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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
정송희 지음 / 새만화책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여성의 몸과 성적 경험을 건드리다
정송희의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 리뷰
여자들은 살면서 여러 가지 제약에 부딪친다. 통금시간과 같은 소소한 일부터 시작해서 언제 섹스를 해도 괜찮은 것인가와 같은 문제까지 꽤 골치 아픈 제약들이 많다. 나탈리 에니크는 《여성의 상태》(동문선)에서 소설 속 여성주인공들의 삶을 분석하면서, 여성들을 규정짓는 특질 중 하나로 수동성을 꼽았다. 즉 남자들에 비해 생활에 늘 제약이 뒤따르기 때문에 자연스레 수동적인 경향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모든 여자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여성들에게는 남자들에 비해 수동적인 경향이 있고, 그래서 여성들은 중요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의지대로 말하고 행동하기 어려워한다.
정송희의 만화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에서는 이 같은 여성들의 수동성이 잘 드러난다. 특히 작가는 성폭력처럼 여자들의 수동적인 성격에 큰 영향을 끼친 트라우마(외상, 영구적인 정신장애를 남기는 충격)적인 성적 경험들을 다룬다.
작가가 트라우마를 다루는 방식은 꽤 정석적인데, 몸의 접촉들이 부르는 일련의 회상들을 통해 과거를 헤집는다. 단편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은 자신의 가슴을 더듬는 남자의 손을 어렵사리 떨쳐낸 후 여자와 남자가 각각 성적인 접촉에 대한 최초의 기억을 되살린다. 두 사람의 성에 대한 기억은 매우 대조적이다. 여자는 같은 반 여자아이를 성희롱하는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반면, 남자는 이웃집 여자아이를 성추행하는 기억을 떠올린다.
이처럼 성과 관련된 여성들의 기억은 괴롭고 움츠러들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팬티 빠는 아침》에서 여자아이는 생리 기간이 아닌데 팬티에 피가 묻은 것을 보고, 처녀막이 터졌기 때문에 결혼하면 소박맞게 될 것이라는 상상을 하며 괴로워한다. 《그게 뭔지 몰랐어》에서 여자는 엠티에서 친하게 지냈던 남자에게 강간당하지만 그 경험을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상대를 피하기만 하는 여자에 대해 남자는 “힘들다”고 말하고, 이후 그녀와 사귄 남자 역시 그녀의 경험과 감정을 제대로 수용해주지 않는다. 《관계》에서 가족들을 부양하면서도 늘 무시당하는 여자는 “너무 오랫동안 일방적으로 주기만 한 사람은 분노도 거부도 할 수 없다”고 읊조린다. 그녀들은 수동적이며,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런데 작가가 다루는 성적인 경험들은 구체화되지 못한 채 주인공의 감정과 자의식 속에 함몰되어 있어서, 작가가 그러한 여성의 트라우마를 자유롭게 얘기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래서 몸이 기억하는 회상과 감정들은 과거의 어느 한 장면에 박혀있으며, 생생하기보다는 다소 경직되어 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그림체도 이 같은 인상에 한 몫 한다. 오줌 싸기에 대한 금기를 다룬 《유년의 뜰》이나, 콘돔에 대한 금기를 다룬 《풍선》이 그렇다. 때문에 여성들이 그렇게까지 수동적으로 그려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 읽기에는 시대적으로 이전 세대의 감성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각 단편들이 1999년부터 2000년까지 만화잡지 《오즈》나 동호회지 《바카스》 등에 비정기적으로 연재된 것을 고려하면 이해가 갈 법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체적…》은 장점을 지니고 있다. 여성작가들의 만화들 가운데 여성의 몸과 성적 경험에 대해 제대로 다룬 작품들이 거의 없다시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간간히 등장하는 여성들의 리얼한 경험들을 다룬 만화들에서도 여성의 성적 경험과 욕망을 건드리는 부분들은 빠져있다(여성만화 뿐만이 아니라 여성영화도 이런 ‘거세적인’ 경향을 보인다). 사회적으로 주변인인 20대 여성의 현실을 잘 다루는 작품으로 손꼽히는 한혜연의 《금지된 사랑》 역시 어긋나는 사랑과 관계들을 잘 다루고 있지만 정작 성관계를 맺는 장면 같은 자극적인 부분들은 빠져있다.
반면에 《신체적…》은 어디서 본 듯한 내용으로 경험들을 재구성했다는 단점이 있지만, 성적 경험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정면으로 그린다는 점에서 이전 만화들과는 차별성을 지닌다. 《그게 뭔지 몰랐어》에서 과거 강간을 당했던 바닷가에서 다른 남자와 스킨십을 하다가 기억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장면이나, 갑작스레 결혼하자고 하는 남자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어려워하는 장면은 상당히 리얼하게 다가온다.
아직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 단계에 있기 때문일까, 작품에서 드문드문 발견되는 긍정적인 전망은 힘겨운 과거의 기억들에 비해 쉽게 찾아오며, 소박하다. 인절미처럼 통통하게 찐 뱃살을 걱정하는 여자는 자신의 뺨에 뽀뽀하는 남편 때문에 행복해하고, 살이 찐 누드모델은 남자 학생들의 비웃음에 괴로워하다가 과거 누드화에 등장한 여인들의 풍성한 몸을 바라보며 자신감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작가의 첫 작품집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 성적인 경험들을 작가가 어떻게 다룰 것인지, 더 나아가서 소박한 전망을 어떻게 구체적이고 힘 있는 것으로 변화시킬지를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그런데 첫 작품집이 약 4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왔다니, 지금 작품들은 어떠할지 알 순 없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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