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가 마약 중독의 원료이듯 - 남북문학 연구 경진 국문학 3
남원진 지음 / 경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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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9월 1일 백색작전이라고 불리는 폴란드침공전을 필두로 2차세계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부분 독일군이 우세한 전력으로 모든 전선을 압도했을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전선에서는 공자의 입장인 독일의 하드웨어는 방자의 하드웨어보다 못하다못해 1938년 수데텐란트를 합병한 것을 시작으로 1939년 전부 합병했었던 체코에서 생산된 전차를 38( t)라는 제식명을 부여하여 사용하였을 정도로 독일의 하드웨어는 열악하였습니다. 초기 전차였던 1호전차와 2호전차는 탱켓(Tankette)형태에 가까웠습니다. 백색작전에서도 폴란드군이 별다른 항전을 하지 않고 추풍낙엽처럼 무너진 것으로 묘사되지만 폴란드군의 항전은 생각이상으로 격렬하여 독일육군총사령부(OKH)에서는 프랑스 침공전 쿠데타를 모의할 정도로 프랑스 침공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게끔 하였습니다.

1940년 폰 만슈타인의 낫질작전으로 대표되는 황색작전에서는 프랑스의 전력을 압도했을 것으로 대부분 생각하고 있고 전격전(Blitzkrieg)이 일사천리로 전개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만 프랑스의 육군은 세계1위에 근접할 정도로 육군강국이었으며 1호전차와 2호전차처럼 팅켓의 형태를 띠지않고 회전형 포탑을 탑재한 최초의 현대식 전차 FT-17르노전차를 보유하고 있던 전차강국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1차세계대전에서 솜과 이프르 전선에서처럼 고착상태로 참호전형태를 띄기는 커녕 프랑스가 정녕 육군강국이 맞는가는 의문이 들 정도로 급속도로 무너졌으며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영국육군 30만명은 됭케르크에서 고립되었습니다. 이후 됭케르크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대철수작전이 성공하였습니다만 모든 영국육군이 빠져나간 것은 아니여서 왕립전차사단 등 대규모의 전력이 프랑스 전역에서 제대로 된 저항 한번 하지 못한채 독일군에게 무너졌습니다.

위의 사항들은 전사(戰史)를 조금이라도 배우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을 들어봤음직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많게는 하루 200KM의 진군속도를 낼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할 수 있는 책은 보지 못했었습니다. 어렴풋이 기계화된 보병이 주공을 이루어 종심을 돌파하였고 후방에서 조공을 이루는 보병이 주공인 기계화사단을 보조하여 전선을 정리하였기에 이루어낼 수 있는 진군속도였다 이렇게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진군속도의 원천은 제가 평소 알고있던 지식과 사뭇 다른 모습을 띄고 있었습니다.

과거 일부 군사블로그(출처: August의 군사세계)에서 독일군의 군수용 마약을 생산했었고 일부 부대에서 그 마약을 사용하여 야간전투에서도 활용하였다는 일부글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만 독일의 마약이 이렇게까지 깊숙이 파고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히틀러의 주치의로 알려져있는 모렐(처음에는 히틀러의 소방수라고 정평이 나있는 모델 장군,Walter Model,으로 착각했었습니다.)이 각종 칵테일 요법으로 히틀러에게 마약 혹은 비타민제를 투입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헤르만 괴링은 모르핀을 과다 투여했던 것으로 유명하기도 하였습니다. 1차세계대전에서 공군에이스로 유명해졌으며 히틀러가 괴링의 인기를 이용하기 위해 나치당에 영입할 정도로 괴링은 히틀러에게 초기 없어서 안될 인물이기도 했으며 초기 전격전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JU-87 근접폭격기의 운용에 있어서도 출중한 능력(?)을 보여주었으나 과도한 전시성 작전으로 독일 공군(Luftwaffe)을 무리하게 소모하였으며 바다사자 작전의 일환인 영국항공전(Battle of Britain)에서 상당수의 공군력을 상실했던 이유로 마약의 남용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괴링은 1942년에서 1943년 2월까지 있었던 데미얀스크 전투에서 독일군이 포위되었음에도 공군수송을 통해 포위망을 돌파하였던 경험을 토대로 1942년 6월 스탈린그라드에서 파울루스의 제6군이 포위되었을 때에도 항공수송을 통해 물자를 보급하면 포위망을 뚫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으나 결국은 최초의 항복한 원수를 만들어낸 오명을 남긴 사례로 남았습니다. 결국 이 일을 시작으로 괴링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었으며 괴링은 남부로 도피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도 미군에게 체포될 당시 보통 사람이 사용할 모르핀의 20배이상되는 모르핀을 투여했다는 사실은 독일에서 생각이상으로 마약이 남용되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초기 됭케르크에서 구데리안의 주장대로 포위망을 형성하여 압박을 했었다면 영국의 육군은 전투불능상태가 되었을 것이고 이후 바다사자 작전에서도 영국본토까지 상륙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을 만큼 히틀러의 가장 큰 실책으로 손꼽는 사건이 "마약 중독과 전쟁의 시대"에서는 히틀러의 마약남용으로 빚어진 사례로 설명하고 있었으며 꽤 신뢰성있는 자료를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에르빈 롬멜조차 마약을 애용했을 정도로 독일 내에서 상상이상으로 마약이 남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책이었습니다.

독일의 기술력은 전후 연합군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가난한 자의 소총이라고 불리는 AK-47소총은 독일군의 Stg-44소총에서 비롯되었으며 메셔슈미트 Me-262는 이후 소련의 Mig-15와 미국의 F-86세이버 전투기에도 영향을 주었고 앞서 말한 파생형은 독일에서 만들었던 외형과 거의 흡사할 정도로 그대로 차용했음을 보여주는 사례기도 합니다. 이 외에 독일의 마약생산기술이 발전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평소 접해보기 힘든 좋은 사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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