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이요? 그게 뭔데요?"
그러자 이모는 내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은 게 아니라고 했다. 황당하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했다. 나는 곧바로 성경공부를 가르쳐주던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서 방언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선배는 이모와 달리 오히려 방언기도를 폄하하며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이 이미 성령의 역사이고, 그것이 바로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것이 그때까지 내가 방언과 성령세례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런데 선교 훈련을 받으면서 일주일간 집중적으로 듣게 된 성령세례 강의는 내게 강한 호기심과 갈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 기회에 성령세례에 대해 확실히 알고자 성령세례와 관련된 책을 닥치는 대로 사서 읽었다. 그때 독파한 책이 베니 힌 목사님의 《안녕하세요 성령님》을 비롯해서 박영선 목사님의 《성령론》,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성령세례》 등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오늘날 성령세례로 인한 교단 간의 극단적인 갈등은 서로 미묘한 차이가 있는 ‘성령의 내주’, ‘성령충만’, ‘성령세례’라는 단어를 마구잡이로 혼동하여 사용하는 데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들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세 단어의 미묘하지만 확실한 차이는 이렇다.
성령의 내주(요 3:3,5)는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기본적인 역사로 거듭남(중생)과 동일한 개념이다. 성령충만(엡 5:18)은 거듭난 신자가 성령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성령의 인도와 주장을 지속적으로 받는 것을 말한다. 성령세례(눅 24:49 ; 행 1:5,8)는 거듭난 신자들이 성령충만 가운데 살 때 그들에게 특별한 사역을 수행시키기 위해 능력을 부어주시는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세례는 교회사적으로 하나님이 한 개인이나 집단을 능력 있는 전도자로 쓰시려고 할 때 예외적으로 일어나는 역사였다. D. L. 무디, 존 웨슬리 등은 그들의 삶이 성령세례를 받기 전후로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바뀌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롭게 창공을 날 수 있도록 ‘말씀’과 ‘성령’이라는 두 개의 날개를 주셨다. 그러나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이 때론 좌익(왼쪽 날개, 성령)으로, 또 때론 우익(오른쪽 날개, 말씀)으로 치우쳐서 결코 하늘을 날 수 없는 기형적인 새로 만든다. 마치 덩치만 컸지 절대 하늘을 날 수 없는 타조처럼 말이다. 이 전략이야말로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쓰는 가장 보편적인, 그러나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다. 8년간 UBF에서 말씀 훈련을 받은 내게 성령세례는 새로운 영적 세계에 눈뜨는 계기가 되었다. 이 영적인 경험이 내가 이스라엘에 도착하자마자 치렀던 치열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유대인은 하나님께서 열방 중에서 자기 민족을 선택하셨고 또 율법의 말씀을 주셨다는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친 민족이다. 그렇다보니 아무리 목회자라고 해도 이방인인 것은 매한가지라서 막상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그들은 무척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몸서리치게 싫어하고 선교사라고 하면 아주 학을 뗀다. 따라서 길거리에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노방전도를 하는 것은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기 쉽다. 전도를 목적으로 무차별 배포하는 신약성경도 유대인들에게는 금서요 저주스런 책이기 때문에 대부분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이런 이스라엘의 선교적 상황에서 내가 하는 침술은 유대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효과적인 접촉점이 되어주었다. 내가 만약 한의사가 아니라 일반 의사였다 해도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여타의 선교지들이 대부분 의료 수준이 열악한 제3세계인 것에 비해 이스라엘의 의료 수준과 보험 체계는 세계에서도 첨단을 자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의사로서의 특수한 나의 재능은 이방인 사역자가 이스라엘 사회에 침투할 수 있는 효과적이고 전략적인 무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알마’는 육체적인 처녀보다는 법적인 처녀에 가깝다. 히브리어에서 육체적인 처녀를 의미할 때는 ‘베툴라’라는 단어를 쓴다. 따라서 두 종류의 처녀와 관련된 히브리어 단어의 뉘앙스를 알 때 이 말씀에서 예수님을 사생아로 해석하는 유대인 랍비들의 근거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의 논리대로 하면 결혼하지 않은 여자(알마)가 애를 낳았다는 것이다. 유대인 랍비들은 여기에 덧붙여서 마리아가 이름 모를 로마 군병과 정을 통했고 그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가 예수라는 식으로 억지 해석을 하고 백성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왔다. 물론 이런 가르침은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 있었던 오랜 갈등과 반목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성경 선생인 랍비들로부터 오랜 세월 동안 이렇게 교육받아 왔기 때문에 ‘예수는 곧 사생아’라는 공식이 무의식 속에 새겨져 있다. 나는 지도교수님으로부터 이런 공격을 받고 적지 않게 당황했다. 그들의 논리에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음 들어보는 이런 주장에 맞설 만한 나만의 논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도교수님에게서 쉴 새 없이 공격을 받은 그날, 나는 집에서 히브리어 성경과 관련된 주석들을 열심히 찾아보았다. 반박할 만한 논리를 만들어 이튿날 재토론을 벌일 참이었다. 그러면서 재미난 사실을 발견했다. 70명의 유대인 랍비들이 주전 3세기쯤에 당시 세계 공용어인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에서는 이사야서 7장 14절에 나오는 ‘처녀’를 "육체적인 처녀"를 의미하는 ‘파르테노스’를 정확히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법적인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자칫 불륜으로 오해를 살 수도 있다. 또 전후 문맥을 볼 때 하나님이 그런 황당한 상황을 징조랍시고 보여주실 리가 없다. 처녀가 아이를 낳는 것이 징조가 되려면 그 처녀는 육체적인 처녀, 즉 남녀 간의 성적인 접촉이 없는 동정녀 탄생이 되어야만 하나님만이 보여주시는 특별한 징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전 3세기에 70인역 성경을 번역한 유대인 랍비들은 공통적으로 히브리어에서는 애매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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