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순수한 주의집중’이라는 표현으로 위빠사나 명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순수한 주의집중은 어떤 반응도 수용하며, 반응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선택 없는 알아차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알아차림의 대상을 하나로 고정하지 않고 의식을 확장해서 현재 이 순간에 몸과 마음에 알아지는 것을 비판단적으로 지켜보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든 경험하는 것에 대한 견해가 일어난다. 마음에서 좋고 싫음의 이름표를 계속 붙이고 있다. 그래서 어떤 경험이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학습된 관념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재해석은 마음을 번뇌로 인도한다.
순수한 주의집중은 마음을 지금 이 순간으로 고정시킴으로써 번뇌를 줄이고 현존의 기쁨을 누리게 한다.
저자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고르게 걸쳐있는(떠있는) 주의’와의 비교를 하고 있다.
‘고르게 떠있는 주의(잔잔히 떠있는 주의력)’는 정신분석 치료에서 내담자의 자유연상(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든 어떤 선택이나 평가 없이 다 말로 표현하는 것), 분석가의 ‘고르게 떠있는 주의’를 말한다. 분석가는 어떤 특별한 것을 명심하려하지 않고 지금 들리는 것, 보이는 것, 자기 내부로부터 떠오르는 것 등, 이 모든 것에 골고루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인데, 분석가의 이러한 주의는 조급하게 초점 잡는 것을 막아주기도 한다. 즉 정신분석 기법의 특징 중의 하나는 내담자와 분석가 모두 자기 속에서 떠오르는 것들에 대해 어떤 의식적이고 인위적인 영향이나, 판단, 선택, 해석 등을 배제한 채, 자신의 무의식적 활동에 자신을 맡길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명상에서 말하는 ‘순수한 주의집중’과 정신분석의 ‘고르게 떠있는 주의’는 과연 동일한가? 제한하는 범위가 다른 점이 있다. 명상의 순수한 주의집중은 정신분석에서의 치료적인 순간에서의 의도적 행위와는 행해지는 시공간의 차이가 있다. 명상은 순수한 주의집중 즉, 사띠는 지속성을 중시한다. 수행은 일상에서 계속 이어져야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의 ‘고르게 떠있는 주의’는 치료적 순간에 내담자와 분석가가 가져야 할 태도에 국한된다. 아울러 정신분석에서의 알아차림의 대상은(내담자는 등을 지고 카우치에 누워있기에) 알아차림의 대상 중 마음의 작용에 더 많이 치우쳐 있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상담을 하면서 열려있는 알아차림, 순수한 주의집중 등의 의식의 깨어있음을 활용하고 있다. 이는 상담에 매우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마음챙김을 하면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향하는 전이와 상담자 자신이 내담자에게 향하는 역전이를 힘을 들이지 않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이와 역전이를 치료의 매우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는 정신분석에서는 ‘고르게 떠있는 주의’가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정신분석은 치료를 위해 무의식(과거)에 초점을 둔다. 특정 과거의 사건을 연상함으로써 문제의 원인을 찾는다. 그러나 불교의 수행은 과거로 가지 않는다. 과거로 가는 마음을 단지 지켜볼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 주의를 기울임으로 현재에서 문제와 답을 찾는 것이다. 왜 저자는 정신분석과 불교를 심리학으로 연결하려고 했을까? 왠지 불교와 정신분석간의 유사점을 어색하게 찾는 느낌이 드는 것이 나의 솔직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