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사람들은 현실과 낙원이라 불리는 가상세계를 기반으로 요일별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어요. 화요일이 불타는 광기의 세상이라면 목요일은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의 아침처럼 차분한 세상이었죠. 요일마다 콘셉트와 깨어있는 인격이 다른 세상!
그 엿새 동안 김달이 정말 낙원에 존재하는 건 아니다. 뇌 데이터, 혼, 영혼, 정신, 그걸 뭐라고 부르든 김달의 실체는 데이터 센터에 보관된 김달의 뇌 안에 들어 있고, 그것이 서버를 통해 낙원에 접속할 뿐이다.
p. 54
신체를 여럿이서 공용으로 사용한다는 신박한 설정이 놀랍고, 신체가 없는 이들이 존재하는 방법이 유리단지 안에 든 뇌의 형태라니 충격이었어요. 데이터 센터라는 곳에 뇌가 담긴 유리단지가 쭈욱 놓여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
현울림의 부모님과 김달의 엄마는 이 데이터 센터의 화재로 뇌가 소실되어 사망했고 그 때문에 이 아이들은 보육원에서 자랐어요.
환경 부담금을 낼 여력이 없는 사람들은 17세가 되는 해 자신의 신체를 포기하고 보디메이트를 통해 일주일 중 단 하루만 오프라인 즉, 현실 세계에서 살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공용 신체를 제공받아 울림은 ‘수인’이 되었고, 운 좋게 보육원 친구와도 같은 수요일에 만날 수 있었어요. 친구인 김달과 젤리는 가족과도 같은 존재로 울림이 신체를 얻기 위해 여울시에 갈 때나 울림을 죽게 만든 범인을 찾는 고된 여정에도 함께해 줘요. 정말 찐친이죠..
생명 경시 사회
난 너도 유기견이라고 생각했거든.
너도 집이 없어서 보육원에서 지냈고, 때가 되면 안락사당하는 유기 동물처럼 열일곱 살이 되면 신체가 폐기되잖아.
p. 163
소설 속에서도 돈과 권력을 등에 업은 사람들은 야비하기 짝이 없어요. 울림은 보육원에 있다가 엄마가 살아계셨을 때 이모처럼 친하게 지냈던 엄마 친구 집으로 들어가거든요. 그녀의 딸인 강지나는 울림이 자기 처지에 맞지 않게 당당하고 굽신거리지 않자 점차 불만을 키워갔던 인물이에요.
강지나는 어느 날 불의의 사고로 신체를 잃게 되면서 현울림에 대한 원망이 깊은 상황이었는데, 공교롭게도 현울림이 강지나와 보디메이트로 엮이는 일은 잔혹한 사건의 발단이 됩니다.
현실과 가상의 세계가 기이하게 얽혀있는 이 세상에서 생명의 가치는 최상위가 아닌 중간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 것 같아요. 국가는 누군가의 것이었을 신체를 마치 자산처럼 거두어 관리하고요. 저명한 연구소는 무연고 아이들을 불법으로 데려다가 마치 도구처럼 뇌를 연구하고 안락사시키기도 했어요. 강이룬은 그런 연구대상이었던 시기, 기억과 직결되는 치명적인 발병 가능성을 전해 듣고 갑자기 사라진 아이예요. 현울림이 마음을 준 사람이기도 하고요.
대환장 가상공간에서의 진실
근데... 진실이 항상 좋은 걸까?
유이레가 바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면, 과연 유이레가 그 진실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을까?
p. 295
직접 낳은 딸은 방치하고, 가상 세계에서 보다 완벽한 딸을 만들어 애지중지 만족해하는 부모가 있어요. 자신의 아이가 범죄를 저지르자 책임을 지도록 가르치는 대신 멀쩡한 다른 아이의 몸과 바꿔치기 하는 부모도 존재합니다.
더욱이 가상공간에서는 토성의 고리 위에서 스케이트를 탈 수도 있고 돈만 있으면 원하는 신체, 저택 같은 집을 꾸며놓고 지낼 수도 있어요. 이곳에서 진실이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최소한의 인간성 그리고 사랑
생명과 진실을 도외시하는 사람들이 대세인 사회일지라도 분명 자신들이 믿는 진실을 따르고자 노력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런 세상에서 인간은 도대체 어떤 지경까지 이를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먼 미래의 일이라지만 솔직히 소름끼쳐요.
울림은 이룬이 피식 웃는 소리를 희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룬은 울림을 꽉 안았고, 멈추지 않는 떨림은 서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몸은 빼앗기고 기억을 잃어도, 너와 나는 틀림없이 서로를 알아보고 어김없이 서로를 사랑하게 될 거야.
p. 430
자신의 몸을 잃어 사망처리 되고 속절 없이 떠돌던 현울림이 강이룬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여울시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에요. 현울림에게 여울시는 가상공간인 낙원보다 현실 속 진짜 낙원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