 어떤 노동이 요구되며 그 노동을 가장 잘 사회화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노동과정을 더 만족스럽고 안전하게 바꿀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들이 그것이다. 이는 소외된 노동자들이 당면한 현실과 그들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절한 출발지점으로 여겨진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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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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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법의 판단 ‘정답은 없다’
김두식의 《헌법의 풍경》 서평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 가결 이후 많은 사람들이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렸다. 대통령부터 판결을 기다리겠다고 말했으니 이는 당연한 반응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정치적인 전략에 따라 움직이는 국회의원들과 달리 헌법재판소는 정의롭고 사리에 맞는, ‘절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암암리에 내재돼있다는 것이다.

법해석, 법조인이 독점해선 안돼

《헌법의 풍경》의 저자 김두식씨의 생각에 따르면, 이같은 믿음은 그릇될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 매우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는 법적 판단에 있어, ‘정답은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 저자는 이현세의 만화 《천국의 신화》에 대한 판결문을 예로 들면서, 법원의 판결문 역시 ‘일반 보통인의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 ‘성적 도의관념’, ‘건전한 사회통념’과 같은 가상적이고 애매모호한 개념에 의지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음란’이라는 개념 자체가 ‘살인’이나 ‘강간’보다 훨씬 더 뜻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단어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식적으로 법은 ‘절대적인’ 판결을 내려주는 존재로 인식된다. 저자는 왜 이처럼 법과 법조계에 대한 그릇된 상식이 생겨났는지를 한국 법조계가 처한 현실을 통해 설명하고 문제점을 비판한다.

저자는 사법시험 합격 후 검찰에서 잠시 일하다가 ‘체질에 잘 안 맞다’는 이유로 검사직을 사임한 후 미국에서 법학을 공부한, 한국 사회에서 보기 드문 이력을 지니고 있다. 스스로 ‘이류 법학자’임을 자처하는 그는, 오히려 법조계의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인의 시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법조계의 문제점이 더 눈에 잘 띄는지도 모르겠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우선 법전 용어가 지나치게 어렵고 일상적인 언어와는 뜻이 다르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것을 문제로 꼽는다. 마치 고어로 가득 찬 개역판 성경에 대한 해석을 한국 교회 목사들이 독점하듯, 법전에 대한 해석을 법률가들이 독점함으로써 특권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사법고시라는 시험 자체가 공부할 때는 힘들지만, 한번 합격하면 갑자기 신분상승을 누리게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합격자들은 특권의식을 암암리에 가지게 된다. 처음에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정의로운 변호사가 되겠다는 마음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한다 하더라도 막상 합격한 후 위계서열이 엄격하고 인간관계를 잘 맺지 않으면 여러 가지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법조계의 논리를 따르다 보면,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과는 점차 멀어진 삶을 살게 될 수밖에 없다.

법조계 인맥이 엽기적인 범죄 만든다

법률가들이 지닌 특권의식은 독재정권 시대에는 법이 정권의 손발로 작동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저자는 그 어떤 고문이나 조작도 법률가들과 완전히 무관하게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지적하고, ‘국가권력으로부터 남의 몸을 마음대로 다룰 권한을 위임 받았다고 착각한 사람들’이 성고문을 비롯한 각종 고문들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음을 폭로한다. 그가 보기에 “이제 다 지난 일 아니냐”라는 소극적인 반응은 모자란다. 독재 정권이라는 괴물의 수족이 된 과거를 뼈아프게 반성하지 않고서는 고문 재발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신분상승으로 인한 특권의식과 함께, 법률가들이 사법연수원이라는 하나의 뿌리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점도 문제다. 지금은 사법고시 합격자가 1천명에 육박하지만, 3백명으로 제한되었을 시기에는 법조계 전체가 하나의 ‘가족’으로써, 인간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는 압박이 매우 심했다. 예를 들어 변호사가 사건을 처리할 때는 검사에게 이야기를 잘 해야 하는데 담당 검사를 모르는 경우보다 아는 경우가 훨씬 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판결에 있어서 독립성 보장은 가장 중요한 조건인데, 인간관계를 잘 따져야 하는 한국 법조계에서 이것이 잘 지켜지기란 어렵다. 저자는 ‘차떼기’ 사건으로 물의를 빚은 바 있는 이회창씨의 측근 서정우 변호사가 평소에는 법조계 내에서 평판이 매우 좋은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하면서, 법조계의 인간관계가 멀쩡한 사람으로 하여금 엽기적인 범죄를 저지르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법은 차별철폐 위한 적극적 도구

이같은 법조계의 현실로 말미암아 현재 한국사회는 시민들과 법 사이가 철저히 괴리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이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현재 합격자가 1천명에 이른 지금의 상황에서, 소수자에 대한 법안 등 진보적 주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어 다행이라는 것이다.

또한 법은 지켜야 할 소극적인 대상이 아니라, 법안을 통해 의식 개혁을 이루어낼 수 있는 적극적인 도구이기도 하다. 저자는 한국이 연령, 성별, 인종으로 인한 차별이 심각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각종 차별이 삶의 현장에서 일상화되어 오히려 무감각하게 되어버린 곳’이라고 설명한다. 미국의 경우 인종차별로 사회적인 갈등이 심각해진 역사가 깊기 때문에, 그 결과 광범위한 차별 금지법이 도입되어 어느 정도 의식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흑인, 여성, 장애인과 같은 소수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찾기가 상당히 쉬워졌다.

저자는 미국과 비교하면서, 한국 역시 차별 금지 소송과 같은 재판을 통해 분위기가 환기되고 차별적인 현실에 관심이 생겨나면 차별이 어느 정도 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물론 차별 금지 소송처럼, 사회적 분위기를 환기하는 소송이 많아지기 위해서는 소수 변호사들의 개인적인 노력을 벗어나서 구조적인 지원을 받아서 궁극적으로 시민들이 법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저자는 몇 가지 대안 제시를 하고 있다. 먼저 변호사들의 수가 더 많아지고 다양한 출신들로 채워지면 변호사들의 고압적인 자세가 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일반 시민들이 법 관련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돈이 지나치게 많이 들게 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한다. 또한 대한법률구조공단과 같은 기관이 궁극적으로 국가인권위원회 아래 들어가서, 국가인권위원회가 권고 이상의 현실적인 강제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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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페미니스트
톰 디그비 엮음, 김고연주,이장원 옮김 / 또하나의문화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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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이 여성운동 주체가 될 수 있나
《남성페미니스트》 서평


남성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내 개인적인 경험에서 글을 시작할까 한다. 대학교에서 나와 함께 활동하던 (소수의) 남성 페미니스트들은 남성+페미니즘이라는, 그 모순된 정체성 때문에 자기 위치를 잘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남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주변 여성들에게 피해를 끼칠까봐 늘 조심스러워 했고, 일종의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도 보였다. 여성 페미니스트들 역시 이들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에 대해 단일한 의견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남성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는 대다수의 남성들은 자신이 남성이기에 여성의 경험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양성평등이라는 원칙적인 명제에 동의할 뿐 지적 호기심 차원에서 공부하는 것 이상으로 활동하지 않았으며 ‘오빠 페미니스트’의 이름으로 후배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쳐주겠다고 나서는, 눈에 거슬리는 상황도 있었다.

남성이 여성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언제 어디서나 논쟁거리다. 일차적으로 페미니즘이 남성에 의해 여성이 억압 받는 현상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만큼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는 남성은 주변 남성 동료들로부터 “너 왜 그러냐?”는 식의 냉소적인 반응을 받기 쉽다.

한편 여성 페미니스트들의 경우, 남성이 여성의 문제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가의 문제 때문에 그들의 ‘진실성’에 대해 의심하기도 한다. 그리고 페미니스트가 성차별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지칭하기에 남성과 여성 모두 여성운동을 할 수 있다고 이론적으로 분석 가능해도, 현실적으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는 남성들은 실천적인 영역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성페미니스트》는 여성운동의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쓴 에세이 모음집이다. 여성이 아닌, 남성 스스로가 페미니즘과 자신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흔적은 상당히 새롭다. 이 책은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없는가의 문제부터, 여성과 남성의 우정 비교, 양육과 아버지의 문제 등 상이한 주제와 경험들을 다루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남성 또한 페미니즘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는 어려운 점과 자기 스스로 모순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을 진솔하게 고찰하고 있다.

정체성 패러다임에서 실천 패러다임으로

이 글의 저자들은 정체성 패러다임에서 실천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페미니스트로서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 여성운동에 중요하다는 것이다. 산드라 바트키는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책이 나오게 된 배경으로, 여성 집단 전체가 같은 억압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는 인식이 유효해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녀는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는 여성들이 돈 많은 보수적 조직을 후원하기도 하고 페미니즘을 거칠게 비난하기도 하는” 상황을 볼 때, 여성운동이 반드시 남성 대 여성의 구도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반면, 1970년대 미국에서 등장한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인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남성은 남성 그 자체로서 여성을 억압할 수 있다는 사실을 통찰해 낸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때문에 이 흐름은 여성의 경험과 여성만의 독특한 인식이 페미니스트로서의 자기 정체성 형성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흑인페미니즘을 비롯하여 여성 내에서도 다양한 경험과 이론이 존재하며, 여성 역시 여성을 착취할 수 있다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정체성 패러다임은 한계를 맞이하게 됐다.

저자들은 페미니즘이 여성을 위한 것임에는 분명하나, 여성만이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성 억압을 밝혀내는 역사는, 여성 개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한 바 있다. 여성의 억압은 계급문제처럼 외부로 객관적인 지표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성 개개인의 억압을 드러내는 것에 중점을 둔다. 그러나 경험은 그 자체로서 해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투명하게 전달되는 경험이란 있을 수 없다. 패트릭 홉킨스는 “경험은 동시에, 언제나, 이미 하나의 해석이자 해석을 요구하는 개념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여성의 경험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 페미니즘 이론의 기반이 되기는 어렵다.

물론 현실적으로 여성들이 같은 여성들의 경험에 대해 더 잘 공감하고 문제점을 인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여성들의 경험이 모두 같다는 전제, 혹은 같은 경험을 공유했기 때문에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명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 책은 남성이 여성의 경험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주체가 되기 어렵다는 명제가 한 가지 다른 전제를 깔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남성과 여성에 대한 고정된 젠더(gender) 정체성을 전제로 하여, 이 구별 속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톰 디그비는 남성과 페미니즘의 대립이 “모든 인간은 남자 아니면 여자로 분류된다는 가부장적 문화의 전형적인 이분법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스스로와의 싸움 직면해야

이 책에 제시된 두 명의 ftm 트랜스젠더(female to male)의 에세이는 페미니스트들이 가지고 있는 젠더 정체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비판한다. 페미니스트와 남성성 이 둘을 긍정하며 지향하는 이들은 젠더에 대한 단일하고 확실한 구별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억압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해리 루빈은 자신이 트랜스섹슈얼임을 “커밍아웃”한 후 여성학과에서 직장을 구할 때 자신의 여자 페미니스트 친구가 “여성으로서 여성학을 배우는 것”을 더 선호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고백하며,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몸을 가지고 있거나 여성성을 수용하거나 혹은 여성으로서의 삶을 경험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정체성 패러다임을 계속해서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제이콥 헤일은 성전환 후 자신에게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들어왔다고 고백한다.

남성과 페미니즘은 모순된 정체성의 결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은 어찌 보면 쉽게 나오는 정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지속적으로 불거지는 까닭은, 여성운동을 하는 남성들이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이 가진 장점 중의 하나는 어떻게 하면 남성들이 보다 적절하게 여성운동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 많은 조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이 책의 영향으로 남성페미니스트 모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남성 활동가들에게 자신의 남성성을 궁극적으로는 긍정하는 것이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효과적인 길임을 조언하는 부분이 눈에 띈다. 해리 브로드는 “남성 긍정성이 친페미니즘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한다.

물론 한계도 지적된다. 데이비드 카한은 남성과 페미니즘이라는 모순된 형태가 ‘가능한가’보다 ‘있음직한가’의 문제 제기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지식인 남성들이 보이는 한계적인 모습들을 허식가(이론을 알지만 생활에서 실천하지 않는 자)/내부자(열심히 일하지만, 정작 자기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자)/휴머니스트/자기학대자(가부장제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자기 탐닉에 빠진 자)로 분류한다. 그는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남자는 가부장제와 싸우는 것이 스스로와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직면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성운동을 하는 남성들이 어떻게 여성들과 함께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 맞는지는 정답이 없지만, 자신의 행동과 영향에 대한 성찰이 강하게 요구된다는 점은 유효한 지적이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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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
정송희 지음 / 새만화책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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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몸과 성적 경험을 건드리다
정송희의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 리뷰


여자들은 살면서 여러 가지 제약에 부딪친다. 통금시간과 같은 소소한 일부터 시작해서 언제 섹스를 해도 괜찮은 것인가와 같은 문제까지 꽤 골치 아픈 제약들이 많다. 나탈리 에니크는 《여성의 상태》(동문선)에서 소설 속 여성주인공들의 삶을 분석하면서, 여성들을 규정짓는 특질 중 하나로 수동성을 꼽았다. 즉 남자들에 비해 생활에 늘 제약이 뒤따르기 때문에 자연스레 수동적인 경향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모든 여자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여성들에게는 남자들에 비해 수동적인 경향이 있고, 그래서 여성들은 중요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의지대로 말하고 행동하기 어려워한다.

정송희의 만화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에서는 이 같은 여성들의 수동성이 잘 드러난다. 특히 작가는 성폭력처럼 여자들의 수동적인 성격에 큰 영향을 끼친 트라우마(외상, 영구적인 정신장애를 남기는 충격)적인 성적 경험들을 다룬다.

작가가 트라우마를 다루는 방식은 꽤 정석적인데, 몸의 접촉들이 부르는 일련의 회상들을 통해 과거를 헤집는다. 단편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은 자신의 가슴을 더듬는 남자의 손을 어렵사리 떨쳐낸 후 여자와 남자가 각각 성적인 접촉에 대한 최초의 기억을 되살린다. 두 사람의 성에 대한 기억은 매우 대조적이다. 여자는 같은 반 여자아이를 성희롱하는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반면, 남자는 이웃집 여자아이를 성추행하는 기억을 떠올린다.

이처럼 성과 관련된 여성들의 기억은 괴롭고 움츠러들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팬티 빠는 아침》에서 여자아이는 생리 기간이 아닌데 팬티에 피가 묻은 것을 보고, 처녀막이 터졌기 때문에 결혼하면 소박맞게 될 것이라는 상상을 하며 괴로워한다. 《그게 뭔지 몰랐어》에서 여자는 엠티에서 친하게 지냈던 남자에게 강간당하지만 그 경험을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상대를 피하기만 하는 여자에 대해 남자는 “힘들다”고 말하고, 이후 그녀와 사귄 남자 역시 그녀의 경험과 감정을 제대로 수용해주지 않는다. 《관계》에서 가족들을 부양하면서도 늘 무시당하는 여자는 “너무 오랫동안 일방적으로 주기만 한 사람은 분노도 거부도 할 수 없다”고 읊조린다. 그녀들은 수동적이며,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런데 작가가 다루는 성적인 경험들은 구체화되지 못한 채 주인공의 감정과 자의식 속에 함몰되어 있어서, 작가가 그러한 여성의 트라우마를 자유롭게 얘기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래서 몸이 기억하는 회상과 감정들은 과거의 어느 한 장면에 박혀있으며, 생생하기보다는 다소 경직되어 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그림체도 이 같은 인상에 한 몫 한다. 오줌 싸기에 대한 금기를 다룬 《유년의 뜰》이나, 콘돔에 대한 금기를 다룬 《풍선》이 그렇다. 때문에 여성들이 그렇게까지 수동적으로 그려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 읽기에는 시대적으로 이전 세대의 감성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각 단편들이 1999년부터 2000년까지 만화잡지 《오즈》나 동호회지 《바카스》 등에 비정기적으로 연재된 것을 고려하면 이해가 갈 법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체적…》은 장점을 지니고 있다. 여성작가들의 만화들 가운데 여성의 몸과 성적 경험에 대해 제대로 다룬 작품들이 거의 없다시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간간히 등장하는 여성들의 리얼한 경험들을 다룬 만화들에서도 여성의 성적 경험과 욕망을 건드리는 부분들은 빠져있다(여성만화 뿐만이 아니라 여성영화도 이런 ‘거세적인’ 경향을 보인다). 사회적으로 주변인인 20대 여성의 현실을 잘 다루는 작품으로 손꼽히는 한혜연의 《금지된 사랑》 역시 어긋나는 사랑과 관계들을 잘 다루고 있지만 정작 성관계를 맺는 장면 같은 자극적인 부분들은 빠져있다.

반면에 《신체적…》은 어디서 본 듯한 내용으로 경험들을 재구성했다는 단점이 있지만, 성적 경험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정면으로 그린다는 점에서 이전 만화들과는 차별성을 지닌다. 《그게 뭔지 몰랐어》에서 과거 강간을 당했던 바닷가에서 다른 남자와 스킨십을 하다가 기억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장면이나, 갑작스레 결혼하자고 하는 남자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어려워하는 장면은 상당히 리얼하게 다가온다.

아직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 단계에 있기 때문일까, 작품에서 드문드문 발견되는 긍정적인 전망은 힘겨운 과거의 기억들에 비해 쉽게 찾아오며, 소박하다. 인절미처럼 통통하게 찐 뱃살을 걱정하는 여자는 자신의 뺨에 뽀뽀하는 남편 때문에 행복해하고, 살이 찐 누드모델은 남자 학생들의 비웃음에 괴로워하다가 과거 누드화에 등장한 여인들의 풍성한 몸을 바라보며 자신감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작가의 첫 작품집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 성적인 경험들을 작가가 어떻게 다룰 것인지, 더 나아가서 소박한 전망을 어떻게 구체적이고 힘 있는 것으로 변화시킬지를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그런데 첫 작품집이 약 4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왔다니, 지금 작품들은 어떠할지 알 순 없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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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소녀
다이도 다마키 지음, 김성기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살아있는’ 여자의 이야기
다이도 다마키의 《불량소녀》 서평


다이도 다마키의 《불량소녀》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주류적인’ 이미지의 사춘기를 보내지 않는다. 친구나 부모에게 정서적인 지지를 받지 않으며, 지식의 습득에 관심이 없고, 새로운 집단으로 들어가서 인간관계를 넓히지도 않는다. ‘사춘기’하면 으레 떠올리는, 어떤 문제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나 열정적인 반항도 없다. 때문에 그녀들의 사춘기에는 성장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자라’의 마루코가 어렸을 때 자신을 성적으로 놀리고 학대한 사촌 남자들을 피해 고향을 떠난 모습이 변화라면 변화다. 그러나 그녀가 고향을 떠난 것도 성장에 의한 발전보다는 회피적인 느낌이 강하다.

성장에 대한 갈망이나 열정이 없는 대신 소설은 일상 속에서 전달되는 미묘한, 정서적인 충격에 대한 세밀한 감수성을 갖추고 있다. 일상은, 어른이 되어도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행복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렇다고 해서 참을 수 없을 만큼 슬픈 것도 아닌 복잡한 흐름이다. 인간관계 또한 단순하지 않아서, 자매 사이 혹은 엄마와 딸 사이라고 해서 늘 좋을 수는 없다. 죽일 듯이 싸우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함께 밥을 먹으면서 웃는다. 그녀들은 일상 속에서 어느 순간 마음이 찡해지는 위안을 얻기도 하고, 혼자서 술에 취한 채 쓸쓸하게 쓰러지기도 한다.

《불량소녀》의 주인공은 스스로 ‘불량소녀’라는 명칭에 맞지 않게 불량스러운 짓을 하지 않고, 혼자서 지냈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고등학교)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지닌 수수께끼 중의 하나도 전혀 분수를 모른다는 것이다”라고 평할 정도로, 물 흐르듯 담담하게 살아간다. 그 같은 담담함은 마음을 아프게 할 만한, 정서적인 충격을 차분하게 기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모가 아버지와 성적 관계를 맺은 일화나,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심하게 맞았는데 언젠가 엄마를 세게 때리고 나니 더 이상 맞지 않게 되었다는 고백, 거식증에 시달려서 토사물을 대야에 숨겨놓는 사촌의 이야기, 언젠가 죽어버릴 것 같은 할머니의 모습이 틱 증상과 아토피성 피부염, 어둠 공포증, 야뇨증과 같은 어린애들이나 갖고 있음직한 병을 앓는 주인공의 상황과 어우러진다.

‘불량소녀’의 모습은 ‘자라’에서 여러 고장과 직장을 전전하면서 불안정하게 살아가는 마루코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남존여비를 당당하게 외치는 할아버지와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여자들, 소녀 마루코의 옷을 강제로 벗기는 남자사촌들의 모습은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라는 시골에 대한 표면적인 이미지를 단번에 깨뜨린다. 마루코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고향을 떠나지만 고향에서 안부전화가 오면, 마치 집을 떠난 강아지처럼 마음을 버리지 못한 채 마음이 흔들린다. 고향은, 따뜻한 감정과 쓰라린 감정이 뒤섞인, 완벽하게 지워버릴 수 없는 공간이다.

그녀가 일하는 직장 역시 고향과 다를 바 없이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으면서도, 막상 마루코가 그만두겠다고 하자 눈물을 흘리며 매달리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주인은 가끔 마루코의 몸에 손을 대고, 함께 일하는 직원 누마다와 가와라는 시시콜콜 질문을 하면서 독신으로 사는 마루코를 어린 여자취급을 한다.

결말에서 술을 마시고 거울을 보며 “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라고 외치는 마루코의 모습, 언제 죽을지 모르는 할머니의 집에 엄마, 언니와 함께 모여서 가슴 찡한 기분을 맛보는 ‘불량소녀’의 주인공 모습은 인상적이다. 신장염이 도졌으며 직장마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정한 마루코의 상황이나, 특별히 달라질 것 없는 ‘불량소녀’의 상황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희망 혹은 절망, 사랑과 우정 혹은 어떤 단단한 자의식적 세계관 없이 미묘하게 흔들리고 변화하는 일상의 순간적인 이미지들이 모여서 희극 혹은 비극이라는 단어 하나로 단정 짓기 어려운, 입체적인 감각들이 살아있는 여자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소녀시절을 훌쩍 넘어야 생겨날 수 있는 시선이 아닐까 싶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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