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라 불린 사람들 - 지능과 관념 · 법 · 문화 · 인종 담론이 미친 지적 장애의 역사
사이먼 재럿 지음, 최이현 옮김, 정은희 감수 / 생각이음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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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라 불린 사람들> 제목만 보고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을 들으면서도 특수교육은 늘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이 많았으며, 그중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주제는 단연 '탈시설화' 였다. 토론을 하면서도 여러 생각이 들었는데, 일단 지적장애 당사자가 아닌 내가 의견을 내도 괜찮은지에 대한 문제, 그리고 끊임없이 내가 생각하는 내용이 장애인 혐오적인지 아닌지에 관한 고민이 그것이었다. 더불어 내가 직접 지적장애인을 만난 경험이 있는지 생각해보았는데, 지적장애인을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중고교시절 '특정 학급'과 '특정 지하철' 뿐이었다. 그곳이 아니면 지적장애인들은 내가 볼 수 없는 시설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터였다. 사회에서 내가 본 지적장애인들의 일부는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모습으로 비춰졌다. 그래서 '탈시설화'에 내가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항상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 책은 지적 장애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정신질환은 그 스스로 기록을 남길 수 있지만 지적장애는 자신에 대한 기록을 남길 수 없다. 더구나 탁월한 지능을 활용하여 연구에 매진하는 학자들은 지적 장애나 낮은 지능에 대한 관심을 잘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저자는 가혹하게 소외되고 배제당한 존재가 아닌 일상에서 만나는 사회 구성원의 면모를 찾기 위해 당시 일상생활 자료를 분석해 기록하였다. 지적장애인들은 이전에는 분명한 사회의 일원이었으나 18세기 초를 기점으로 배제당했다. 이후의 역사는 지적장애인들이 사회로 돌아오기 위해 벌인 투쟁이었다.


18세기 이전

백치(과거 지적장애, ‘선천적 바보’를 일컫는 표현)는 우수한 혈통을 위협하는 존재였으며 재산 유지에 문제가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재산을 관리하기 어렵다고 여겨진 존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이나 영주는 백치의 재산을 물려받는 대신 이들을 돌봐줘야 했다. 당시 법 이론에서는 백치를 일상적인 사회적 거래를 이해하지 못해 잘 속고 나약한 자로 파악했고, 이론적으로는 군주의 소유물로 생각했다. 법정에서는 이들의 가족과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그를 적극적으로 변호한다면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관계망이 안전하게 작동한다고 판단하여 관대한 처분을 내려주었다.


18세기

18세기 구전설화에서는 지능은 떨어져도 마음씨가 좋은 백치가 등장한다. 18세기 일상 사회에서는 백치가 놀려먹기 좋지만 나름 본받을 만한 점이 있는 지역 구성원으로 여겨졌다. 당시 사람들은 백치가 외형적 특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림에서 대부분 백치는 코가 크고 늘어진 입술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백치에 대한 외형적 편견은 유럽인들이 해외로 진출하면서 다양한 인종과 맞닥뜨리며 인종주의와 결합되게 된다. 유럽인들은 유럽의 우월한 문명을 목도하고도 외부인들이 아무런 관심과 지적 흥미를 보이지 않는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유럽인들은 야만인들의 모습을 백치 개념과 연결지어 설명했다. 야만인들의 게으름, 관찰되지 않는 지적 활동과 성적 수치심, 왕성한 식습관은 백치의 그것이었다. 야만인의 멍한 표정, 튀어나온 입, 처진 눈 등의 외형적 특성은 백치의 그것과 일치했다. 유럽인들은 비유럽인들의 자원을 차지하고 비유럽인들을 지배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19세기

19세기에는 의료계에 변화가 생겼다.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백치를 이제 치료 가능한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사회 법규에 따를 수도 없고 이해조차 못 하는 백치는 자신의 행동을 책임지기 위해 시설에 격리되어야 했다.

계몽주의와 혁명, 선거권 및 교육의 확대를 거치면서 백치는 더 이상 우스운 사람이 아니라 사회에서 소거되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유럽 바깥에서도 백치보다는 지능이 발달했으나 완전한 지적 능력을 갖추지 않은 치우 개념을 이용한 차별과 배제의 역사는 지속되고 있었다. 이제 극단적인 인종 차별주의가 고개를 들었다. 이들은 ‘작은머리증’에 집중하면서 지능과 두뇌 크기의 상관관계를 입증하려고 했다. 

빅토리아 시대, 국가의 중앙집권화가 진행되면서 무기력하고 위험하고 취약한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시설에 수용하는 조치가 시행되었다. 백치는 정신개혁 대상자 중 가장 열등한 집단으로 수용되었다. 19세기가 끝날 무렵 사람들은 백치를 동정하고 이따금 혐오하거나 두려워하면서 이들과 떨어져 있고 싶어 했다.

우생학은 백치를 인류 전체의 지능을 저하시킬 수 있는 존재로 간주했다. 우생학의 전파는 사람들로 하여금 낮은 지능에 대한 공포심을 갖게 했다. 지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심리학계에서 IQ가 개발되었다. IQ는 절대적인 지능 평가 지표로 사람의 모든 지능이 평가되는 잣대로 활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인종의 지능이 백인보다 열등하다고 규정됐다. 


20세기

우생학이 극에 달했을 때 나치 독일에서는 ‘퇴보한’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해 단종 수술을 실시했다. 1939년에는 장애가 있는 성인을 대상으로 학살하는 T4 프로젝트가 시행되었다. 여기에 참여했던 의료인들은 학살에 참여한 이유를 비참한 생명의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주기 위해 참여했다고 대답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치의 만행이 밝혀짐에 따라 우생학은 급격히 꺾이고 정신결함자를 제거하고 싶은 욕구가 급감한다. 그러나 우생학적 인식은 전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존속하고 있었다. 기존 시설의 많은 환자와 함께 계속해서 새로운 장애인들이 시설로 유입됨에 따라 이들은 조용하지만 확고하게 시설로 수용되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시설로 보내지 않고 직접 키울 권리를 주장했다.

일련의 시설 비리 사건과 학대 사건이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배타적인 고립주의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제 정신병원에 수용되던 시기는 끝났다. 이제부터는 사회모델이 보편화되었다. 핸디캡은 평범한 생활을 방해하는 일련의 사회적 장애물이 되었다. 지역사회는 이런 어려움을 최소화하고 일상에서 겪는 곤란한 문제들을 보조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다. 그렇게 탈시설화 지역서비스가 시작되었다. 이들의 존재가 다시 지역사회에서 가시화됨에 따라 사회이론가들은 이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였다. 지역으로 돌아온 이들은 장애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정신적 감옥에 갇힌 상태였다. 사회이론가들은 지적장애인의 삶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변해야만 이들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고 낙인이 벗겨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쟁점은 이들이 진정한 지역사회 ‘구성원’이 되는가에 대한 문제였다. 지적장애인이 특정 조건을 만족시켜야만 지역사회 구성원이 되는 시혜적 모델을 철폐하고 지적장애인들에게도 삶의 가치가 있으며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 책을 읽고 나서

일단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탈시설화에 대한 생각이 분명해진 것은 아니었다. 지적장애에 대한 이해가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탈시설화가 어떤 맥락에서 필요한 일인지 역사적인 맥락에 비추어 볼 수는 있었다. 책을 읽고 나서도 난제는 여전했다. 지적장애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들에게 어떤 일이 바람직한지는 내가 쉽사리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그럼에도 탈시설화 운동에 대한 맥락을 안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맥락을 모르고 입장을 정하는 것과 맥락을 알고 사회 공론장에 참여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확실한 것은 지적장애인들도 인격이 있으며, 사회가 이들에게 맞출 필요성이 있다는 점이다. 시민으로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 사회가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해본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할 만하다.

저자가 탈시설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기 때문에 장애라는 관념이 없이 다 같이 마을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칭찬하는, 다소 과거를 낭만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한계는 존재한다. 또한 지적장애의 중요한 논의점 중 하나인 성폭력이나 성교육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기 때문에 이런 내용을 기대한 사람이라면 다른 책을 찾는 것을 추천한다.


본 서평은 부흥 카페 서평 이벤트(https://cafe.naver.com/booheong?iframe_url_utf8=%2FArticleRead.nhn%253Fclubid%3D10758331%2526articleid%3D218999%2526commentFocus%3Dtrue)에 응하여 작성되었습니다.

계속 살았다면 이 가엾은 녀석은 장애 때문에 점점 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행해졌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이 더 낫습니다, 선생님. 암요, 암요, 지금이 더 낫고 말고요. - P194

여기서 디킨스는 자의식이 생긴 백치는 오직 죽기만을 바란다고 암시한다. 세상에서 자신이 처한 위치를 깨달은 치우보다 아무것도 모른 채 히죽히죽 공허하게 웃는 백치가 더 낫다는 이야기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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