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7:5에서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맟기라˝고 하는데, 우리의 길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을 때 우리는 온유함의 길을 걷게 된다. 여기서 내려놓음은 나를 비우고 하나님께 맡기는 삶의 결단이다. 이렇게 내가 비워지고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삶은 `땅`을 차지하는 삶이다. 여기서 땅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추구함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이 나를 주관할 때 우리 삶의 영역 가운데 하나님의 순결한 영이 부어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게 된다.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이 우리를 거쳐서 우리 주변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으로 채움 받은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넓히시고 그 분의 영역을 세상 가운데 확장시키신다. 영적 세계에서 비움은 채우기 위한 전제조건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내려놓는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신령한 것으로 채우기 위해서이다. 내 속의 옛 사람이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때 비로소 진정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고 이 능력을 통해 죽은 영혼이 소생하고 하나님나라가 확장될 것이다. 내 욕구와 계획과 자아를 하나님께 의탁할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을 내 안에 부으시고 나로 주님안에서 충만한 자로 세우셔서 내가 일하게 하신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시 119:105)라고 시편 시자가 고백한 것처럼 주의 말씀은 내가 가야 할 곳을 인도하시고 넘어지지 않도록 보호하신다. 그러나 저 멀리 있는 곳에 대해서는 방향만 제시하실 뿐 그곳에서 실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는 가리시고 보여주지 않으신다. 그것은 오직 순종으로 그 길을 택해 걸어가는 과정에서만 볼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복 많은 곳으로 간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복 많은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자면 복의 통로가 되라는 갓이다. 그래서 복이 없는 땅으로 가서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복을 나누라는 것이다.
나는 내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환경은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죄의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게 된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 19절에서 고백했듯이,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기 쉬운 우리의 죄인 된 속성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빛 가운데 우리의 생각과 삶의 모습들이 비쳐질 때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괴로워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 나라로 세우셨음레도 불구하고(출19:6),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를 원하지 않고 모세가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전해주기를 원했던 것이다.(출20:19) 또한 그 때문에 베드로가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님의 물고기 기적을 보고 자신은 죄인이니 자신을 떠나달라고 고백했던 것이다(눅5:8)

예수님이 정죄를 경계하시면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판단받는 사람을 보호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판단하는 사람을 그 판단의 흉악한 결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서이다. 즉, 우리가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판단이 가져다주는 크나큰 영적 해악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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