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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명리학과 만나다 - 기독교와 명리학의 공존은 가능한가?
이남호 지음 / 훈스토리북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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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리지 않는 만남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위한 각각의 모습과 형태를 학문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와 명리학이 어떻게 인간과 마주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다른점과 유사점이 있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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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명리학과 만나다 - 기독교와 명리학의 공존은 가능한가?
이남호 지음 / 훈스토리북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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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명리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지 않으면 저술하기 힘든 책이다. 서양에서 건너온 기독교는 명리학을 어떤 각도로 보고 있었을까? 미신으로 불리지 않았을까 한다. 기독교 스스로는 영성과 하느님의 신비를 지닌 거대한 종교로 생각하며 다른 사상이나 종교 그리고 문화와 융화되는 것을 꺼려하는 느낌이다. 이 책은 신부님이 쓴 책이다. 저자는 기독교의 진리를 나누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동양 사상을 공부했다는 것에 큰 관심이 간다. 어떤 종교이건 스스로 만들어 진 것은 없다. 그 시대의 문화와 정치 그리고 다른 종교와의 결합으로 종교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기에 어떤 종교도 자신의 우월성을 강조할 수 없다. 저자의 용기있는 학문적 도전이 이렇게 좋은 책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종교의 두터운 성벽을 조금씩 허물고 다른 사상과의 친교를 만드는 연구가 많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저자의 연구와 집필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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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명리학과 만나다 - 기독교와 명리학의 공존은 가능한가?
이남호 지음 / 훈스토리북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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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명리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지 않으면 저술하기 힘든 책이다. 서양에서 건너온 기독교는 명리학을 어떤 각도로 보고 있었을까? 미신으로 불리지 않았을까 한다. 기독교 스스로는 영성과 하느님의 신비를 지닌 거대한 종교로 생각하며 다른 사상이나 종교 그리고 문화와 융화되는 것을 꺼려하는 느낌이다. 이 책은 신부님이 쓴 책이다. 저자는 기독교의 진리를 나누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동양 사상을 공부했다는 것에 큰 관심이 간다. 어떤 종교이건 스스로 만들어 진 것은 없다. 그 시대의 문화와 정치 그리고 다른 종교와의 결합으로 종교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기에 어떤 종교도 자신의 우월성을 강조할 수 없다. 저자의 용기있는 학문적 도전이 이렇게 좋은 책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종교의 두터운 성벽을 조금씩 허물고 다른 사상과의 친교를 만드는 연구가 많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저자의 연구와 집필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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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심리학 - 상담학 총서 상담학총서
존 웰우드 지음, 김명권.주혜명 옮김 / 학지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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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내가 마음이 분주한 상태에서 접해서 그런지 내용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어쩐지 눈을 활자를 보지만 마음은 다른 곳으로 향하는 시간이 반복되며 독서를 하는 것 같았다.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많은 부분 이해하지 못했기에 다음에 다시한번 읽어야겠다는 마음이다.

 

저자가 말하는 순수의식에 대한 표현은 나에게 깊은 공감을 주었다. ‘열린 의식의 수준에서는 명상 수행자는 현상적인 세계와 직접 소통함으로써 새로운 깊이의 통찰을 얻는다. 개념화된 마음은 지각과 연결되지 않으므로 눈에서 막이 걷힌 듯 매우 정확하게 볼 수 있다. 열린 배경은 항상 존재한다. 언제라도 명상을 통하여 주의력을 개발한다면 특정한 마음-상태에 내재하는, 말로 표현할 수 없고 구체화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열린 의식을 만날 수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필자는 지식이나 관념으로 사물에 대한 앎이 아니라 그것을 현존함으로 대하는 무지의 마음이 참된 앎을 주는 것을 체험한 적이 있다. 이럴 때 외부의 세계와 내가 구분되지 않고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이 들고, 온전히 지금 이 순간에 머무름으로 인한 자유함을 경험하였었다. 저자는 아마도 이러한 체험을 경험하였으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가 말한 깨달음은 무의식의 내용이 의식으로 뚫고 나온다는 의미에서 무언가 부가적으로 첨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마음의 내용에 붙들려 있던 것을 제거한다는 점에서 감해지는 과정이다.”라는 표현은 마음에 와 닿는다.

 

저자는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융의 이론을 근거로 무의식과 비교를 하고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를 정신분석이라고 하고 있다. 융의 이론은 분석심리학이라고 한다.) 심리학에서의 무의식은 자아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라고 표현한다. 이는 무의식이란 모름의 세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선의 무념을 비교한다. 선의 무념은 자아에게 알려져 있는 상태이고, 이는 아는 자와 대상 사이의 분리가 없는 자기 인식 그 자체이다. 무념은 항상 맑게 깨어 있는 마음의 상태다.

 

심리학과 명상의 비교는 심리학의 자리와 명상의 자리를 보다 정확하게 찾아 갈 수 있고, 명상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서구인들에게 좋은 안내의 지침이 되리라 본다.

 

이 책을 읽으면서의 아쉬움은 내가 지식이 짧아서인지 큰 그림으로의 접근이 어렵다는 부분이었다. 저자가 말하려는 의도를 파악하는데 집중이 되지 않아서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갔음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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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순수한 주의집중이라는 표현으로 위빠사나 명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순수한 주의집중은 어떤 반응도 수용하며, 반응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선택 없는 알아차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알아차림의 대상을 하나로 고정하지 않고 의식을 확장해서 현재 이 순간에 몸과 마음에 알아지는 것을 비판단적으로 지켜보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든 경험하는 것에 대한 견해가 일어난다. 마음에서 좋고 싫음의 이름표를 계속 붙이고 있다. 그래서 어떤 경험이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학습된 관념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재해석은 마음을 번뇌로 인도한다.

순수한 주의집중은 마음을 지금 이 순간으로 고정시킴으로써 번뇌를 줄이고 현존의 기쁨을 누리게 한다.

 

저자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고르게 걸쳐있는(떠있는) 주의와의 비교를 하고 있다.

고르게 떠있는 주의(잔잔히 떠있는 주의력)’는 정신분석 치료에서 내담자의 자유연상(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든 어떤 선택이나 평가 없이 다 말로 표현하는 것), 분석가의 고르게 떠있는 주의를 말한다. 분석가는 어떤 특별한 것을 명심하려하지 않고 지금 들리는 것, 보이는 것, 자기 내부로부터 떠오르는 것 등, 이 모든 것에 골고루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인데, 분석가의 이러한 주의는 조급하게 초점 잡는 것을 막아주기도 한다. 즉 정신분석 기법의 특징 중의 하나는 내담자와 분석가 모두 자기 속에서 떠오르는 것들에 대해 어떤 의식적이고 인위적인 영향이나, 판단, 선택, 해석 등을 배제한 채, 자신의 무의식적 활동에 자신을 맡길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명상에서 말하는 순수한 주의집중과 정신분석의 고르게 떠있는 주의는 과연 동일한가? 제한하는 범위가 다른 점이 있다. 명상의 순수한 주의집중은 정신분석에서의 치료적인 순간에서의 의도적 행위와는 행해지는 시공간의 차이가 있다. 명상은 순수한 주의집중 즉, 사띠는 지속성을 중시한다. 수행은 일상에서 계속 이어져야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의 고르게 떠있는 주의는 치료적 순간에 내담자와 분석가가 가져야 할 태도에 국한된다. 아울러 정신분석에서의 알아차림의 대상은(내담자는 등을 지고 카우치에 누워있기에) 알아차림의 대상 중 마음의 작용에 더 많이 치우쳐 있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상담을 하면서 열려있는 알아차림, 순수한 주의집중 등의 의식의 깨어있음을 활용하고 있다. 이는 상담에 매우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마음챙김을 하면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향하는 전이와 상담자 자신이 내담자에게 향하는 역전이를 힘을 들이지 않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이와 역전이를 치료의 매우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는 정신분석에서는 고르게 떠있는 주의가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정신분석은 치료를 위해 무의식(과거)에 초점을 둔다. 특정 과거의 사건을 연상함으로써 문제의 원인을 찾는다. 그러나 불교의 수행은 과거로 가지 않는다. 과거로 가는 마음을 단지 지켜볼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 주의를 기울임으로 현재에서 문제와 답을 찾는 것이다. 왜 저자는 정신분석과 불교를 심리학으로 연결하려고 했을까? 왠지 불교와 정신분석간의 유사점을 어색하게 찾는 느낌이 드는 것이 나의 솔직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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