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나의 작은 헌책방 -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에 관하여
다나카 미호 지음, 김영배 옮김 / 허클베리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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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이 들고 나면서 생긴 조수 웅덩이에 붙어사는 말미잘 같은 생물이 살아가는 방식을 ‘고착생활’이라고 한다는데, 계산대에 가만히 앉아서 거의 꼼짝 안 하는 제 모습과 어딘가 비슷한 듯합니다. 언뜻 보면 따분해 보이지만, 사실 그 자리는 ‘앉아 있기만 해도’ 여러 가지 일이 밀려드는 아찔한 세계. 생각지도 않은 일의 연속. 생각해보면 한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삶이란 게 참 별거 아니구나 하고 매일 느끼고 있습니다.

"가게는 시작하기 전까지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생각할 때가 가장 즐겁지. 막상 열고 나면 그때부터 매일매일 같은 일의 반복이거든."

그래도 보통 이런 걸 보면 ‘아, 맞아. 그랬었지’ 하고 기억이 나면서 무릎을 탁하고 칠 법도 한데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고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보아도 이 모든 일이 하루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거 정말이야?’라고 스스로 의심하게 되고.

"어떤 규모의 가게든 가장 큰 일이 매달 내야 하는 월세야"라는 말을 지금도 저는 월말마다 되새깁니다.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작가인 ‘저’에게 "혼자 시작할 생각을 하다니 훌륭하군"이라는 말을 들은 소녀는 아무렇지 않게 "제가 제멋대로라서 회사 생활이 안 맞아요"라고 대답합니다.

7시쯤에 가게 문을 닫고 영업 중에는 할 수 없었던 사무 처리나 책장 정리 등을 한동안 합니다. 아무한테도 방해받지 않고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이 시간은 하루 중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입니다. 이런 시간을 나만의 시간으로 쓸 수 있게 된 건 비교적 최근 일입니다. 책장에 진열할 책도 별로 없이 시작한 헌책방. 처음에는 책만 팔아서는 가게를 운영하기 어려웠습니다.
역 안에 자리한 커피 체인점, 빵집 주방, 편의점, 우체국 내근 업무 등 가게 영업시간과 겹치지 않는 이른 아침이나 밤중에 한 아르바이트는 열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휴일 다음 날의 우울함.

마침 그때, 미술 작가인 나가이 히로시 씨가 주관하고 있던 ≪선라이트 랩≫이라는 작은 잡지에 「이끼 관찰 일상」이라는 이끼에 관한 글을 쓴 일이 계기가 되어 ≪쿠넬≫과 ≪브루터스≫라는 잡지에서 저를 취재하러 왔습니다. 헌책방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이끼를 좋아하는 약간 특이한 여성 점주’라는 관점으로 저를 취재했습니다. 막상 저 자신도 도대체 무엇이 관심을 끌었는지도 잘 모르는 채 기사가 실렸는데, 그 덕분에 놀랄 정도로 많은 분이 ‘구라시키에 이상한 헌책방이 있다’고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제가 지금까지 이렇게 가게를 계속할 수 있었던 하나의 동인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목숨에는 의지할 곳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때 절감했습니다.

이제까지 아르바이트에 빼앗겼던 에너지를 모두 가게로 쏟으니 매일매일 하는 책장 정리, 창문 닦기 같은 일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즐거운지. 지난 10년 동안 제가 꿈에 그리던 생활이었습니다.

헌책방 책장은 손이 닿으면 닿을수록 좋아진다고 하는데, 바로 그 말대로 조금씩이지만 가게의 책들이 팔리게 되었습니다

가게 앞에 ‘책을 팔아주세요’ 또는 ‘성실 매입’ 같은 문구를 써 붙여 놓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무엇을 얼마에 사면 좋을지 전혀 감이 없는 상태. 매입 가격이 불만인 손님이 "누굴 바보로 아나! 어디서 아마추어 주제에"라고 화를 낸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헌책방의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입니다. 점주가 태어나서 처음 접하는 분야의 책을 매입하고 진열했더니 지나가던 사람이 들어와서 덤벼들 듯 사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때 서서 읽기를 꾸지람 들은 초등학생은 지금은 당시의 모리카와 씨 나이를 뛰어넘었고, 그리고 그와 자주 얼굴을 마주하고서는 그날의 매출이 얼마나 적은지 서로 자랑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3학년 마지막 독후감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에 대해서 평소대로 겨우 세 줄만 써서 선생님께 냈더니 빨간 펜으로 "이다음이 더 읽고 싶습니다"라는 말이 덧붙여져서 돌아왔습니다.
그때 말씀하셨던 ‘이다음’은 아니지만, 이 책이 나오면 선생님께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이끼 식물은 균류와 조류와 양치식물의 중간쯤 되는 생물인데 동물에 빗대면 양서류와 같은 존재. 몇억 년 전에 처음으로 바다에서 뭍으로 올라온 식물이라고 합니다.
그랬던 식물이 지금도 우리 주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 있는 모습을 보면 나가세 기요코의 「이끼에 대하여」라는 시에 있는 "아, 인간은 졌구나"라는 시구가 떠오릅니다.
그렇다고 이끼한테 이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야말로 정말로 무너지기 쉽고 미덥지 못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땅바닥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으면서도 누구 하나 귀찮게 하는 일 없이 조용하고 깔끔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이끼의 흔들리지 않는 든든함 앞에서 왠지 부끄러워집니다.

문 닫기 직전, 벌써 한 시간이 넘도록 이리저리 책을 뜯어보면서 버티고 있던 손님에게 결국 100엔짜리 문고본 책 한 권도 팔지 못하고 하루가 끝나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책이 팔리고 안 팔리고는 둘째 치고, 이렇게 마음껏 가게를 열어 두고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헌책방을 하면서 가장 즐거운 일은 평소 자신의 관심 범위 안에서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책과 만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앞에는 아까 책장에서 빼놓았던 『오자키 가즈오·간바야시 아카쓰키·나가이 다쓰오』 한 권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때의 기쁨은 더할 나위 없을 정도였습니다. 꾀죄죄한 전집 가운데 한 권일 뿐인데 책이 빛나 보이다니 이런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습니다.

고집스럽다고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처음부터 저의 장래 희망은 ‘헌책방의 이끼 할머니’. 그게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이끼처럼 가늘고 가는 틈새의 길도 찾아보려고 하면 어딘가쯤에서 보일지도 모릅니다.

"왜(좀 더 화려한 식물이 아니고) 이끼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받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꽤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 책의 머리말에도 썼지만, 바다냐 산이냐, 개냐 고양이냐, 통팥이냐 간팥이냐 하는 질문의 답에 별로 이유다운 이유가 없는 것처럼 작고 평범한 생명체를 좋아하는 일에도 특별한 이유는 없고 "타고난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는 ‘좋아하지 않으면 못 할 일’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헌책방도 그중에 하나.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면 계속할 마음만 있다면 어떻게든 해나갈 수 있는 일인 것도 같습니다.

자영업은 일과 사생활의 경계가 모호해서 일하다 보면 어느새 쉬는 법을 잊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저는 밖에 나가는 일을 싫어하고 성격도 궁상스러운 편이라서.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게를 보는 일이 저에겐 가장 편안하고 즐거운 일입니다

이제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가게가 계속되는 한, 벌레문고는 바로 저 자신입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만 가게를 시작한 지 20년 가까이 지나서야 겨우 이 일이 저에게 ‘취미’가 아닌 ‘일’이 된 것이겠지요. 정기 휴일 지정은 바로 그 상징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취미를 일로 삼지 말라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저처럼 취미로 시작해서 겨우 직업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조금 붙임성이 좋아진 것 같은데"라는 말을 듣고는 합니다.

헌책방 일은 밖에서 보이는 느긋한 이미지와는 달리 상당히 중노동입니다.

너무나 붙임성이 없어서 "당신은 가게를 경영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쓴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습니다만, 당시를 돌아보면 그런 말을 한 사람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진절머리가 날 정도입니다. 그러나 어떤 직업 세계에서도 적성이 완벽하게 맞는 사람만이 그 직업을 갖는 건 아닙니다. 모두 저마다의 사정과 형편이 있는 거겠지요.
그렇지만 다행히도 영세 상인에게는 필수 덕목인 ‘한곳에 가만히 붙어 있을 수 있는’ 적성만은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적성에 맞게, 가능하다면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있도록 헌책방이나 상점 주인에게 필요한 또 다른 필수 덕목도 조금씩 길러 왔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이라든가, 허세라든가, 미소라든가.

‘1, 2년 해보고 안 되면 그만두자.’ 솔직히 이런 안이한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정작 시작하고 또 계속하다 보니 도대체 헌책방이 ‘안 된다’는 게 뭔지 점점 알 수 없게 되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헌책방 일이라는 건 정말 재미있는 일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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