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전영애.박광자 옮김 / 청미래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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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부르봉 왕가는 꽤 초반에 제거된다. 그렇기에 혁명기 프랑스 왕실에 대한 인상은 흐릿했으며,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사람들이라는 인식 정도만 있었다.

스테판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라는 책을 고른 건 가벼운 이유였다.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이상할 정도로 팬이 많다. 보통 망국의 마지막 왕비가 미디어에서 많이 다루어지기는 해도, 마리는 특히 우호적인 평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프랑스 혁명기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예시로 쓰일 정도이다. 그 개인에게 어떤 매력이 있을지 궁금해서 읽게 되었다.

스테판 츠바이크의 손끝에서 재생된 마리의 삶은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미국 하이틴 드라마 여자 주인공같이 다소 철없고 발랄한 성격에 인기 많은 소위 인싸였다. 보통 사람의 감수성을 지닌 마리가 본인의 위치를 모르고 행동해서 그것이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는 불행을 보았고, 죽음 앞에서는 의연해지는 모습은 나를 매료시켰다. 그녀의 심리를 깊이 조명하고 복원했다는 점에서 스테판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완벽한 변호인일지도 모른다.

책을 덮고 나니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호의가 강렬하게 남음과 동시에 회의감이 들었다. 나는 읽는 내내 너무 열심히 마리 앙투아네트를 편들었던 것이다. 역사소설로 역사를 보게 되면 맞닥뜨리게 되는 가장 큰 오류가 바로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역사에는 정답이 없고 언제나 다양한 해석과 인과가 존재하는데, 그것을 망각하게 되는 것이다. 망각은 공감으로 이어진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면서 나 자신도 그녀의 변호인이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팬이 많은 것은 스테판의 잘못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 인물을 조명하고 그의 삶을 복원하는 것은 역사를 문화적으로 소비하는 최근의 방향이다. 확실히 소설이나 예술을 통해 보는 막연한 이미지로 역사인물을 평가하고 공감하고 끝내는 동질감을 느끼는 상황이 만연하다. 네이버 웹툰을 점령한 웹소설 원작 작품의 내용을 봐도 알 수 있다. 로맨스 판타지 장르에서 유럽 근세를 배경으로 한 공녀나 공주가 나오지 않는 작품은 드물다. 개인적으로는 재벌드라마의 변주라고 생각한다. 계급이 없어진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위 계급을 동경하는 심리를 반영하여 욕구를 대리 해소시켜주는 현상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현상이 문제 있는 현상일까?

일각에서는 이런 현상도 문제라고 지적하는 모양이나 나는, 공감하는 대상의 계급이 나와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는 않다 생각한다. 그보다는 작가가 인도하는 전철을 생각 없이 밟고 작가가 그려낸 방식의 실존인물을 마치 진짜라고 착각하고, 작가가 말하는 대로 수용하는 것이 훨씬 위험하다. 수용은 뇌를 게으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신이 직접 해당 인물의 자료를 찾아보고 조사하지 않으면 나는 그 인물을 모르는 것이다. 책 한 권을 읽고 어떤 ‘사실’을 판단한다면 그것은 독자가 작가의 생각에만 의존하고 판단의 책임을 떠넘기는 일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독자는 실제 사건과 작가를 분리하고, 자신과 작가도 분리해 놓을 필요성이 있다.

스테판 츠바이크처럼 역사를 소설처럼 가공시켜 대중들에게 쉽게 전달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창작을 실제의 영역으로 착각하기도 점점 쉬워지고 있다. 그런 만큼 독자의 역할도 커진다고 느끼게 되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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