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스케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2
도리스 레싱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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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한 순간포착의 묘미
도리스 레싱 단편집 《런던 스케치》


도리스 레싱의 단편집 《런던 스케치》가 출간됐다. 도리스 레싱은 영국의 대표적인 여성작가로 1950년 등단 이후 줄곧 페미니즘적 경향이 강하게 엿보이는 소설들을 발표해왔다. 주요 작품으로 《풀잎은 노래한다》 《폭력의 아이들》 《황금노트북》등이 있으며 그 가운데 《황금노트북》 《생존자의 회고록》 《다섯째아이》등은 한국에도 출간됐다.

도리스 레싱은 결혼과 이혼, 임신과 출산, 양육, 성장과 독립 등 가족(여성)에게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이해가 탁월하다. 그러나 그녀의 소설이 돋보이는 이유는, 단지 주제(혹은 소재)가 여성 문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작품 속 화자를 끊임없이 바꾸면서, 화자의 복잡한 심리상태를 풍부하게 서술한다. 그래서 결혼과 연애, 아이와 직업 등 상대방(특히 가족 구성원)에 대해 신경을 놓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기 쉬운 여자들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이 같은 섬세한 시각은 고양이에 대한 소설 《고양이는 정말 별나, 특히 루퍼스는...》에서 돋보인다. 고양이를 키우는 화자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으며, 그녀가 키운 고양이들의 행태에 대한 기록 보고서와도 같은 이 소설은 고양이를 키우면서 고양이와 끊임없이 맞춰가는 화자(인간)의 행동을 통해 역설적으로 인간을 대하는 ‘여성적인’ 방식을 보여준다.

심리의 흐름에 충실하게 서술하는 만큼, 그녀의 소설에서는 외부와 내면, 과거와 현재,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하다. 작가는 안과 밖의 경계를 넘나들며 개개인의 기억을 재생시키고, 지우고 싶은 상처에 대면하게 한다. SF소설 《생존자의 회고록》은 이 같은 모호함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소설이다. 여자는 벽을 드나들며 자신이 우연히 키우게 된 아이의 과거와 대면하고, 현실로 돌아와 그녀를 관찰하고 그녀를 키우면서 서서히 관계를 맺는다. 종말론적 세계관, 소녀의 성장과 어머니의 양육, 가족 내 외상의 ‘원형’이 그려졌다.

레싱이 바라본 가족 그리고 여성

이 같은 장편들에 비하면 《런던 스케치》는 소품이다. 런던 어느 곳에서도 마주칠 법한 상황들을 포착한 이 단편집은 그림으로 치자면, 커다란 사이즈의 유화를 그리기 위해 수없이 쏟아낸 습작같다. 각 단편소설들은 상황에 대한 묘사나, 개인에게 일어난 기막힌 사건만을 보여주고 끝난다. 그래서 단편소설만이 지닌, 순간포착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반면 미진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첫 번째 단편 《데비와 줄리》는 출산할 때가 되어 두터운 옷을 입고 생리대와 휴지를 준비하여 텅 빈 창고로 걸어가는 소년 줄리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한번의 성관계로 덜컥 임신한 줄리는 집을 나와 여자친구 데비와 함께 산다. 데비는 건전한 삶을 살아온 줄리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여자다. 그녀는 자유롭게 애인들과 만나고 자신을 괴롭히는 애인들을 쳐낸다.

줄리는 커다란 개가 짖는 창고로 가서 혼자 아이를 낳고, 흐르는 피를 천으로 받아내고, 개는 남은 핏덩어리를 먹어 치운다. 아이가 무사히 경찰서에 신고되는 모습을 확인하고, 생리대를 갈아가면서 줄리는 집으로 돌아간다. 저녁 뉴스에 그녀가 버린 아이가 등장하자, 줄리의 부모는 줄리의 이모 역시 lovechild(‘사생아’)을 낳아, 그 아이를 기르면서 살아왔다고 말해준다. 줄리만이, 혼자서 아이를 낳은 것이 아니었던 것. 줄리는 아이에 대한 생각을 억누른 채 “이제 난 세상을 알아. 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어”를 외치면서 잠이 든다. 《줄리와 데비》는 또래 여자친구와의 미묘한 감정선, 아이를 낳은 여자만이 알 수 있는 처절한 경험, 부모와의 단절 등 사춘기 소녀가 ‘어른’이라는 다른 세계로 들어설 때 으레 겪는 외로운 상황에 대한 스케치다.

혼자 자라나는 딸들이 있다면, 어떻게든 자식을 제 손으로 키우는 어머니들도 있다. 도리스 레싱은 ‘어쩔 수 없이’ 아이를 키우게 된 어머니들의 아이러니한 상황 묘사를 통해 신화화된 모성애를 부정한다. 《장애아의 어머니》에는 딸이 특수교육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인정하지 않는 어머니가 등장한다. 사회복지사는 임무를 다하기 위해 어머니를 설득하나, 가족 속에서 ‘정상’으로 살고 있는 딸을 굳이 꺼내서 특수교육학교에 집어넣겠다는 요구는 어머니에게 부당하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승인이 있어야만 특수교육학교에 입학 가능한 가부장적 조건을 이용하여, 사회복지사가 방문할 때마다 남편을 몰아내고 아이를 지킨다. 어쩌면 ‘괴물’같은 모성애다. 《참새들》은 자식을 가족에서 내보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와 서서히 아이를 독립시키려는 어머니의 대립이 참새떼에 대한 비유로 표현된다. 이는 여성과 남성의 시각차이자 되도록 온전하게 사람을 세워주려는 ‘여성적인’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편 《사회 복지부》에서는 사회 복지부의 파업으로 굶어 죽기 직전에 이르러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여자와, 그녀를 돕는 사회 복지부를 그만 둔 남자의 날카로운 대립이 그려진다. 구걸하면서도 남자를 비난하는 여자와 행정조직 내에서는 제대로 사람들의 복지를 챙길 수 없음을 한탄하는 남자. 둘의 대립은 절대 해소될 수 없고, 이는 남자와의 화해를 거부하는 여자의 태도를 통해 표현된다.

연인, 부부관계에 대한 적나라한 포착

《진실》, 《흙구덩이》는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진실》은 오랫동안 결혼한 사이였던 안젤라와 헨리, 그리고 안젤라의 새 애인 세바스천의 ‘합리적인’ 친구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헨리의 새 애인 조디의 이야기다. 안젤라와 헨리 사이를 질투하는 조디는 ‘영국적인’ 세바스천의 눈에는, 흥분한 상태에서 늘 미숙한 판단을 내리는 여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네 명의 주말 여행에서 안젤라와 헨리가 완벽하게 헤어진 것이 아님을, 그리고 세바스천 역시 그 사실과 자신의 질투를 덮은 채 합리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조디와 세바스천의 대립을 통해 드러나는 두 종류의 관계-‘애증어린 관계’와 ‘완벽하고 합리적인 관계’는 손바닥 뒤집듯이 가깝다.

《흙구덩이》에서는 10년 전에 헤어진 남편과 남편의 현 부인 로즈 때문에 또 다시 헤어지는 사라의 사연이 그려진다. 그런데 이 헤어짐은, 여자인 로즈에 대한 공감 때문이다. 남편은 자신과 너무도 닮았기에 사라를 사랑한 반면, 전형적인 ‘팜므파탈’ 로즈는 자신과 너무 달라서 사랑하게 됐고, 그래서 사라와 헤어졌다. 사라는 서서히 기억을 더듬으며 헨리와 자신을 병적으로 질투하는 로즈를 떠올린다. 흙구덩이와 같은 전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자를 잡은 여자, 로즈. 사라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어느 새 로즈로 바뀌는 것을 바라보며, 로즈의 삶에 공감하게 되고 그녀의 요란한 질투에 대항하기 보다는 자신이 떠나야겠다고 결심한다.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레싱의 여성들

작가는 가족과 여성 문제를 개인 대 개인의 관계 차원으로 확장해서 그려내,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여성의 삶에 대해 깊은 공감과 연민을 부여한다. 《런던 스케치》 속 여자들의 삶은, 얼핏 보기에 참으로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녀들은 특수기관에 맡겨도 괜찮은 아이를 자신이 기르겠다고 고집부리고(사회 복지부), 얼떨결에 임신하고서 전전긍긍하다가 텅 빈 창고에서 혼자 힘으로 출산하고(데비와 줄리), 10년 전에 헤어진 남편을 다시 만나도 남편의 현재 부인이 두려워 그 자리를 떠나버린다(흙구덩이). 그러나 이처럼 쉽게 헤어지지 못하고, 쉽게 버리지 못해 파괴적이기까지 한 관계들은 일상다반사다. 일상다반사니만큼, 그렇게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녀들도 상황이 아이러니하고 기가 막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다고 해서 실천하기란 어려운 법.

어려운 이유는, 결혼이나 양육 등이 누군가 대체 가능한 ‘사건’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의 관계 문제이기 때문이다. 상대의 상황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와 연민이 있는 한, 책임감이 생겨나고 이는 쉽게 잘라내기 어렵다. 여기서 레싱이 그려내는 ‘상대’는 남성이 아닌, 여성과 어린이다.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거나, 자신이 낳은 존재와의 관계는 단칼에 정리되지 않는 것. 물론 그녀의 소설은 ‘어쩔 수 없는’ 여성의 삶이 ‘사는 건 다 그런 것’이라는 식의 감상주의로 빠지지는 않는다. 작가는 관계의 문제와 더불어 개인의 트라우마와 기억을 집요하게 다룸으로써, 아픔과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삶에서 이 같은 좌절의 경험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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