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뻐?
도리스 되리 지음, 박민수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30-40대 여성들 삶의 단면 포착
도리스 되리 단편집 《나 이뻐?》 서평


젊은 날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고, 지금 눈앞에는 늙고 추하게 변한 옛 애인이 기다리고 있다. 가난한 외국인을 도와주겠다고 마음먹은 착한 선진국(독일) 주부는 어느새 자신에게 매달리는 외국인 여성과 그녀의 가족에 대해 귀찮게 여기게 된다. 행복하리라 기대했던 결혼생활은 괴물처럼 징그럽게 다가오며, 그 같은 단조로움을 알면서도 여자들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결혼식을 올려 정해진 라이프 스타일을 따르겠다고 마음먹는다. 초심은 일상이라는 거대한 시계바퀴 속에서 점차 사라지고, 그 결과는 참담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같은 모든 사건과 일상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기억과 경험, 관계들은 그 흔적이 남아서 사람들의 일상을 감싸고 어떻게든 변화를 안겨준다.

도리스 되리의 《나 이뻐?》는 애교 가득한 제목에서 기대하기 힘든 여성의 삶과 일상에 대한 담담한 관찰이 녹아있다. 주로 지치고 자신감 없는 삼사십대 여성들의 삶의 한 단면을 갑자기 일상에 파고든 사건들을 통해 예리하게 포착해낸 그녀의 소설집은 마치 10분짜리 단편영화를 연속으로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영화 《파니핑크》의 감독이라는 전적 때문일까. 그녀는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나 장황한 묘사를 사용하지 않으며 독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 그녀는 바로 사건과 등장인물에 대한 묘사로 들어가서 빠르게 사건을 진행하며, 진부하지 않은 결말로 한 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여운을 가져다준다.

《나 이뻐?》의 여주인공들은 여성들의 경험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으며, 이는 도리스 되리의 여성주의적 시선을 잘 드러낸다. 남편과 아이에 매인 주부들은 “오래되어 말라비틀어진 빵 같은 결혼생활”에 질려 낯선 만남을 열망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정으로 돌아와 일상의 감각에 익숙해지려고 애쓴다. 《금붕어》의 루시는 남편과의 애정을 회복하기 위해 떠난 뉴욕으로의 여행에서 남편을 멀리한 채 자극적인 경험을 찾는다. 그러나 이미 습관화된 아이들에 대한 걱정과 남편에 대한 생각은 그녀를 잠식하고, 이는 아무 이유 없이 죽어버리는 금붕어로 형상화된다. 《만나》의 ‘나'는 딸 릴리를 키우다, 아이 때문에 광기에 사로잡혀 ‘괴물’이 된 자신을 상상한다. 이처럼 괴물로 형상화되는 모성애는 가정과 양육에 대한 도리스 되리의 이해가 매우 깊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한편 성장하는 딸들은 나이가 든 엄마를 부정하고, 자신의 젊은 몸매를 과시하며 자신이 성장했음을 깨닫는다. 《나 이뻐?》에서 루시의 딸 앙겔리나는 비텍스 썬글라스를 엄마 몰래 사고, 처음 만난 남자와의 데이트를 통해 변하는 자신을 느낀다. 그러나 젊은 여성들에게 안전하고 행복한 삶이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아직 젊디젊은 그녀들은 예측 불가능한 거친 삶을 열망하며 살지만, 사랑 때문에 늘 휘둘리고 고생한다. 《쉭세》의 우나는 머리칼이 아름다운 남자 데이브에게 늘 모자람을 느끼며 그에게 복종하지만 데이브는 우나에게 결코 확신을 주지 않는다. 《원더나이프》의 화자는 질투와 의심이 강한 남자 헤르만과의 결혼생활에서 남편과 섹스를 할 때만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남편의 성기를 잘라버리고 만다.

관계중심적이고, 끊임없이 관계에서 확신을 얻고 싶어하는 여성들. 그녀들은 사랑에 확신을 주지 않는 남성들 때문에 끊임없이 그들의 시선을 맞추려하고, 정해진 삶을 따라가려고 애쓰다가 어느 순간 일상을 박차고 나온다. 도리스 되리는 여성들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여성들을 만남으로서 서로 간의 처지를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자각하게 하는 방식을 택한다. 물론 이같은 자각의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으며, 고통과 눈물을 통해 비로소 여성 중심적 공감을 얻어낸다.

《신부》의 주인공은 거친 삶을 열망하며 젊은 날을 살아왔지만, 이제는 정해진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처럼 고정된 삶의 시간표를 짜야겠다고 생각하고 거금을 들여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사지만 좀처럼 젊은 날의 열정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녀는 우연히 애인이 죽은 여인을 만나 그녀에게 자신의 웨딩드레스를 입혀주면서 자신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한편 애인이 죽은 그 여자는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입고 공중 화장실에서 뜨거운 물을 틀어 김 서린 거울을 통해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하염없이 눈물 흘린다.

《누구세요》에서 생일을 맞은 여자는 자신의 마음을 읽으려 하지 않는 애인과 하릴없이 수다를 떠는 엄마로 대표되는 답답한 일상에서 도로에 버려진 할머니를 만난다. 생일파티에 할머니를 데려온 그녀는 자신과 할머니의 위치가 비슷하다고 느끼며 할머니의 팔을 쓰다듬는다. 《감각의 제국》에서 연하와 사귀는 여자는 애인과 비교해서 이미 늙어버린 자신의 몸에 위축감을 느끼다가 까페에서 자신과 비슷한 나이 든 여자를 만난다. 그녀와의 수다에서 일종의 좌절과 해방감을 느낀 그녀는 애인과의 약속을 포기하고 까페에서 만난 여자와 함께 기름기 가득한 음식을 주문한다.

이같은 자각은 변하지 않는 답답한 일상에 대한 차분한 수용으로 이어진다. 수용은 씁쓸하고 답답하다. 그러나 작가는 결말을 결코 비극적으로 조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애써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여자, 죽은 애인을 잊지 못해 자동차 위에서 뛰는 여자, 떠난 남편 때문에 무너진 여자 -이 모든 여자들의 모습을 따뜻하게 포착함으로서 그녀들이 어떻게든 기억과 관계가 남긴 흔적을 안고 어떻게든 살아갈 것임을 이야기해준다.

《나 이뻐?》는 사건 전개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하며, 친절한 설명과 담백한 묘사로 쉽게 읽히는 소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삶에 대한 작가의 만만치 않은 이해 덕에 상당한 감동을 전해준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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